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탈자 습격 사건을 계기로 모습을 드러낸 나는 부지런히 움직였다.


 우선 마을 이름을 지었다. 내 둥지가 있는 뾰족한 산 봉우리 옆이란 의미의 '포인트 마운틴 사이드'라는 이름이 있었으나 멋도 없고 쓸데없이 길어 마음에 안 들었다. 마을 이름은 처음 정착했던 부부인 라이오스와 투비츠의 이름을 따 라이오비츠로 했다.


 거처도 마을 안으로 옮겼다. 기존 둥지는 창고 겸 동면용 별장으로 쓰기로 했다. 가파른 산 꼭대기에 있다 보니 이래저래 소통하기 불편한 탓이었다. 나야 날아서 내려오던 마법을 써서 내려오던 하면 됐으나 마을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으니까.


 폴리모프 상태도 항시 유지했다. 소녀-의 모습으로 지내야 하는 건 마음에 안 들었지만 드래곤의 모습으로 마을을 활보하면 보기 안 좋을 뿐더러 각종 기반 시설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주민들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당장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해줬을 뿐더러 내가 이 땅을 떠날 생각이 없음을 확인시켜 줬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마을에 머물기로 한 나를 위해 주민들이 저택을 지어주기로 했다. 설명을 들어보니 저택이라고 해도 판타지 귀족들이 살법한 화려한 건축물은 아니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조금 더 잘 꾸민 마을 회관 느낌? 그래도 마을 평균에 비하면 한참 사치스러운 건 맞았다. 제대로 방도 나눠져 있었고 침실에는 온도 조절을 위한 간단한 마도구도 비치 되기로 했으니.


 나는 추위도 더위도 별로 안타고 따로 음식을 섭취할 필요도 없어 대충 빈 집에 들어가 지내겠다 했지만, 일치단결한 마을 사람들이 수호신님을 그렇게 모실 순 없다며 한사코 착공에 들어갔다. 일단 가장 넓은 빈 집에서 지내기로 했다.


 그리고 무녀 자매, 에레아와 에레노가 내 수발을 들게 됐다. 이 또한 필요 없다 했으나 받아줄 때까지 동상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절대 움직이지 않겠다는 폭탄 선언을 하는 바람에 허락할 수 밖에 없었다.


 둘은 자신들이 나를 섬기는 무녀임을 알아볼 수 있는 증표 같은 걸 줄 수 있냐 물었다. 잠시 생각한 나는 금발이었던 둘의 머리색을 나와 똑같은 푸른색으로 바꿔주었다. 소화하기 힘든 색상임에도 둘 다 시골에서 보기 힘든 미인인 덕일까, 제법 잘 어울렸다. 눈동자는 원래 벽안이었던 터라 굳이 손대지 않았다. 방방 뛰며 기뻐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나저나 처음 정착한 가족의 외모가 이렇게 뛰어난 편은 아니었는데. 모친 쪽이 미인인가? 아니면 돌연변이?


 그런 생각을 하다 문득 떠오른 "그런데 누가 언니야?" 라는 질문을 던졌다. 둘이 동시에 "제가 언니에요!" 하고 외쳤다. 에레아가 키가 좀 더 커서 언니인 줄 알았는데 이란성 쌍둥이인 모양이었다. 이런 싸움이 으레 그렇듯 결론이 나지 않기 마련이라 둘이 투닥거리는 틈을 타 몰래 빠져나왔다.


 그 후로는 마을을 돌아다니며 시설들을 점검했다. 용언과 마법을 이용해 낡은 건물을 보수하고 무너진 울타리를 일으켜 세웠다. 풍차는 바람이 불지 않아도 돌아갈 수 있도록 조치했으며 말라 버린 우물은 다시 채웠다. 남는 시간에는 틈틈이 저택 공사도 도왔다.


 그럴 때마다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에레아와 에레노가 "정말 대단하세요!", "역시 수호신님!" 이라며 칭찬을 남발했다. 부끄러워 저도 모르게 꼬리가 흔들렸다. 어째 시간이 갈수록 칭찬이 유치해지며 어린아이 취급하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기분 좋았기에 그냥 놔두었다.


 그렇게 열흘 정도 지나자 영주의 후계자, 그러니까 현 영주가 찾아왔다.


 아브라스 코펜이라는 이름의 날카로운 인상의 열 여섯 짜리 미소년이었다. 전 영주를 닮은 갈색 머리칼과 눈동자가 제법 인상적이었다.


 대동한 수행원은 적었다. 기사 셋과 마법사 하나, 나이 든 집사 하나 였는데 당당한 아브라스와 달리 하나 같이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나저나 전 영주가 라이오비츠를 찾았을 땐 군대까지는 아니더라도 제법 규모가 있었는데. 전쟁으로 가세가 많이 기운걸까? 잘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마차에서 내린 아브리스가 내 앞으로 걸어와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오른손을 심장께에 얹고 왼발을 살짝 뒤로 빼는 것이 과연 귀족의 인사법이구나 싶었다.


"안녕하십니까, 블루 드래곤님. 코펜 가문의 가주를 맡고 있는 아브라스 코펜이라고 합니다."

"그래, 반가워."


 물론, 나는 뒷짐을 진 채 대충 인사를 받았다. 평소 반갑게 인사를 받아주던 모습과 괴리감을 느낀 탓인지 내 뒤에 선 에레아와 에레노의 의문 어린 시선이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앞으로 무슨 이야기를 나눌지 모르는데 괜히 자세를 낮춰 얕잡아 보일 필요는 없다.


 그리고 드래곤은 오만해야 한다. 오만하지 않은 드래곤은 별종이요, 정신병자다. 이건 판타지의 상식이다. 내 마을 사람들이야 그렇다 쳐도 그 누가 정신병자와 이야기하고 협상하고 싶어 하겠는가!


 다행히 이 상식은 이 세계에서도 통하는지 아브라스는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서서 얘기하기도 뭐한 데 따라 와."

"알겠습니다. 수행원들과 함께 가도 되겠습니까?"

"상관없어."

"감사합니다."


 저택은 아직 공사 중 이었기에 마을 회관으로 갔다. 다 들어오기에는 조금 좁아 들어오는 인원을 제한했다. 나는 에레아를 대동했고 아브라스는 집사와 마법사를 대동했다.


 들어가기 전,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은 에레아가 에레노를 놀리려 들었기에 꼬리를 휘둘러 엉덩이를 찰싹 때려줬다.


 나와 아브라스는 회관 중앙의 원탁에 마주 앉았다. 에레아는 내 뒤에, 마법사와 집사는 아브라스의 뒤에 섰다.


 나는 생각할 수 있는 최대한 건방진 자세(그러니까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를 취하고는 조금 날선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왜 왔어?"


 뒤에 선 마법사와 집사가 움찔하며 안색이 파리해지는 것이 보였다. 연기에 몰입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드래곤 피어를 조금 흘린 모양이었다.


 그러나 아브라스는 여전히 침착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음, 저 정도는 해야 귀족 하나 싶었다.


 그는 전 영주인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코펜 가문의 가주 자리에 올랐으며 드래곤님의 소식을 듣자마자 간단하게 사절단을 꾸려 찾아왔으며 앞으로의 일을 함께 논의하고 싶어 찾아왔다고 했다.


 그 이야기에 '전 영주가 할아버지면 아버지는 어떻게 된 거지?' 같은 생각을 했는데, 내 표정에서 생각을 읽은 걸까. "아버님은 2년 전 전쟁에서 할아버님과 함께 전사하셨습니다" 같은 묻지도 않은 살벌한 말을 해왔다.


 나는 얼떨결에 "그렇구나, 둘 다 괜찮은 인간이었는데" 하고 대답해 버렸다. 할아버지 쪽은 몰라도 아버지 쪽은 본 적도 없는데. 그래도 아브라스가 감사하다는 인사말과 함께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어 굳이 정정하진 않았다.


 의도치 않게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귀족들은 살벌한 정치판에서 살아남기 위해 표정 읽는 법을 배운다는데, 그게 진짜 가능한 건가?' 하는 내 의문을 해소해 준 아브라스는 앞으로의 계획을 쭉 설명했다.


 시청각 자료도 없는데 어찌나 PPT를 잘하는 지, 고개 끄덕이는 기계가 된 기분이었다. 이게 진짜 열흘도 안 돼서 준비한 게 맞나 싶었다. 진짜 이 정도는 돼야 귀족하나?


 아무튼 복잡한 내용을 다 덜어내고 세 줄로 요약하면.


1. 나라는 빽을 이용해 라이오비츠 인근을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완전 중립 지역으로 만든다.

2. 그 후 이런저런 복잡한 방법들을 이용해 마을을 발전시킨다.

3. 그리고 복잡한 건 코펜 가문에서 알아서 한다.


 였다.


 전체적으로 마음에 들었지만 특히 3번 항목이 아주 마음에 들었기에 그 자리에서 승낙했다.


 에레아가 날 보는 눈이 아주 조금 불경해졌지만. 뭐, 어쩌겠는가. 내가 하겠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