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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 Chapter 2. 죽어버린 채 살아가기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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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꽤 지난 후.

"대체 그거 얼마나 보고 있을 거예요?"

"사진이 마르고 닳도록."

"……하아."

사진관에서 일을 다 보고 난 다음에, 우리는 근처 카페로 와 있는 상태였다. 집으로 갈 수도 있었는데 내가 그냥 밖에서 뭐라도 먹고 가자고 했어. 좀 지치기도 했고.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지쳤다기보단 그냥 단순히 사진 찍느라 정신력이 빨린 거지만 말이다.

그래서 자릿세 느낌으로다가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씩을 시켜놓고서, 나는 의자에 반쯤 늘어져버렸다. 선배는 여전히 높은 텐션을 유지한 채 내 사진을 매만지고 있긴 한데.

그러고 있으니까 진짜 변태 같은데…….

"나 이 사진 가질래! 가져도 되지?"

선배는 이젠 아예 눈을 빛내고 있었다. 어째 손의진이 생각날 정돈데.

뭐, 사진이야 못 가져가게 할 이유는 없지. 이메일로 사진 파일은 이미 받아놓기도 한 데다가 당장 사진관에서 인쇄해주신 똑같은 사진만 열 장이 넘어가니까. 이렇게까지 많이 필요 없는데 받아놓고 보니 이랬다.

사진은 내가 봐도 잘 나왔으니까 몇 장을 갖고 있든 아무래도 상관 없지만.

"안 되는 건 아닌데, 가져가서 뭐 하시게요?"

"뭐 하긴? 기념품이지. 지갑 같은 데에다가 사진 끼워놓고 있다가 누가 우연히 보면 아 얘 우리 귀여운 후배야! 어때? 하고 할 수 있잖아."

"……그, 이해가 전혀 안 되거든요?"

"푸흐. 농담이고. 그래도 후배 사진 한 장쯤 갖고 있어서 나쁠 거 없잖아."

은설 선배는 내 반응이 재밌다는 듯이 웃으면서 그리 말했다. 그렇긴 하지. 솔직히 사진 못 가져가게 할 이유도 없고, 가져가게 해서 나쁠 것도 없으니까.

"그렇네요. 나쁠 거 없죠. 솔직히 선배가 그 사진으로 절 잊어버리지 않게 된다면야 저야 좋은 거고."

"…말에 무게가 담긴 것 같은데 착각일까? 후배야?"

"착각 아닐걸요."

"이럴 때는 착각이라고 해줘야지!"

그러자 이번에는 맘에 안 든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아니, 내가 맘에 안 들 수밖에 없는 말을 해버린 쪽에 더 가깝긴 하지만.

빈말은 아니었는데.

"뭐, 선배한테는 정말로 감사해하고 있으니까요. 오늘은 이것저것 전부 다 준비해주셨고. 오늘 뿐만이 아니라…… 예를 들어서 저번 주도 그랬고, 사실 그 이전부터도 계속 그랬고. 그래요."

"……."

한 가지, 묘하다고 생각이 드는 것이 있었다.

정말로 감사를 표할 뿐인 말인데, 왜 이렇게 말의 무게가 무거워지곤 하는 걸까. 아까도 그랬지만.

"하하, 참. 우리 후배 진짜……."

선배는 여전히 웃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다만, 아까와 같이 눈빛에 슬픔이 새겨지는 것도 볼 수 있었다.

"후배."

"네."

"솔직하게 말해도 될까?"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거의 비워지지 않은 잔 두 개에 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말해주세요."

"……후배."

방금 전까지의 밝은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이, 선배의 분위기는 낮게 깔려버렸다.

"나도 가끔, 후배가 무서워질 때가 있거든."

"……."

"그냥 그래서 그래. 응."

그건, 무언가에 짓눌려버렸기 때문인 것 같기도 했다.

"후배는 가끔가다 보면, 아무 말도 없이, 갑자기,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분위기를 낸단 말야. 그렇다고 그게 딱히 거짓인 것도 아니고."

"……."

"저번에도 말했지만, 난 너 두고 어디 갈 생각 없어. 비슷하게, 난 널 잊지도 못할 거야. 잊으려고 해도 평생 잊지 못하겠지…… 설령 네가 사라진다 해도 말이야. 갑자기, 아무 말도 없이, 그런다고 한들."

선배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노을아."

"……네."

"그래서 더 무서워. TS 증후군에 걸리고서도 변하지 않은 네가, 무서워."

"……."

차마 내가 할 수 있는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책망도 원망도 아닌, 그저 막연한 슬픔뿐인 어투라서.

그런 어투이기에, 더더욱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알아. 나는 너한테 이런 말 해서는 안 된다는 거…. 난 전부 다 알고서도 네 곁에 있는 거고, 무엇보다도, 내가 너한테 한 짓도 있고…… 하니까."

"…선배."

"아냐. 말 끊지 말아줘. 네가 무슨 말 할지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난 그냥…… 그냥……."

손을 내젓다가 후우, 하고 숨을 한 번 뱉은 선배가 말을 이었다.

"…말로 하려니까 너무 복잡하네, 하. 아무튼… 너, 며칠 안 남았지. '그거'."

"……아."

"결국엔 그거 때문에… 한 마디 하고 싶었어. 조금은, 주제넘을지도 모르겠지만."

선배는 결국,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가.

감정 하나가 품고 있는 수없는 인과들을 알고 있기에, 선배가 이렇게까지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무엇 때문에 무슨 생각이 들었으며, 내게 말하고 싶은 내용이란 무엇인가.

"……죽지 않을 거라고, 말해줘."

은설 선배는,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토해냈다.

생각해 보면, 선배가 내게 하고 싶은 말이라고 해 봐야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거창한 말 같은 게 나오지 않을 거란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선배가 슬퍼하는 이유도 그리 대단치 않은 이유에서 오고 있다는 것을, 처음부터 짐작할 수는 있었다.

나는 그제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셨다. 조용히.

목에 걸리는 느낌이 있었다.

"……."

선배는 그저 날 걱정한 거다. 처음부터.

은설 선배 또한, 내가 며칠 후에 고모와 함께 가야 하는 곳이 있음을 알고 있다. 언젠가 말해준 적이 있으니 계속 신경이 쓰였을 거다.

그것도 그렇지만, 여전히 내가 여자가 됐다는 사실 자체가 많이 걸렸을 터다. TS 증후군 자체에 대한 걱정도 있을 거고, 내가 남자였을 때 은설 선배를 좋아한 적이 있다는 사실도 그렇고, 그리고 또 여러 일로.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하지. 안 그래도 불안정할 내 마음이, 며칠 후에 있을 일 때문에 더 안 좋은 방향으로 튀어버리는 건 아닌가, 하고 걱정한 거다. 선배다운 걱정이라고 해야 할까.

그냥, 막말로.

내가 죽어버릴까 봐.

그렇게 걱정이 들면서도, 정작 거기에 대해서 따지고 들 수가 없어서. 따지고 들어봐야 의미도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럼에도, 한 마디 정도는 하고 싶어서. 안 할래야 할 수가 없어서.

그래서 슬퍼했고, 내게 하고 싶은 말을 전했을 뿐이었다. 은설 선배는.

그 복잡한 생각이 얽혔던 선배의 한 마디.

단지 죽지 말아달라는, 단순하기 그지없는 선배의 말에.

나는.

"미안해요."

쓰레기같은 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

"그치만, 알고 있었잖아요. 저 이렇게 말할 거란 거."

"……응. 그렇지."

처음 여자가 되고 나서, 나는 선배를 보고 떠나지 말아달라고 했다. 선배는 그 부탁을 흔쾌히 받아들여줬다.

나는 선배를 좋아해도 되는 상대가 아니었다.

지금 정반대로 선배가 날 보고 떠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나는 그 부탁을 들어줄 수 없었다.

"……."

병신 같은 새끼.

죄악감에 속에서 쓴물이 올라온다.

"하아. 그래서 내가 너 보고 옛날이랑 달라진 거 없다고 얘기했던 거야, 아까 전에."

그러던 와중에, 선배가 의자 등받이로 몸을 조금 늘어뜰이며 그렇게 말했다. 화제가 달라진 건 아니었지만, 진지함은 조금 내려놓은 듯한 모양세였다.

"……아."

"알맹이가 같잖아. 말투도 똑같고, 행동도 똑같고, 마인드도, 신념도, 장점도, 단점도……. 단지 달라진 건, 네가 여자라는 것뿐이지."

선배의 눈빛에 슬픔이 걷어내지는 광경을, 나는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그것이 더 이상 슬프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 터였다. 그렇다면 이건 어쩔 수 없다며 현실을 받아들이는 일종의 순응인 걸까.

알 수 없었다.

"혹시나 하는 거지만, 이런 걸로 죄책감 같은 거 갖지 마. 이건 어디까지나 내가 쓸데없는 소리 한 거고…… 나는, 너의 그런 점들까지 포함해서 마음에 들어했던 거니까."

"……."

단지, 선배는 잔을 들어 그제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여전히 은설 선배는 웃고 있었다.

슬픔은 걷혀지고, 이제는, 괜찮다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뭐가 괜찮다는 걸까.

"그거, 마음에 들어하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아무리 봐도 이건 제 단점인데."

"단점 하나 못 감싸주면서 선배라 불릴 자격은 없겠지? 친하다는 건 그런 거니까."

어째 진혁이가 생각나는 말이구나. 분명 걔도 못난 점 받아줄 수 있는 게 친구다, 라고 했던가.

"……정말, 고마워요."

"뭘. 내가 미안하지."

그때랑 비슷한 울림이 있어, 나도 끝내 미소를 지으며 그리 말했다. 감사하다는 말.

이번에는 그렇게 무겁지 않았다.





*****





[부재중 전화 (1) - 고모 (16:38)]


"……응?"

선배랑 좋은 분위기 속에 헤어지고 나서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부재중 전화가 하나 와 있었다.

아, 그리고 문자도 두 통.


[바쁜가 보네~ 시간 날 때 한번 전화 좀 해줘~~~ 다른 게 아니라 다음주에 만나기 전에 목소리 정돈 들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 고모 (16:42)

[시간 나면 연락 줘~~^^] - 고모 (16:43)


선배랑 열심히 떠들다 보니까 전화가 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 분위기가 좋아진 이후로는 다시 텐션이 올라가서 정신이 없어졌지. 시끄러울 정도가 됐으니까. 안 그래도 핸드폰이 주머니에 있어서 더 몰랐다.

지금은 딱히 일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나는 바로 고모한테 전화를 걸었다. 아직 밖이긴 하지만 뭐 어떤가. 걸어가면서 전화하면 되지.

그리고 몇 초쯤 지났을까.

- "여보세요?"

고모가 전화를 받았다.

"네, 고모. 저예요."

- "……아."

내 대답에 잠깐 정적이 흘렀다가, 고모가 뭔가 기억해낸 듯한 감탄사를 냈다.

역시 고모도 내 목소리를 예상 못 했던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지. 처음 듣는 목소리일 텐데. 이제는 익숙했다.

- "어머. 진짜 '그거'구나…. 목소리가 달라서 못 알아볼 뻔 했어."

"하하, 죄송해요. 놀라게 해 드려서……."

- "아이, 뭐 어때. 네가 걸리고 싶어서 걸렸겠니? 이렇게 익숙해지는 과정도 필요하겠지. 익숙해지려고 연락한 것도 있고! 그러니까 죄송할 필요 없어."

고모는 약간 내가 걱정되는 듯한 말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 "몸은 괜찮니? 성전환 증후군 때문에 몸이 아프거나 그러진 않아?"

"에이. 괜찮아요. 전혀 안 아파요. 보니까 건강에 문제가 생기는 병은 아니라 그러더라고요."

- "아, 그러니? 다행이구나. 그리고 또 힘든 점은 없니? 갑자기 여자가 되어서는 여러모로 곤란할 텐데……."

"괜찮아요. 친한 사람들한테 도움을 많이 받아서 옷이나 이런 것도 다 해결을 했고 그래요."

- "어머. 그러고 보니 친구들도 한 번씩 만나봤어?"

"만나봤죠. 다들 그대로라서 안심했어요."

- "다행이네……."

그제야 고모는 조금 안심이 되는 듯했다. 날 걱정해주는 건 고모 쪽도 똑같구나. 아니, 똑같을 수밖에 없나.

- "그래도 힘든 일 있으면 바로바로 알려줘야 해? 고모네는 언제나 열려 있다는 걸 기억해 주렴."

"이미 과분한걸요 뭐."

- "또, 또! 그 소리."

"하하하……. 그래도 지금은 진짜 괜찮아요. 제 생각보다도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모두가 내게 걱정을 해주는 상황이 내 생각보다도 괜찮은 게 아니면 대체 뭐가 될 수 있을까. 단순히 빈말로 하는 소리는 아니었던 셈이다.

아무튼, 나는 이어서 말했다.

"그러고 보니까, 목소리 정돈 들어보고 싶으시단 게……."

- "아. 그러니까 말했잖니? 목소리도 들어보고 익숙해져야 다음 주에 만났을 때 다른 사람이랑 헷갈리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노을이 널 알아볼 수는 있어야 하잖니?"

"아하. 그렇죠."

고모의 그 말에 순간적으로 셀카를 찍었던 일이 떠올라버렸다. 분명 비슷한 이유로 사장님한테 셀카를 찍어서 보냈었는데.

어음.

지금 생각해보니까 별로 기억하기 싫네. 왜 그 쌩 난리를 치면서 셀카를 찍었던 걸까 나.

"그, 사실 민증 때문에 오늘 사진 찍었거든요. 그거라도 보내드릴까요?"

그래도 고모가 날 알아봐야 하는 건 맞아서, 나는 사진 언급을 했다. 목소리뿐만 아니라 내 얼굴도 알면 날 알아보는 데에 좀 더 도움이 될 테니까.

셀카는 굳이 보내고 싶지 않아서 그냥 민증 사진으로 말했다.

- "정말? 그래주면 더 좋지. 더 잘 알아볼 수 있을 테니까."

"네. 그러면 전화 끊고 바로 보내드릴게요."

-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고모가 이어서 말했다.

"그럼 다음 주 일요일에 보자. 그때 다시 한 번 연락 줄게~"

"네 알겠습니다."

- 뚝.

그리고 전화가 끊겼다.

"후우."

아무리 고모라지만 사실 그렇게 대하기 힘들지 않다. 오히려 좀 가까운 편이지. 아무래도 아빠의 누나다 보니까 이것대로 매칭이 잘 되는 게 있었다.

나는 고모한테 카톡으로 내 사진을 보냈다.


[(사진)] - 나 (17:04)

[고마워~] - 고모

[예쁘네~~^^] - 고모 (17:05)


답장은 바로 왔다.

윽. 고모한테 예쁘단 말 들으니까 뭔가 묘하네. 사진이 잘 나오긴 했지만.

음.

그건 그렇고.

"다음 주 일요일……."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서, 눈을 잠깐 감았다 떴다.

"……시간 참 빠르다고 해야 할지."

2월 7일, 일요일.

그날이 내가 고모랑 따로 만나서, 가야 할 곳에 가는 날이다. 설날이 오기 전에.

"후우."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2월 7일.

다음 주.

날이 머지 않았다는 생각에, 나는 한숨을 허공에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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