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여느 때와 같은 날이었다.

그저 그런, 어제와도 같고 내일과도 같을 오늘.

8년 전 어느 날, 땅에 묻힌 채로 눈을 떴던 그 날 이후로 매일같이 이어진 일상.

살아님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땅바닥을 구르고, 뿔 달린 몬스터에게 쫓기는 나날.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발로 차이고 뺨을 맞으며 길 한복판에서 잠드는 그런 생활.

이제는 익숙해진.

살기 위해서는 익숙해져야만 했던 지옥같은 일상의 마지막 날에, 어느 순간 이상한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번 주인공 이름은 뭘로 하지? 하랑이... 루나... 응! 이번엔 겨울이로 해야겠다!]

[그럼 주인공이 겨울이니까 언니는 여름이로 하고... 첫 만남은 뿔토끼 뿔에 찔려서 쓰러진 걸 구해주는 걸로 하면 되겠다! 뿔토끼 기여어!]

[수인화는 역시 첫 화부터 시키는게 나을까? 피폐가 너무 길면 독자님들이 싫어하시겠지?]

[그럼 8살이라고 생각하고 착각물 전개로 가서 나데나데를 하는 게 전개가 자연스럽겠지? 아, 푸딩 먹고 싶다.]

처음에는 죽을 때가 다 돼서 환청이 들리는 거라고 생각했다.

몇년째 제대로 입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고, 매일 노숙을 했으니 죽을 때도 되었구나 싶었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건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을 때였다.

그것은 평소와 같이 뿔토끼에게서 도망가던 중에 갑작스럽게 일어났다.

내 몸이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위화감이 강렬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기절이나 빈혈 따위의 느낌이 아니었다. 누군가 내 영혼을 뽑아 내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참 달리던 와중에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으니 넘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이어질 일도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뿔토끼의 뿔에 찔려 죽었다. 아니, 죽을 것이었다.

내 입이 마음대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끙."

"당신, 이 동네에서 유명한 노숙자인 건 알아요?"

"정말 죄송해요..."

"하아, 일단 상태 좀 확인해 볼게요. 동의하시나요?"

"네에..."

"당신 여덟 살 아니죠? 아닌 거죠?!"

"저, 팔 년... 켁."

그 말을 마지막으로 다시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지만, 의미가 없었다.

나는 이미 죽기 직전이었으므로.

의식을 잃어가던 도중, 다시 이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좋아, 이 정도면 괜찮은 것 같아. 겨울아, 언니가 행복하게 해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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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죽지 않았고, 웬 고양이 수인이 되어 있었다.

눈을 뜨자 여전히 내 몸은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연극과도 같이 정해진 행동과 정해진 대사를 내뱉으며,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이상한 목소리를 듣는 것 뿐이었다.

[우우... 독자님들이 여명길드를 너무 싫어하셔... 어떡하지? 내가 글을 잘 못 썼나봐...]

[어떻게 독자님들한테 여명길드를 어필해야 하는데... 등장만 해도 싫어하시면 어떡해...]

[여름이는 진짜 욕먹으면 안되는데... 흐아앙. 어떡해... 푸딩 먹고 싶다...]

[뭐야, 그냥 밈이었다고? 다행이다! 이러다 글 엎어지면 어떡하나 했는데... 히이잉. 다행이야...]

[그럼 이제 진도를 좀 나가야지. 그동안 여명길드 세탁한다고 전개를 너무 못나갔어...]

[오? 뿔토끼 수인? 이거 괜찮은데? 응애가 세 배면 나데나데도 세 배잖아?]

[이쯤에서 악역 하나 넣고... 얘는 금방 퇴장시켜야지. 나쁜 놈!]

그렇게 나는 내가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봤다.

이따끔씩 내게 몸의 주도권이 넘어올 때도 있었지만, 항상 무언가 중요한 일이 일어날 때면 주도권이 사라졌으므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사실상 잠드는 것과 생각하는 것 뿐이었다.

처음에는 이상한 목소리를 증오했다.

이 목소리는 내 지옥같은 8년을 만들어낸 존재였으므로.

그것도 모자라 이젠 내 삶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존재였으므로.

내 삶을, 이 세상을 주무르는 사악한 절대자였으므로.

그러나 점점 시간이 갈수록 나는 그 목소리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 목소리는 오로지 생각만 할 수 있는 내 삶의 전부였다.

그 목소리는 내 삶을 행복으로 가득 채워 주려고 노력했다.

무엇보다 그 목소리는 너무나 순수하고, 나에 대한, 이 세상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나는 그 목소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내 불행을 만들어낸 존재도 이 목소리가 아닐지도 몰랐다.

나는 그저 이 목소리에 의해 구원받기로 선택된 행운아일지도 몰랐다.

이 세상의 어딘가에는, 나와 같은 선택을 받지 못해 죽어가는 이들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나는 그 목소리를 사랑하기로 했다.

[겨울아, 늘 행복해야 해. 언니는 널 사랑한단다.]

나도, 사랑해요.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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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TA 주인공 만화인가 그거 느낌으로 써보려고 했는데 역시 어렵네

하도 써오래서 써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