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스포츠 덕질만 하다가 20대를 다 날려버린 신겨울.


현실에서 겨울은 알바나 하면서 불량 일자리를 전전하는 신세지만, 이 판에서는 나름 재야의 고수로 유명한 사람이야.


게임 초창기부터 플레이한 고인물에다, 게임 내의 티어도 높고, 가끔 프로들이 뭐 물어보러 올 정도로의 전문성도 있지.


커뮤니티 네임드이고, 방송은 예전에 했지만 잘 안 되어서 접은 상태.


그러다 대충 적당한 시점의 과거로 회귀.


그냥 회귀하면 재미 없으니까, 귀여운 여자가 된 걸로하자.


"어, 엄마... 응 그렇지. 내가 처음부터 딸이었지. 응, 응. 아들 얘기는 그냥 농담해 본 거야. 그래, 끊어."


처음부터 겨울이 여자였던 시간선이라, 신분 문제도 없어.


다른 몸, 두번째 기회.


겨울은 어떻게 살아야하나 고민하다가, 스스로가 좋아하던 e스포츠를 직업으로 삼기로 결심해.


주식이나 코인, 국제 정세 같은 건 관심이 없어서 잘 모르지만, e스포츠 판의 역사나 미래의 지식은 해박하게 알고 있으니까. 그걸 치트로 사용하기 위해서 말이지.


하지만 사회에서는 젊어도 e스포츠 선수가 되기에는 많은 나이인데다가, 과거 아마추어 대회에 나갔다가 쫄보 기질로 경기를 말아먹었던 경험 때문에, 선수보다는 프로 팀의 코치나 감독이 되는 게 낫다고 생각해.


냅다 프로 팀에 연락해도 코치진을 시켜줄 리는 없으니, 겨울은 어그로를 끄는 방법을 선택하지.


커뮤니티에 경기의 세트 스코어나 밴픽 예언글을 쓴다든가, 경기에서 사용된 전략전술을 자세하게 분석한 영상을 업로드하는 식으로 말이야.


미래 지식으로 경기의 정보를 대부분 알고 있는 데다, 지금 시점의 전략 전술들은 겨울의 눈에는 단순하고 조잡해서, 어려운 일도 아니었지.


겨울은 틈틈히 게임하면서 높은 티어를 달성하는 것도 잊지 않았어. 랭킹에 이름을 올리지는 않았지만, 가끔 프로들이랑 만날 수 있을 정도로.


[안녕하세요 겨울이는불리하면던져님. 프로 제의를 드리러 연락을 드렸습니다. 혹시...]


겨울은 계속해서 스스로의 평판을 끌어올리고, 마침내 리그 내의 중위권 팀에서 스카웃을 받는 데에 성공해.


겨울은 선수보다는 코치로 합류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하고, 곧 구단 측과 만남 일정을 잡지.


"그러니까... 오늘 면접보러 오시는 겨울이는불리하면던져가 본인이라고요?" 


"그렇다니까요. 그리고 닉네임으로 부르지 마세요."


물론 면접장에 전혀 예쁜 여자가 나와서 작은 소란이 일어나지만, 문제 없이 계약을 맺는 데에 성공하지. 겨울의 실력은 진짜였으니까.


'개인 방송 캠으로 봤던 것보다 연습실이 좁네. 아는 얼굴들이 많다. 지금 2군인 이 사람은 나중에 세계 대회를 우승하고, 이 사람은 잘 안 풀렸고, 이 선수도 나름 세계 최고 칭호를 들었는데, 나중에는 커리어가 망가졌었지...'


처음으로 경험하는 프로 팀과, 영상으로만 보던 선수들을 실제로 본다는 신기함. 겨울은 그 틈에서 천천히 적응해나가며, 스스로의 능력을 증명하는 데에 성공해.


"아, 겨울 코치님. 이건 왜 이런 거에요?"


"그건 이득과 손해를 잘 계산해야 하는 부분인데, 잘 보면 여기의 동선이..."


겨울이 미래의 전술적 개념들에 능통하다보니, 선수들에게 있어서 겨울의 피드백은 현자의 가르침이나 마찬가지였어.


"야, 이게 진짜 되네! 쟤네가 코치님이 말해준 그대로 하잖아! 바로 달려! 게임 바로 끝내!"


미래의 지식을 사용해서, 상대 팀의 전략이나 노림수의 파훼법들을 미리 알려주는 것은 덤이었고.


"신코치 축하해. 이제부터는 1군으로 올라와. 수석 코치 자리도 고려하고 있어."


시즌이 지나며 2군 코치에서 1군 수석 코치로.


"그래서 신코치가 감독 대행을 맡아줬으면 해. 우리 선수들이 신코치를 많이 믿고 따르잖아."


감독이 불미스러운 일을 일으키며 시즌 중 경질되는 행운까지 겹쳐서, 이른 나이에 감독 대행이라는 기회까지 얻게 돼.


겨울은 압도적인 지휘력을 발휘하여 팀을 준결승까지 올려놓고, 세계 대회에서도 4강이라는 좋은 결과를 내지.


[시즌 중 감독이 경질되는 악재까지 있었는데요, 보십시오! 그 누가 이 팀의 약진을 예상했겠습니까?]


모두가 신겨울의 능력의 찬사를 보냈지만, 정작 겨울 스스로는 만족하지 못 하고 있었어. 세계대회 우승을 못 해서였지. 겨울은 미래 지식이라는 치트가 있으니 세계대회 우승까지 노려볼만 하다고 생각했거든.


그렇지만 팀의 한계가 있었지.


'선수 차이가 나. 좋은 선수들이기는 하지만, 세계 최고는 아니야. 내가 아무리 완벽한 계획을 짜도 선수들이 구현하지 못 하면 의미가 없어.'


선수 문제만 있는 것도 아니었어. 신겨울이 미래의 전략 전술을 마구 방출한 탓에, 원래 역사보다 훨씬 전술 개념의 발전 속도가 빨라졌거든. 전술적인 개념들이 빠르게 발전하며 다른 팀의 감독 코치들의 수준이 겨울의 뒤를 바짝 추격하고 있었지.


'이 경기가 원래 이랬던가? 경기 양상이 전혀 다른데?'


겨울이 워낙 원래 역사와 다른 행동들을 하다보니 슬슬 인과율이 뒤틀리며, 미래의 지식과 다른 일들이 생기는 것은 덤이었고. 미래 지식을 치트키로 쓰던 겨울에게는 아주 나쁜 소식이었어.


그래도 아직 겨울에게는 꺼낼 수 있는 카드가 남아있었지. 선수 이적시장.


스포츠에서 유망주나 노장은 터지면 대박이지만 망하면 돈이 증발하는 위험 자산이야. 괜히 종목을 가리지 않고 나이가 적당하고 기량 좋은 선수들의 가치가 높은 게 아니지.


'이 유망주는 1년만 더 키우면 바로 주전급이고... 얜 폭탄이니까 절대 안 돼. 이 사람은 나이가 많아도 폼이 안 떨어지니까 괜찮고.'


하지만 미래를 알고 있는 겨울은 전망이 좋거나 성장 가능성이 높은 선수들만 쏙쏙 빼올 수 있었지.


팀은 압도적인 기량으로 리그를 우승하는 데에 성공하고, 겨울은 진지하게 세계대회 우승을 노려.


[아아... 여기서 무너지나요. 하지만 정말 잘 싸웠습니다.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그러나 또다시 준결승에서 무너지는 팀. 겨울은 조바심을 느끼기 시작해.


[솔직히 신겨울 감독 전술 천재 얘기도 옛날 얘기지. 요즘에는 다 그 정도 한다.]


다른 팀 감독 코치들의 발전속도는 압도적이었어. 여전히 겨울이 앞서있기는 하지만, 전술 수준이 엇비슷해져서 이제 겨울은 다른 팀들의 수를 쉽게 읽을 수 없게 되었고, 겨울이 수싸움에서 밀리는 경우까지 생겨.


[신겨울 요새 경기결과 잘 못 맞추네. 예전에 커뮤니티 유저 시절에는 진짜 무당 수준이었는데.]


그리고 겨울이 인과율을 잔뜩 헤집어놓은 탓에, 원래 역사와는 다른 일들도 더 높은 빈도로 일어나지. 더 이상 미래 기억에 의존할 수 없게 된 거야.


연패. 라이벌 전의 패배. 압도적인 우승 팀에서, 적당한 상위권 팀으로.


신기하게도 이적 시장에서 좋은 선수들만 싼 가격에 쏙쏙 사가서 시즌 초에는 선수 힘으로 찍어 누르지만, 결국 시즌이 끝날 때 쯤이 되면 뒷심이 떨어져 알아서 무너지는 팀으로.


'미래의 지식도 불확실하고, 이젠 내가 전술적으로 확실히 뛰어나지도 않아. 그럼 나는... 뭐지? 미래의 어드벤티지가 없으면, 내가 특별할 이유가 뭐야...'


스스로의 밑천이 들어났다는 생각. 겨울은 회귀하기 전, 방구석 백수로 돌아간 기분이었어. 아무것도 아닌,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된 듯한 느낌. 마치 예전처럼.


"그, 이런 말 하기 좀 그런데, 감독님 조금 바뀐 거 같지 않아?"


"그렇기는 해. 예전에는 졌어도 못 한 거 잘 한 거 딱딱 짚어주는 스타일이었는데, 요즘에는 조금 선수 탓도 하는 거 같고... 자기가 실수한 건 감추려고 하고. 엄청 예민해진 거 같아."  


겨울은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리고, 방어기제가 발동해. 흔들리는 겨울의 모습을 본 선수들에게도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지.


몇 개의 시즌을 더 보내지만, 멘탈이 박살난 겨울 아래서 서서히 팀의 성적은 내려갔어.


겨울에게 혹평이 쏟아지고, 이번에도 정말 증명하지 못 하면 감독으로의 계약이 종료될 거라는 말이 나오는 시즌.


예전에 겨울의 팀에 함께했던 몇 선수들이 팀에 돌아오며 시즌 초반의 성적은 좋았지만, 결국 팀은 순위를 유지하지 못 하고 떨어졌어.


마지막에 행운이 따르는 기적적인 승리들을 따내서 아슬아슬하게 세계 대회 진출권은 얻었지만, 팀 내부의 분위기는 말이 아니었지.


무너지는 겨울과, 불만이 쌓인 선수들. 결국 어느날 터져버린 감정.


"감독님 변했어요. 알아요? 내가 왜 연봉까지 깎으면서 이 팀으로 돌아왔는지 알기나 해요!"


변해버린 겨울의 모습에 대한 실망.


"그래, 그게 그렇게 불만이면 나가! 왜, 팀이 리그 준결승도 못 가는 게 다 감독인 내 탓 같아? 잘 나가라! 내가 봤을 때, 질 때마다 패배에 대한 네 기여분이 이 팀에서 가장 크니까!"


꾸준히 자책하던 무능력에 대한 역린이 건드려져, 방출되는 겨울의 방어기제.


그렇게 선수들과 대판 싸운 겨울은 그 자리에서 견디지 못 하고 도망쳐 나오게 돼. 겨울은 노을녁의 집에서 홀로 맥주를 마시며 뒤틀려가는 심장을 달래지.


'아, 진짜 다 망쳤네. 나 경질되겠지.'


선수와 불화를 일으키다 방출된 감독. 다른 팀에서 찾아주기는 할지, 언젠가 스스로를 싫어하는 선수들을 마주치면 어떻게 해야 할지, 겨울은 가능한 최악의 가능성들을 상상하며 우울함의 늪에 빠져들어.


그러나 딩동 하고 울리는 초인종소리.


"혼자 궁상떨고 있었어요? 맥주는 잘 됐네. 치킨 사왔으니까."


선수들이 집으로 찾아온 거였어.


겨울은 한 대 맞기라도 하면 어떡할지 걱정했지만, 생각보다 분위기는 부드러웠어.


닭다리를 뜯던 겨울은, 눈치를 보다가 살며시 사과했어. 의연한척 하려고 했지만, 눈물이 고이는 건 어쩔 수가 없었지.


"미안해."


"뭐가요."


"네 커리어에서 1년 낭비하게 만들어서. 그리고... 그동안 너네 탓하면서 막말해서. 미안해..."


선수가 손을 들어올리고, 겨울은 무의식중에 눈을 질끈 감아. 하지만 부드러운 손길이 겨울의 머리를 쓰다듬지.


"그거 대부분은 게임 얘기였잖아요. 좀 수위가 높고 가끔 비겁하게 책임전가 하기는 했어도, 프로가 그런 거에 신경쓰면 안 되지. 제가 감독님한테 실망한 건, 저를 고작 계산적인 놈으로 봐서 그랬어요."  


"...뭐를."


"감독님의 피드백도 좋고, 판짜기도 좋지만, 제가 감독님이 좋았던 건 감독님 그 자체였단 말이에요. 이 팀. 감독님. 코치님들. 다른 선수들. 그 예전의 모든 추억들. 그게 좋아서, 그거 다시 보려고 연봉까지 깎으면서 이 팀으로 돌아왔는데, 요새 감독님 좀 못 나간다고 제가 이적 요청이라도 할 거 같아요? 감독님이 저를 무슨 계산적인 놈 취급하잖아요. 그냥 <요즘 좀 안 된다> 한 마디였으면 다 이해할 수 있었는데."


겨울은 선수들이 스스로를 따르는 이유가 미래 지식을 이용한 압도적인 실력 따위가 아니라, 스스로 그 자체였다는 걸 깨달아. 혹시나 더 추락하더라도, 선수들은 계속 스스로를, 감독이 아니라 인간 신겨울을 계속 봐줄거라는 믿음을 가지게 된 거지.


"그날..."


"그 때 진짜..."


"그 일은..."


선수들과 겨울은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과, 불만들을 전부 털어놓고, 서로를 이해하게 돼. 서로의 사이는 더 없이 끈끈해졌지.


슬슬 취기가 오른 선수들과 겨울은, 예전처럼 돌아가 농담을 주고받아.


"너...는 이번 시즌만 끝나면 방출이야. 감히 감독 머리에 손을 올려?"


"크흐흐, 그럼 세계 대회 우승해야겠네요. 이적시장에서 몸값이라도 올리게."


"우승은 솔직히 무리고, 4강까지만 가자. 거기까지는 어떻게든 내가 해 볼 수 있을 거 같아."


"우리 감독님 쫄보 다 되셨네. 예전에는 무조건 우승이라던 사람이."


"너 시즌 중 방출."


"저 없으면 대체 선수 없는 거 다 알거든요. 감독님 전술 제가 가장 잘 이해하는 거 알면서."


그렇게 겨울이 이끄는 팀은 세계 대회에 출전하고.


[아, 별로 대진이 좋지 못 하군요. 아쉽습니다.]


한국 리그의 세계 대회 마지막 진출 팀으로서, 본선 최약체로 평가받지만.


[하하하, 한 건 해내는군요! <나 그래도 리그 우승 경험도 있는 팀이야!>라고 외치는 듯 합니다!]


뜻 밖의 전개로 결승에 나가더니.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정말 이전 대회 챔피언을 꺾고, 우승을 차지하는 이변을 일으킵니다!]


기적적으로 세계대회를 우승해서 감동적인 서사를 완성하는.


"감독님! 저희 진짜 우승했어요! 감독님!"


"고마워...! 너무 고마워...!"


"감독님 울어요? 감독님 우승해도 카메라 앞에서 안 울 거라면서요!"


"이씨! 너네들 진짜...!"


"감독님 여기 가운데로 오세요! 빨리요!"


그런 e스포츠 감독 틋녀를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