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하늘 두루 퍼진 구름의 꼬리를 잡아 이리저리 흩어내었다. 

구름은 물에 불린 솜처럼 찢겨나갔다. 논밭에 그 뿌리가 파묻힌 허수아비들이 쓰던 모자는 날아간 지 오래였고, 그 두 팔은 광인처럼 춤추었다. 오로지 날벌레 한 마리만이 세포와 조직과 기관의 힘으로 태연하게 목표한 곳을 향해 날아갈 뿐이었다.

도시와 촌락의 교묘한 혼물인 이 교외의 한적한 풍경은 날씨 덕분에 한층 더 한적했다.

싸늘한 바람은 바람막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나의 품속으로 파고들었고,

나는 그 바람이 마치 길잡이라도 되는 듯이 바람이 더 센 곳을 향해 걸어갔다.

전화가 울렸다. 받지 않았다. 그저 사라지고 싶었다. 얼어버리는 것도 좋고 길을 잃어 헤매다 쓰러지는 것도 좋았다.

어차피 존재라는 것은 너무 무거워서, 육체 따위 안에 갇혀있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차가운 바람을 향해 냉소하며 걷다가 도착한 곳은 바다였다. 바다에서 실려 온 바람은 짜고 썼다.  

어선들은 밧줄에 묶인 채 흔들리며 불빛을 번쩍였다.

 방파제의 표면 위를 스멀거리는 갯강구들은 제 동족의 살을 파먹고 있었다.

나 또한 맥동함을 멈춘다면 새우와 게와 갯강구들의 먹이가 되겠지.

예전에는 징그럽게만 느껴졌던 바다의 자그만 괴물들이, 이제는 사랑스럽게만 느껴졌다.

 수영할 줄 모른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바다라는 끝없는 무지와 공포 속으로 몸을 내던질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었다. 

나는 발을 내디뎠다.  나는 드디어 존재라는 짐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걷다가 벼랑 끝에 섰을 때 나는 돌연 겁쟁이였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외치는 용감스러운 얼치기 철학자는 어디 가고, 나는 그저 얼치기였다. 


나는 벌레들이 기어 다니는 콘크리트 바닥 위에 걸터앉았다. 나는 내 몸을 작게 웅크렸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나는 내가 강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애써 자신을 스스로 속여가고 있었다. 신에게 기도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독신자였을 때조차 신이 내게 응답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종교를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죽지 않고 자살의 위안을 얻을 수 있다면 금전은 어디까지나 싼값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구원받을 수 없는 이단자였다.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는 쓰레기였고, 희망도 절망도 없고 눈물을 흘릴 권리도 없는 존재였다.

안개가 나를 휘감았다. 수평선 너머로 물보라가 크게 일었다. 드디어 존재에서 해방된다.

겁쟁이인 내가 선택할 수 없었기에, 자연이 나를 그녀의 품으로 데려가 준다.


 내가 눈을 감았다 떴을 때, 주변은 장막으로 가려져있었고 그 틈새는 수많은 눈알로 가득했다. 

그토록 많은 시선이 나를 쳐다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 눈알들은 내게 웃음지어보였다.  

장막이 걷히자, 그들의 호의는 먼 곳으로 사라지고,  내 앞에 보이는 것은 유리창 너머로 비치는 도시의 눈먼 적의였다.

나에게 존재에서 해방되는 운명이란 있을 수 없었다. 열차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고가터널을 관통했다. 지역 도서관 앞에 설치된 시계가 초침을 움직였고, 그 밑의 전광판은 오늘의 연도와 날짜를 표시하고 있었다. 무언가가 잘못됐다. 이때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다고 믿었는데. 

이미 흘러버린 시간이고, 나의 의식이 속해서는 안되는 시간일 텐데. 나는 흘러내리는 교복 바지를 본능적으로 붙잡고 벨트를 동여맸다.

나는 식탁에 앉아있었다. 김치와 된장찌개 냄새가 났다. 난 어딘가 익숙치 않게 느껴지는 팔을 들어 젓가락을 집으려 하다가, 젓가락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금속성이 침묵을 깼다. 동생은 내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며 식탁 밑으로 내 정강이를 차댔다.  

"오빠 오늘따라 더 이상하다."

"뭐가 이상해? 그리고 그만 차라 좀."

"...아냐. 그리고 안 찼거든?"

"아니, 지금 찼잖아."

피식 웃음이 나왔다. 왜 나를 괴롭히는 걸 그리 좋아하는지 몰라도, 언제나 유치한 실랑이를 끝내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져주는 것 뿐이었다. 

식사를 마치자 피곤이 몰려왔다. 어제와 오늘의 일은 내 의식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격렬했다.

그날밤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쓴채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