1. 멋진 장면을 상상한다.

2. 멋진 장면을 쓰고 싶다.

3. 하지만 멋진 장면을 쓰려면 과정을 써야한다.

로 시작되는 집필 동력이 망하는 과정

1. 본인이 생각하는 멋진 장면 나오려면 충분한 개연성과 캐릭터의 몰입이 필요하다.

고로 최소한으로 잡아도 30화를 써야한다.

2. 하지만 그 장면 말고는 생각해둔게 없는거나 마찬가지이기에 나름의 설정을 짜고 잘 쓴 다른 소설을 참고하게 된다.

3. 열심히 준비한다. 하지만 프로가 아니기 때문에 이 준비 과정은 보통 2주를 넘지 않고 연재를 시작하게 된다.

물론 연재 도중에도 다른 작품을 참고하는걸 멈추진 않는다.

혹은 멈추더라도 글을 재미있게 쓰고 싶기 때문에 나름 재미있을 것 같은 내용을 넣는다.

4. 그렇게 연재하다보니 잘 쓴 소설의 공통점을 발견한다.

사이다, 성장, 판타지.

그런데 내 소설에는 사이다도 부족하고 성장할 요소도 적다.

판타지적 요소도 부족하다.

심지어 주인공을 끌고 나가야하는 목적의식마저 빈약하다.

5. 하는 수 없이 온몸비틀기로 개연성을 짜내어 목표를 새로 잡고 설정을 대거 수정한다.

6. 그랬더니 당장 쓸 에피소드는 쓸 수 있는데 이후에 쓸 에피소드가 생각이 안난다.

왜? 설정을 대거 갈아 엎은데다 명확한 비전을 가지고 미래 계획을 세운 후에 바꾼게 아니라 어렴풋이 이게 문제라는 생각으로 바꾼거니까.

실제로 문제가 맞지만 고칠 역량을 갖추지 못한것.

7. 하지만 상황이 이래도 연재를 멈출 수는 없으니 일단은 현재 존재하는 히로인과 대화라던가 양아치 같은 잡졸을 사이다로 희생시켜 이야기를 질질 끈다.

8. 하지만 이건 내가 쓰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니다. 설상가상으로 이야기를 질질 끄니 독자가 빠진다. 댓글이 줄어든다.

9. 작품을 써갈 집필 동력은 떨어져가고 이제와서 보니 내가 바꾸어놓은 설정에 의하면 1번에서 생각해놓은 멋진 장면을 쓰기 위해선 적어도 130화는 더 써야할 것 같다.

10. 그런데 이제 독자도 다 빠졌고 의욕도 빠졌다.

11. 남은건 작가를 짓누르는 책임감과 이렇게 연중을 하면 신용을 잃을 것이라는 공포감 뿐이다.

하여 잠시 휴재를 하고 재점검을 해보기로 한다.

우선 요즘 유행하고 잘 쓴 소설들을 연구하는거다.

12. 하지만 연구하면 연구할 수록 의문만 남는다.

이게 재미있다는건 사람들이 많이 읽기에 증명되어 있다.

하지만 왜 재미있는지 모르겠다.

13. 무작정 따라하기엔 그건 표절이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기엔 내 소설이 망해간다.

그렇게 억지로 꾸역꾸역 연구하다보면 결국 깨닫는게 있긴 하다.

14. 내 소설은 처음부터 잘못되었다.

3막도, 4막도, 5막도, 12막 구성도 아니다.

히로인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방법을 차용하지 못했다.

주인공의 목표 의식은 빈약하고.

악역들은 평면적이다.

심지어 악역이 나올 구석도 많지 않다.

사이다는 꿈에나 나올 이야기이다.

전투씬은 심심하다.

상황에 따라서 글을 읽는 템포를 조절해야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시점 변화를 활용하지 못한다.

정보의 격차 또한 활용하지 못한다.

원래 쓰고자 했던 이야기의 본질도 잊어버렸다.

그걸 쓰기 위해선 뜯어고쳤던 설정을 원래대로 되돌려놓거나 최소 50화를 더 써서 개연성을 충분히 마련할 수 밖에 없다.

허나 그걸 할 동력도, 의지도, 아이디어도 없다.

문제는 많지만 내가 얻은 깨달음은 고작 문제가 많다는 것 뿐이다. 그걸 해결할 방법은 여전히 알 수 없다.

여기서 글을 더 써나가면 나갈 수록 점점 수렁에 빠져든다.

사람들은 글을 읽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쓰고 있는가?

NO.

재미있고 원하는 글을 쓰려다 결국 두마리 토끼를 다 놓치고 말았다.

하지만 어떻게 글을 쓰는 사람이 나 혼자만을 위한 글을 쓰겠는가.

15. 여기서 글쓰기의 재능이 갈린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은 이 벽을 마주치고 절망하지만 절망하면서도 꾸준히 루틴대로 글을 써서 꾸역꾸역 실력을 올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게 바로 기성작가다.

글을 쓰는 재능은 필력도 아이디어도 아닌 벽을 보면서도 꾸준히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필력은 기르면 되고 에피소드를 짜는 아이디어는 클리셰로 정형화 시키면 된다.

하지만 멘탈은 본인이 제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꾸준히 단련하는 수 밖에...

결국 기승전 재능 탓이라고 말하려던건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더 많이 공부하고, 퇴고 많이 하고, 훨씬 치밀하게 짜고 시작하라는거다.

적어도 앞으로 쓸 에피소드 10개의 개요는 미리 생각하고 시작하는게 안전빵이라고 생각한다.

개요가 정해져있다면 글을 쓰는 속도도 혁신적으로 빨라지기에 그저 과거의 내가 생각해뒀던 전개에 살을 붙여서 쓰기만 하면 된다.

재미있는 글을 쓰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오랜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