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 때부터 장르 문학을 좋아했다.


판타지, 무협, SF, 가리지 않고 재미만 있다면 뭐든지 먹었다.


그러던 어느날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왜 현실에는 게임 빙의물에 나오는 게임의 반에 반만이라도 재미있는 게임이 없을까?'


가령 아카데미물- 게임 빙의라던가.


무협물- 게임 빙의 라던가.


수많은 게임 빙의물에서는 보기만 해도 재밌고, 설명을 듣기만 해도 미친듯이 재밌을 것 같은 게임이 마치 당연하다는 양 나온다.


그런데 현실에는 소설에 나오는 게임의 발가락 때만큼이라도 비슷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고유 능력도 없고, 상태창도 없고, 자율성도 없다.


아카데미는 물론 이스터에그나 히로인 기타등등 전부 없다.


하여 나는 이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저렇게 재미있는 게임이 있는데 주인공만 하고 나는 해보지도 못하다니, 나도 게임 잘 할 수 있는데!'


억울하다, 억울해 죽을 것 같다.


오호통재라!


그렇게 소리쳐도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재미있는 게임마저도 현실이 소설에게 진 것이다.


이때부터 나는 한가지 열망을 품게 되었다.


꼭 내가 현실에서 게임으로 빙의하진 못하더라도 게임만이라도 한번 해보고 싶다···.


게임 빙의물은 사람에게 그런 갈증이 일게 만드는 마성이 있었다.


이세계 빙의는 나와 먼 이야기라지만, 게임이라면 내 주변에서 얼마든 볼 수 있는 존재니까 더 그런 면이 있었다.


그래서 만들게 되었다.


내가 소리쳤다.


"드디어 완성했다!!!"


판타지무협선협동양풍판타지요괴스팀펑크아케인펑크사이버펑크셜록홈즈코즈믹호러외신다크판타지재단던전운영마법소녀히어로빌런초능력탑등반현대판타지 기타등등!!


"모든 장르가 섞여있는 나의 역작!!"


하하하하하하!


나는 광기어린 웃음을 지었다.


어린 시절의 꿈이 완성된 것이다.


도대체 어찌 기쁘지 아니할 수 있을까.


내가 모니터를 보고 미친듯이 웃으며 완성을 자축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마우스를 움직였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화면에 캐릭터 생성창이 열린다.


완성되었으니 배포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이런 재미있는 게임을 한번도 해보지도 않고 배포할 수는 없다는 마음이 들었다.


내가 설정창을 바라보았다.


우선 정해야 할 것은 이름!


잠시 고민하던 나는 이름은 랜덤으로 돌렸다.


"이름을 고민 할 시간조차 아깝다."


그 다음은 성별.


나는 게임의 성별은 무조건 여성으로 한다는 신념이 있었다.


남자 캐릭터의 우락부락한 등짝 보면서 게임하기 VS 쿨 뷰티 미소녀의 아름다운 옥체를 보며 게임하기


선택할 필요도 없이 후자다.


그 다음으론 고유 능력.


당연하게도 사망회귀.


모든 챕터가 랜덤 변수로 진행되는 게임에서 '다시 한번!'을 외칠 수 있는 능력은 이게 유일했다.


이 게임은 로그라이크 게임과 아주 유사하기에 이건 일종의 '슈퍼 이지-' 모드 같은 것이다.


비겁하다고 욕하지 말라.


나는 원래 게임을 할 때면 꼭 편의성 모드 떡칠에 이쁘고 아름다운 일러스트를 추구하는 사람이니까.


그렇게 질풍노도처럼 캐릭터 설정을 해나가던 나는 한가지 난제를 두고 잠시 마우스를 멈추었다.


"흐음···."


마지막으로 해야할 것은 능력치 설정이었다.


내가 능력치 목록을 쭉 흝어 보았다.


힘 민첩 체력 신성력 마력 정신력 신비 계몽 매력 재주 운 친화력 기타등등.


무수히 많은 능력치가 내 시야를 어지럽혔다.


능력치가 이렇게 많은 이유는 단순했다.


선택장애로 플레이어를 죽이기 위해서- 는 아니고.


기본적으로 스탯이 락- 상태이기 때문이다.


보통 게임에서 능력치란


힘 : 0

민첩 : 0

체력 : 0

마력 : 3


이런 식으로 표기가 될 것이다.


하지만 내 게임에서는 좀 다르다.


가령 포인트가 10이 존재하고 그걸로 매력만 찍는다면


매력 : 10


이외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기연이든, 훈련이든, 깨달음이든 어떤 수단으로든 해당 능력치를 해금하기 전까진 능력치가 존재하지도 않는다.


이 게임에서 능력치는 일종의 스킬과 비슷한 역할을 하기에 필연적인 일이었다.


게다가 이러면 플레이어는 스탯을 찍을 때마다 기나긴 행렬을 보지 않아도 되고 나는 깔끔한 인터페이스를 만들 수 있으니 이 어찌 완벽한 타협이 아닐 수 있을까!


내가 중얼거렸다.


"능력치, 흐음···. 능력치라."


효율적으로 생각한다면 아무래도 특수 능력치를 잔뜩 개방해두는게 게임 진행에는 이로울 것이다.


당연하지만 특수 능력치는 해금하기 어려우니까 그렇다.


이를테면 정령 친화력이나 마력 재능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 것들은 선천적으로 얻는게 아니라면 후천적으로 얻는 것이 아주 어렵기에 시작부터 얻는게 좋았다.


허나.


"내겐 꿈이 있지."


내가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꿈이란!


'예쁜 여캐로 모든 NPC를 호감도 MXA를 찍고 내가 죽으라고 하면 죽는 그런 상황을 만들어보고 싶다!!!'


였다.


뭐,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이 게임에 능력치라는건 일종의 스킬이니까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그리고 이론상 생각해봐라.


말 한마디로 누구든 꼬실 수 있다면 싸움을 할 필요도 없지 않겠나?


옛말에도 최고의 승리는 곧 싸우지 않고 승리하는 것이라 하였으니 이 전략은 옳은 것이 틀림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나는 결정을 내렸다.


"좋아. 역시 매력 몰빵으로 결정."


그렇게 잔여 포인트 10개가 전부 매력으로 투자되었다.


무력이 모자라서 초반 진행에 에러가 있겠지만, 괜찮다.


어차피 사망회귀 능력이 있잖은가?


실패하면 또 하면 된다.


그런 마음으로 캐릭터 생성 완료를 누르는 순간.


마치 팽팽하게 잡아당겨져 있던 실이 풀린 것처럼 위화감이 몰려왔다.


"어?"


잠깐, 내가 게임을 어떻게 만든거지?


애초에 이렇게 말도 안되는 게임이 있을 수가 있어?


그리고 내가 만든 게임인데도 왜 게임적인 내용은 기억이 나는게 없지?


엄청난 위화감.


그보다 더한 것은···.


"도대체, 여기가 어디야? 난 얼마나 여기서 게임을 만들고 있던거지···?"


어두컴컴하고 벌래가 나올 것 같은 독실.


그 중앙에서 환하게 빛나는 모니터를 제외한다면 온 사방이 어둠이었다.


책상 아래를 바라보면 어째서인지 컴퓨터가 작동하기 위해선 존재해야할 본체가 없이 모니터만 고고히 빛나고 있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내가 욕지거리를 입에 담았다.


"이런 시···"


띠링!


[우리 게임은 바르고 예쁜 말을 지향합니다!]


그렇게 나는 게임 속으로 떨어졌다.


*


[세계 생성중···]


[키워드를 생성합니다.]


[#사이버 펑크 #신성 국가 #아카데미]


[생성 완료!]


[신성 아카데미의 사이비 교주가 되었다.]


[이 세상에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생겨났습니다.


사람들은 신을 믿으며 부유하고 즐거운 삶을 보냈고 모두가 행복했습니다.


차마 입에 이름을 담을 수도 없는 '그날'


신들이 인류를 저버린 그날 전까지는 말이지요.


신성은 인류를 버렸고, 인류는 찬란했던 시절만큼 몰락했습니다.


온 사방에는 괴물의 울음소리와 사람의 신음소리가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전화위복이라고 할까요? 인류는 이제 종교 대신 과학에 몸을 담았습니다.


신의 위상을 향해 도전하며 끝도 없이 높아지는 바벨탑처럼 인류가 지어올리는 마천루는 나날이 높아져갔습니다.


발전하는 도시, 밤을 밝히는 네온사인, 몸 곳곳을 사이버 웨어로 교체한 사람들.


사이버 펑크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허나 이게 무슨 일일까요?


결코 결합할 수 없을 것처럼 서로를 향해 이를 드러내던 종교와 과학이 서로 손을 잡았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신체를 바치면 힘을 내려준다는 계율을 가진 신- 종교가 도시에 탄생했거든요.


신- 종교는 정말로 신체를 바치면 힘을 내려주었고, 신체 따위야 사이버 웨어로 교체해서 쓰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나쁜 거래도 아니었습니다.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손가락 따위야 몇번이고 자를 수 있지요.


개중에서 당신은 꽤 재능 있는 신성술 사용자입니다.


그 재능을 인정 받아 신성-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도, 당신의 부모도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이 슬프고 비참한 네온 사인 도시 속에서는 그런 감정도 사치.


아버지는 전쟁터로 끌려가서 신성술의 대가로 바쳐져 죽었고 어머니는 괴한에게 습격당해 장기를 팔리고 죽었습니다.


뭐, 특별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인구는 많고 땅은 부족한 현 시대에선 흔하게 일어나는 문제였지요.


쓸모가 있다면 겪을 일이 없는 일중 하나입니다.


당신과 다르게 당신의 부모는 쓸모가 없었을 뿐입니다.


이 냉혹한 사실을 깨달은 당신은 눈물을 흘리는 대신 고사리 손으로나마 이것을 바꾸어보자고 결심했습니다.


당신은 도시에 웃음과 미소를 안겨줄 것입니다.


바로 혁명- 신 종교와 함께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사이비 종교지만 당신에게 그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부터 당신은 혁명- 신 종교의 교주니까요!


아, 오늘은 학교를 가야하니까 내일부터 말입니다!]


[chapter - 1 기계 장치의 신과 당신을 지켜보는 신]


[1. 신도를 만드세요. (0/1)]

[2. 살아남으세요.]

[3. ???]


게임에 빙의한지 약 10분 차.


현실을 부정하며 멍하니 설명창을 읽어내리던 나는 결국 입에 욕을 담았다.


"이런 시발···."

"아리에, 아침부터 왜 그렇게 죽상이에요?"

"아, 칼리. 미안.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나를 걱정스러운 눈망울로 바라보는 여성에게 사과했다.


어딘가 니트같은 차림새와 순박한 인상.


검은 머리에 푸른 눈이라는 조금은 묘한 조합.


전체적으로 공돌이- 라는 느낌의 여성의 이름은 칼리.


내 룸메이트였다.


정확히는 그런 모양이었다.


그리고 칼리가 말한걸 보면 알듯이 내 이름은 아리에.


나는 괜찮다는듯 고개를 휘젓고 화장실으로 직행한 후 문을 닫았다.


한숨부터 나왔다.


"하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지만, 확실하다.


나는 지금 게임에 빙의했다.


그것도 내가 만든 정체불명의 게임에.


하지만 분명히 내가 만들었다는 자각은 있는데 일부 게임 시스템을 제외하면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 없었다.


내가 속으로 이를 아드득 바드득 갈았다.


'이러면 메리트가 전혀 없잖아.'


불만 사항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빙의할거면 성별이라도 그대로 놔둬 주던가.


힐끔 눈을 돌리면 거울에 비친 아름다운 소녀가 있다.


목까지 오는 단발의 은색 머리, 아름다운 백옥의 눈.


눈을 아래로 나오면 적당한 볼륨감의 가슴이 보이고, 목소리는 옥구슬이 굴러가는 소리처럼 아름답다.


하지만 나는 그걸 제 3자의 입장에서 보고 싶은 것이었다.


결코 내가 그렇게 되고 싶었던게 아니란 말이다!!!


당장 나를 원래대로 돌려놓으라고 이 게임에 나를 떨어뜨렸을 누군가에게 씹할씹할 줄창 욕을 내뱉었지만 당연히 현실은 무반응.


나는 결국 반쯤 포기하고 읊조렸다.


"상태창."


띠링!


[이름] 아리에


[성별] 여자


[고유능력]


{사망회귀}


[능력치]


[매력] 10


[설명]


[앞으로 무수히 많은 차원을 여행하게 될 아름다운 소녀입니다. 죽으면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는 깜찍한 비밀도 가지고 있죠!]


그러자 눈 앞에 청량한 종소리와 함께 푸르른 창이 떠올랐다.


하아···.


그래. 돌려 무엇하랴.


나는 내가 미쳐서 만든 캐릭터가 되어있었다.


이럴줄 알았으면 매력 몰빵 안했지.


내가 갑자기 등교 준비를 하다가 화장실에 처박혀 한숨을 푹푹 내쉬니 칼리가 화장실의 닫힌 문을 똑똑 두드렸다.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렸다.


"아리에, 어디 아파요?"

"아냐 칼리. 괜찮아. 그나저나 너도 혁명- 신 종교를 믿어보지 않을래?"

"···네?"

"농담이었어. 잊어줘."


드르르르륵.


내가 칼리에게 종교 권유를 한 순간 나에게만 보이는 주사위가 마구 굴러갔다.


포교에 성공하려면 나와야하는 최소 숫자는 15. 나온 숫자는 8. 실패였다.


'매력 이 쓰레기 같은 능력치'


내가 속으로 치를 떨었다.


물론 이런 방식의 포교는 성공하면 최면이나 마찬가지이기에 매력 능력치가 10이 아니었다면 시도도 못했을 행동이지만, 아무튼 실패했으니 쓰레기다.


한껏 매혹을 씹어대던 나는 숨을 후읍 들이쉬고 화장실에서 나왔다.


그래, 빙의하게 되었으니 이제 이게 내 삶이었다.


정신 바짝 차리고 현실에 적응할 필요가 있다.


다만, 끔찍한 점은 팔자에도 없는 학교를 다시 다녀야 할 판이라는 것이겠지.


내가 화장실에서 나와서 현관으로 향했다.


"칼리,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

"네? 월요일이에요."

"···으음."


설마 월요일에 학교를 안 가진 않겠지?


원래 세계에서는 택에 택도 없는 일이지만 다른 세계였으니 혹시 모를 일이다.


아니면 고등학교가 아닌가?


나는 슬쩍 창문 너머로 바깥의 정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허공을 떠다니는 드론이나 아침에도 힘을 과시하는 네온사인과 수많은 사람들이 사이버 웨어와 함께 움직이는 비현실적인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에 나는 정보를 탐색하던 것도 잊어버리고 속으로 감탄사를 내뱉을 수 밖에 없었다.


'정말로, 다른 세계구나.'


이 순간 나는 진심으로 내가 이방인이 되었다는 것을 다시금 체감할 수 있었다.


구름을 뚫고 올라가 묵빛으로 반짝이는 초대형 건물은 이곳이 정말로 내가 살던 현대가 아니라는 증거물 같았다.


잠시 입을 벌리고 감탄하던 나는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사람들을 흝어보았다.


그리고 얻은 정보에 따르면 학교로 향하는 누구도 교복으로 보이는 것을 입고 있진 않았다.


이 세계의 고등학교가 자유분방한 것일 수도 있지만 계속 이런식으로 추리했다간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할 판.


아마도 내가 다니는 학교는 대학교가 맞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월요일에 학교를 안 갈 수도 있는데···.


아무래도 칼리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으니 학교를 가는게 맞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마음에 걸리는 점이 하나 있기도 했다.


조각조각 파편화된 내 기억에 의하면 이 게임은 챕터마다 여러 소재와 장르를 섞는 것이 기본이었다.


정확히는 웹소설에 자주 나오는 장르를 복합적으로 섞고 그걸 구현하는 형식.


그리고 분명 이 세계의 태그는 #사이버펑크 #신성국가 #아카데미 였을 터.


그렇다면···.


추론을 마친 내가 칼리에게 물었다.


"오늘은 무슨 수업을 할까?"


그러자 칼리는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곤 답했다.


"그야··· 시간표대로 하는거니까, 1교시엔 수학을 하고 2교시엔 신성술을 배우고··· 그러지 않을까요?"

"하나 물어보겠는데, 우리가 다니는 학교는 대학교 맞지?"

"당연하죠."

"그런데 정해진 시간표가 있고, 담임 선생님도 있고?"

"아리에님, 역시 오늘 이상해요. 어디 아픈거 아니에요?"


칼리가 진심으로 걱정스럽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다시금 손을 저어 괜찮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그보단, 맞지?"

"음··· 그거야 그렇죠."


내가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역시 아카데미물의 숙명이란, 이런거구나 싶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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