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https://arca.live/b/tsfiction/105828167/523064467#c_523064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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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년은 세월은 참으로 길었다.


세상에. 선조의 친우이자 용에게 청혼이라니.
그것도 본인의 청혼이 아니라 지 형이랑 결혼해달라는 대리 프로포즈다. 아니, 대리 프로포즈라는 말이 존재할 수 있는 말인가? 그냥 맞선이라고 표현해야 하나?
어찌됐건 페리스에겐 참으로 미안하고 또 안타까운 말이지만, 그의 씨앗은 썩 좋은 종자가 못 된 듯 싶다.


"결혼이라... 틀림없느냐?"
"예. 제 형님과 결혼해주시는 것이 제가 바라는 전부입니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요구에 나도 모르게 침대보를 꽉 붙들었다.
머릿속에서야 할 말 못할 말이 우후죽순 샘솟았으나, 용으로서의 본성이 체면을 놓는 것을 허락치 않았다. 허나 눈썹을 찡그리는 것만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내 심기가 불편해진 것을 확인한 소년이 유들유들한 태도로 나를 달랬다.


"물론 시조룡께 다소 탐탁찮을 요구임은 압니다. 허나 사정을 들어보시면 시조룡께서도 이해하실 겁니다."


아닌데? 무슨 사정이 있든 간에 전혀 이해 못하겠는데?
내가 진또배기 용의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면 하찮은 것이 감히 용을 능멸하려 든다며 불을 뿜어 잿더미로 만들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물론 지금은 신체구조상 불은 못 뿜지만.


대신 뿔로 찌를 순 있다.
소년의 옷차림은 썩 두터워보이지 않는 예복이니 고개를 숙여 쿡 찌르면 푹 하고 들어갈 게 분명하다. 예의를 차리기 위함인지 소년의 허리춤엔 검 같은 것도 없었으니 무방비 그 자체. 용의 육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나약한 신체로도 어느 정도는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친우의 후손의 배때지에 구멍을 뚫어줄지 말지 고민하느라 생긴 침묵을 암묵적 긍정으로 해석했는지 소년이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손을 내밀었다.


"긴 이야기가 될 테니 우선은 자리를 옮기시는 게 어떻습니까? 황궁으로 모시겠습니다."
"아니, 나는...."


짝짝.
소년이 손뼉을 치자, 침실의 문이 열리며 여럿의 발소리가 울렸다.


숫자가 열은 넘을 병사들이 차례로 들어오며 침실의 공간을 메워갔다.
하나같이 번쩍거리는 무구를 걸친 것이며 절도 있는 움직임까지 예사롭지 않았다. 나도 나름 전쟁을 두 눈으로 직접 본 터라 아는데, 저 정도면 일국의 정예병은 되는 수준이다.
몰려든 병사들로 인해 내가 점유한 공간은 엉덩이를 걸친 침대의 크기만큼 쪼그라들었다. 투구 속의 형형한 눈빛을 마주하며 나는 애써 태연한 척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무례하구나."
"죄송합니다. 당신을 안전히 황궁으로 모시기 위함이니 부디 양해해주시길."


이거 협박하는 거냐고 곧이곧대로 내뱉지 않은 건 일말의 자존심 탓이다.
소년은 깊숙이 고개를 숙였으나 그 동작이 하나의 연극처럼 느껴졌다. 실제로도 그럴 것이다. 가느다랗게 뜨여져 나를 가늠하던 눈이 이내 슬며시 휘어졌으니. 되게 얄미운 표정이었다.
지금 눈으로 비웃은 거냐? 나한테 이래도 될 거 같다 이거지?


"페리스의 후손. 네 이름이 뭐지?"
"아르헨입니다."
"기억하마."


친구 후손이고 뭐고, 넌 나중에 꼭 배때지에 구멍 뚫어준다. 내가 날개도 없고 비늘도 없지만 뿔은 있다 이거야.
꽉 쥐고 있던 침대보를 놓고는 카펫 깔린 바닥을 딛고 섰다. 보들보들한 감촉이 약간의 위안을 줌과 동시에 한 가지 사실을 상기시켰다.


여긴 침실이고, 나는 자다 깬 직후라는 걸.
당연히 나는 잠옷 차림이었다. 그것도 언뜻 빛이 비추면 안쪽의 윤곽도 비칠 만큼 꽤 통기성이 좋은 재질의.


"...나가라. 전부!"
"시조룡이시여, 이러시면 저희도 곤란합니다. 기껏...."


뻔한 말을 늘어놓으려는 아르헨을 노려보았다.
보란 듯 양 팔을 살짝 들어올렸으나, 그는 아직도 잘못된 점을 깨닫지 못한 성 싶었다.


"날 이대로 데려갈 셈이냐?"
"예?"


눈치 빠른 병사 하나가 급히 아르헨에게로 다가가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제야 아르헨은 당황하며 허둥지둥 병사들에게 손짓했다. 기껏 들어온 병사들은 곧바로 침실 밖으로 나가게 되었고, 그 끄트머리에 달라붙은 아르헨은 아까와는 달리 진심어린 동작으로 고개를 숙였다.


"제가 부족하여 무례를 범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됐으니 빨리 나가거라."


끼이익- 쿵.
침실의 문이 닫히자마자 나는 옷장을 열어재꼈다.


"...옷뿐인가."


옷장에 옷이 있지 뭐가 있겠느냐마는.
그래도 혹시 이 불편한 상황을 타계할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기대한 내가 바보지.


"오랜만... 이겠군. 체감은 되지 않지만."


안쪽에는 내가 즐겨 입던 평상복이 있었다. 봉인이랍시고 감금했으면서 이런 건 또 챙겨줬네.
흔히 용들의 취향이라는 보석 주렁주렁 달린 화려한 복장과는 정반대의, 단촐하면서도 활동성을 중시한 넉넉한 셔츠와 가죽 바지 한 벌. 그리고 자주 신던 부츠까지. 복장이 편해야 몸도 마음도 편하다는 신조에 따라 온갖 편의성 마법을 덕지덕지 발라둔, 300년 전엔 세력 깨나 떨친다는 군주들도 구하기 어려울 유니크한 옷들이다.
생각해보니 내 재산 중 이것들도 있었네. 그냥 이거 줄 테니 먹고 떨어지라고 할 걸 그랬다. 어차피 사이즈도 자동 조절되는 물건들인데.


스륵스륵.
특제 평상복 세트는 300년이란 세월이 무색하게도 위화감 하나 없이 내 몸을 감쌌다. 기왕이면 편의성 마법 말고도 근력을 강화해주거나 신발 밑창에서 불이 뿜어져 나오는 기능도 추가해둘 걸... 언제나 후회는 늦는 법이다.
침실의 문 손잡이를 잡고 머뭇거렸다.


'아, 그냥 여기 있으면 안 되나.'


아쉽게도 이 침실의 출입구는 단 하나 뿐.
심지어 한 번 봉인이 깨진 이상 잠금장치조차 없는 침실 문은 장애물조차도 되지 못한다. 자존심과 체면 다 깎아가며 병사들한테 끌려가느니 그냥 시조룡이랍시고 당당하게 내 발로 가는 게 더 나을 것이다.


문득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감옥이나 마찬가지라지만 이 침실은 최고급이란 말이 아깝지 않을 품질을 자랑한다. 봉인이 풀려 지난 300년처럼 완벽히 보존될 수야 없겠지만, 뭇 귀족들이나 누릴 법한 호화스런 물건들을 그냥 두고 가는 건 낭비였다. 적어도 입고 있는 단벌 옷 빼면 땡전 한 푼 없는 내겐 그랬다.


'...조금 챙겨갈까?'


일단 내가 벗어던진 잠옷부터 곱게 개었다... 가 모양새가 안 나와서 그냥 반으로 접어 돌돌 말았다.
그 외에도 가져갈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둘러보았다. 침대나 옷장이야 내가 챙겨갈 수 없는 가구들이고, 바닥에 깔린 카펫이나 실크 이불은 은근히 무겁고 부피 때문에 걸리적거린다. 그나마 이 한 몸으로 챙길 수 있는 거라곤 베개 정도.


그리하여 마침내 나는 침실 밖으로 나섰다.
한쪽 팔로는 푹신한 거위털 베개를 껴안고, 다른 손에는 돌돌 만 실크 잠옷을 쥔 채로.


"시조룡이시여? 그것들은...."
"내 것이다. 탐낼 생각 말도록."


미묘한 온도의 시선들이 꽂혔다. 특히 아르헨의 시선이 따가웠으나, 나는 당당했다.
뭐. 어쩌라고. 지금 나한테 있는 게 이것뿐인데 챙길 건 챙겨야지. 물론 결혼하자 소리를 취소한다면 당장 내줄 의향은 있다.


"후후, 안내하겠습니다."


감히 나즈막히 코웃음을 치며, 아르헨은 손짓으로 횃불 든 병사들을 부려 앞장서게 했다.
내가 봉인된 장소는 숲과 절벽이 마주한 곳에 생긴 동굴이었다. 다행히 마법으로 위장되었을 뿐 별로 깊진 않아서 나가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조금 걷는 것임에도 미미하게나마 다리에 피로가 쌓이는 감각이 너무나 오랜만이라 조금 낯설었다.


"......."


나도 모르게 아르헨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만약 페리스가 이곳에 있었다면 업어달라고 했겠지. 안 업어주면 안 움직일 거라고 장난스레 땡깡도 부려봤을 거고. 페리스는 용이 뭐 이러냐며 틱틱대면서도 업어줬을 것이다. 애초에 용의 육신을 지니고 있었더라면 지치지조차 않았을 테지만.
당연히도 저 페리스를 똑 닮았으면서도 음흉한 구석이 있는 후손 녀석에게는 그럴 수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다. 만약 내가 저 후손 녀석에게 업어달라고 한다면 그건 뒤통수에 뿔로 구멍을 뚫기 위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왜 그리 보십니까?"
"뒤통수가 참으로 어여쁘구나. 한 대 후려쳐도 되겠느냐?"
"...이것 참, 저도 시조룡께 적잖이 미움을 산 모양이군요."


곤란하다는 듯 미소지으면서도 아르헨은 은연중 만족스러운 기색이었다.
명색이 시조룡이라면서 아무것도 못 하고 베개랑 잠옷이나 꼭 껴안고 있는 내 모습이 만만해서 그렇겠지. 무슨 생각으로 형과 결혼해달라고 한 건지 몰라도, 분명 나로선 그 뜻을 방해하기 어려울 것이라 확신하고 있겠고.
숫제 다 큰 어른이 어린애의 재롱을 마주한 듯 낮잡아보는 눈빛에 속에서 열불이 치솟았다.


이걸 그냥 콱. 업어달라고 해버려? 
뒤통수에 구멍이 뚫리고도 그렇게 만만하게 여길 수 있는지 볼까? 앙?


당연하지만, 진짜로 하진 않았다.
나는 이성적이라 오만하고 불같은 용의 성질머리도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는 까닭이다. 결코 막상 업으라는 말을 하려니 낯부끄러운 나머지 입술이 안 떼어져서 못한 게 아니다.


"도착했습니다, 시조룡이시여. 이후론 마차로 편히 모시겠습니다."


무척이나 화려한 마차였다.
붉은 원색으로 도배되어 어디에서나 눈에 확 들어올 것 같은 색감. 겉으로 드러난 골조는 금박이 칠해져 있었고 물결을 표현한 듯한 장식들이 모서리에 마감되어 있었다. 하다못해 바퀴 또한 타이어처럼 무언가 채워넣은 가죽으로 덧댄 상태였다.
무엇보다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것은 마차의 사면에 도배된 문장. 반쪽은 검은 배경에 새하얀 용이 그려져 있고, 나머지 반쪽은 새빨간 배경에 금빛 왕관이 그려져 있었다.


"아르헨. 저건 페리스의 문장이 아니다만."
"걱정마시지요. 300년 전과 다를지 모르겠으나, 틀림없는 제국 황실의 문장입니다."


뭔가 찝찝했지만 그 이상 말을 꺼내긴 어려웠다.
페리스가 세력의 상징으로 내걸은 문장은 용도 왕관도 아닌 한 송이의 장미였다. 하얀 배경에 그려진 만개한 붉은 장미 꽃봉오리.


"...."


설마하니 제국이고 페리스의 후손이고 죄다 거짓부렁이 아닐까 하는 가정을 해보았으나... 그건 아닐 터였다.
애초에 페리스의 피가 섞이지 않았다면 봉인을 깰 수 없었을 테니까. 그것이 대륙 초대 황제와 용들 사이에 맺어진 계약이고 내기였으므로.


"믿겠다. 페리스의 후손."
"영광입니다. 시조룡이시여."


마차의 입구 곁에서 에스코트하려는 아르헨의 손을 무시하고는 마차에 올랐다.
아르헨은 싱글싱글 웃으며 손을 거둘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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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나는 가벼운 분위기를 좋아했는데...쓰읍.

천성이 어두워서 그런가 봐요! 그래도 재밌게 봐주세요!

다음 편은 언제 올라올지 모르니까! 부탁드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