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야 정이진. 너 나 누군지 기억 안 나?"

 "안 나. 안 난다고. 그러니 조용히 좀 해."


 감정이 순간 격해져 나도 모르게 자제 없이 말이 튀어나온다.

 아차 싶었지만 말은 이미 튀어나간 후였다.

 분명 이상한 점을 느꼈을 터.


 그러나 남자의 행동은 예상과는 달리, 병실을 나가 모습을 감추는 것이었다.

 앵앵대서 짜증나던 차에 잘 된건가.

 다만 순간적으로 올라오는 감정을 참았어야 한다며 스스로 반성하며, 감정을 가라 앉히고서 다시 몸을 일으켠다.

 거울을 다시 보기 위해서.


 그리고 화장실에 들어서니 거울 속의 그녀가 나를 다시 마주한다.

 어째서 저 속에 보이는 게 내가 아닌, 처음보는 여자인 걸까.

 내가 손을 움직이면 거울 속의 그녀도 똑같이 손을 움직이고, 머리칼을 만지면 그녀도 똑같이 머리칼을 만진다.


 그러다 문득, 머릿속에 여왕이 했던 말이 잠시 스쳐지나갔다.

 자신을 재밌게 해 줄 수 있을 것 같다는 말.


 '설마......'


 과거의 내가 에고를 가진 기사였고, 마지막엔 여왕을 만나 죽음을 맞이했단 사실을 떠올리고선 기사의 상장인 에고를 잠시 끌어올린다.

 혹시 각성조차 못한 게 아닌가 싶어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러진 않은 모양이었다.

 에고를 각성한 자만이 기사가 될 수 있고, 여왕에게 다시 다가갈 수 있다는 결론이 나왔으니까.


 다만 다시 확인할 수 있던 사실은, 내 안에 내재된 에고는 미약하기 그지 없다는 것

 이성과는 별개로 그로 인해 내게  다시 가해진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덕분에 밤 내내 잠에 들 수 없어 멍하니 침대 위에 앉아 있어야만 했다.


 * 


 - 아무래도 기억 상실인 것 같습니다.

 - 그, 근데 저희 이진이가 보이던 모습관 많이 다른데 기억상실로 이렇게 될 수 있는 건가요?

 - 불가능한 이야긴 아닙니다. 사람의 인격을 이루는 부분 중 기억이 사라졌으니, 반응하는 것도 충분히 달라질 수 있긴 합니다.

 - 아이고 이진아, 어째서 네게 이런 일이.......


 자력으로 깨어난 다음 날.

 밤새 내내 멍하니 앉아있으니, 지금 이 몸의 엄마로 보이는 사람과 함께 진료실에서 들은 말이었다.


 그 다음에 뭐라 했더라......

 사실 저 말 말고 다른 것도 뭐라뭐라 한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여왕을 만나 죽기 전까지의 기억을 되짚느라, 굳이 쓸데없는 일에 에너지를 낭비하기 싫었으니까.

 요컨데 제대로 듣지도 않고 한 귀로 흘렸다는 말이다.

 

 "아이고 이진아, 어떻게 이런 일이....."


 다시 돌아온 병실.

 엄마인 줄 알았던내 손을 잡으며 날 걱정하는 말을 하는 그녀는 사실은 고모란다.

 그리고 고모와 같이 있던, 어제 술냄새를 살짝 풍기며 병실에 들어 온 남자의 이름은 고모라는 여자의 아들 양태식이었고.


 "아, 엄마. 얘 죽은 것도 아닌데 뭘 그래."

 "너는 니 사촌이 기억을 잃었다는데, 걱정되지도 않니?"

 "걱정은 무슨. 뒤질뻔한 거 살려놨으니 됐잖아. 뭐 기억상실인지 뭔지 그거 요즘엔 약 먹으면 되돌릴 수 있다며."

 "그럼 넌 지금 네 사촌이 걱정도 안 된다는거야?"

 "아, 뭐래. 언제는 저 년 걱정한 것 마냥 떠들고 있네. 아 됐고, 어쨌든 깨어난 거 확인시켰으니 난 간다."

 "양태식! 너 어디가?"


 조용히 병실 침대위에 앉아 멍하니 이불을 쳐다보고 있으니, 둘의 다투는 소리가 머리를 울린다.

 다만 둘에게 조용하란 말을 꺼내진 않았다.

 힘을 잃었다는 사실에 대한 공허함.

 정이수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깨어났다는 것에 대한 충격이 섞여, 도저히 무어라 말을 할 수 없는 상태에 가까웠지만.


 그리고 깨어난 이후 취했던 지금의 모든 행동들은 의사의 오해를 사기 딱 좋은 행동들이기도 했다.

 양태식이 말한 정이진이 우릴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에, 고모라는 여자는 곧장 의사를 불렀고.

 멋대로 지금의 날 진찰한 의사가 한 말을 철석같이 믿은 탓에, 곧장 이런 걱정을 받고 있을 정도니까


 하긴.

 두 눈으로 내가 다른 몸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확인한 나 조차 지금 상황이 믿기지 않는데, 저 두 사람은 오죽할까.


 "그래서 이진아. 정말 고모가 기억나지 않는거니?"


 둘의 대화가 끝난 모양이었다.

 옆에서 들려 온 나이 든 여성의 목소리에 시선을 돌리니, 그녀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나를 보는 중이었다.

 신경 쓸 일이 하나 늘었다는 사실에 속으로 작게 탄식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괜찮아. 다시 집에 돌아가 지내다보면 금방 기억날거야."


 왜냐면 그녀의 눈은, 날 걱정하는 게 아닌 약간은 아깝다는 눈빛을 띄고 있었으니까.

 진심으로 걱정하는 자의 눈빛은 저렇지 않으니 말이다.


 약간은 흥미가 생기는 부분이었다.

 언뜻 듣기로 나와 앙태식이 병실을 나서고 고모라는 여자와 의사가 병실에 둘이 남았을 때, 자살 어쩌고 내용이 희미하게 들렸으니까.

 물론 그 부분을 제외한 나머진 듣지 못했기에, 사실 파악엔 정보가 더 필요하겠지만.


 - 환자 정이진 , 식사가 도착했습니다. 오늘의 식사는 소화기관의 운동 적응을 도울 수 있는 가벼운 저염 야채죽입니다.


 벌써 점심시간이 된 걸까.

 누구것인지 모를, 일단 어쩌다 차지하게 됐고 언젠간 다시 돌려줘야 할 지도 모를 신체를 유지하려면 먹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하지만 식사라며 올라온 희멀건 죽을 난 도저히 넘길 수 없었다.


 생각 할 거리가 너무 많아서였다.

 절반은 지금의 난 대체 어떻게 된 건지.

 그리고 나머진 이 정이진이란 여자 자체에 대해서였다.


 뭐라도, 휴대폰 같은 거라도 있으면 좀 더 볼 수 있는게 많을텐데.


 "고모,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요"

 "그래, 이진아."

 "제 폰, 제 휴대폰 좀 가져다 줄 수 있으세요?"

 "폰 말하는 거니?"

 "네. 그게 있으면 제가 기억을 되찾는데 도움 될 거 같아서요."


 기억 속에서 여자 동료를 사적으로 만났던 순간을 떠올리며 말을 잇는다.

 원래 말하던대로 말하면 반감을 사거나, 혹은 의심을 살 지도 모르니까.


 "아, 그게 이진이 네 폰은......."


 하지만 그녀의 반응이 어딘지 모르게 떨떠름하다.

 ......역시 일반적인 가족은 아니다.

 기억을 찾는데 도움이 된다면 얼른 가져다줘도 모자랄판에 머뭇거리는 모습이 내게 확신을 준다.


 "빨리 가져다 줄 테니 좀만 기다려 줄 수 있겠니? 내일이나 되어야 줄 수 있을 거 같아."

 "......그래요. 그럼 부탁드릴게요."


 무언가 수작질을 부릴 셈인게 분명했다.

 그렇다한들, 하루정돈 기다려겠지.

 빨리 갖다달라고 재촉하면 거부감을 살 수 있으니까.


 "그래도 다행이다. 기억만 사라져서......"

 "아니에요."

 

 다만 가식 가득한 그 말에 존대어를 써가며 이야기 하는 건, 참으로 거북한 일이었다.


 "아. 이진아, 고모는 할 일이 있어서 좀 가봐야겠구나. 혼자 있어도 괜찮지?"

 "네. 전 상관 없어요."

 "그래. 그럼 또 보자꾸나."


 내게 할 일이 끝났는지, 그녀가 병실 바깥으로 모습을 감춘다.

 다행이었다.

 같이 더 있다간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는데, 알아서 꺼져줬으니까.


 덕분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생겨, 찬찬히 생각을 다시금 정리한다.

 일어난 지 48시간 까진 아니어도 이틀차인 걸 보면 원래의 정이진은 지금 없는 게 맞는 듯 하니 결국엔 내가 살아나가야 하는 게 맞으니 말이다.


 일단 이 정이진이란 인간이 누군지부터 알아내는 게 먼저일 터.

 자리에서 일어나 참대 앞에 걸린 환자 명표를 본다.

 성별 옆에 적힌 F라는 글자가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일단은 누군지 알아야 하니까.


 '정이진, 나이는 열아홉, 입원 날짜가......'


 다만 이상한 점이 한 가지 있다.

 내가 깨어난 건 어제.

 기사 정이수로 죽은 시점 이후로 깨어나기까진 최소 십년 이상.

 하지만 입원 날짜는 거진 한 달 전이다.


 설마 그 큰일 어쩌고 했던 게 한 달전 일이었던 걸까.

 은폐장 발생기라도 있었으면 병원 차트를 몰래 뒤져보기라도 했을 텐데, 아무것도 없으니 그저 답답한 마음이 든다.

 간호사에게 물어보면 알려 줄런지.


 '안 해보는 것 보다야 낫겠지.'


 조심히 병실 문 스위치에 손바닥을 가져가니 스륵하고 병실의 문이 열린다.

 밖으로 나오니 어딘지 모르게 사람이 없어 휑한 병실 복도가 눈에 들어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스테이션 쪽으로 걸어간다.

 가까워지니 하하호호하고 웃는, 양태식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와 놈이 있음을 내게 알린다.


 "그래서 제가 보자마자 놀래가지고 바로 병원까지 업고 온 거 아니겠어요. 진짜 큰일 나는 줄 알았어요. 힘든 일이 있으면 말이라도 해주지......"

 "아, 그래도 기억에만 문제 있지 다행히 환자분 신체에는 문제가 없다고......"

 "그러면 뭐해요. 에고 각성자라잖아요. 차라리 몸에 문제라도 있었으면 기사로 안 끌려가고 다시 기억 찾아서 살면 되는건데."

 "양태식."


 아주 놀판나셨네.

 간호사와 즐거운 수다를 떠는 놈의 이름을 부르니 대화가 뚝 끊기고, 세 사람의 시선이 내게 돌아온다.


 "아, 이진아. 나와도 괜찮아? 어디 아픈 덴 없어?"

 "내 몸 상태엔 신경 쓸 것 없어."

 "아, 그, 그래?"

 "환자분, 아직 안정 취하셔야 하는데......"


 간호사에게 시선을 스윽 던진다.

 그러자 간호사는 움찔하면서도, "무리하시면 쓰러지실수도 있으니까 조심하셔야 해요."라 말하고 어디론가로 도망치듯 몸을 감춘다.

 양태식은 그녀들에게 죄송하다는 인사를 건넨 다음, 웃으며 내게 말을 걸려했다.


 "묻고싶은 게 있으니 병실로 와."


 놈의 입에서 말이 나오기 전 내가 말을 막았지만.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려 다시금 병실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