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에 앉은 중년의 사내가 손에 쥐고 있던 검은 책을 펼쳤다.

검게 물든 양장본으로 인해 사뭇 불길한 느낌마저 들었지만 사내는 아랑곳도 않고 천천히 책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한 장, 두 장, 그렇게 페이지가 넘어가고 또 넘어가서 이윽고 절반의 내용을 읽어내린 사내가 굳은 몸을 쭉 피며 뻐근함을 해소시킨다.

그가 읽기에 책의 내용은 별로 특별한 게 없었다.


차원의 관장자가 창조의 여신을 우롱하기 위해서, 그녀가 만들어낸 피조물을 가지고 노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장황하게 쓰여져 있었을 뿐.

그다지 이런 종교적이거나 판타지스러운 내용을 반기지 않는 중년의 정태수는 내내 책을 읽으면서도 따분함을 떨치지 못했는데.

그럼에도 절반이나 내용을 읽어내려간 것은 이 책을 자신에게 팔아넘긴 장사꾼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오르던 탓이었다.


"아드님의 생일 선물로 이 책에 담긴 신비한 힘만큼 어울리는 것이 없겠죠."


"내 아들은 별로 책을 좋아하지 않는데."


"손님께서 읽으시면 되지 않습니까. 책에 담긴 내용이 중요할 뿐, 겉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대체 책에 담긴 신비한 힘이라던가, 내용이라던가,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되는 이야기일 뿐이었지만 마치 홀린 듯이 정태수는 이 책을 구입했다.

장사꾼은 골칫거리를 처리한 것처럼 실실 웃으며 마지막 호의라도 보이듯 던진 한마디가 그의 뇌리를 계속해서 맴돌고 있지 않은가.


"아드님의 소원을 당신이 이뤄줄 수 있을 겁니다."


대체 어떻게? 라는 의문은 들지도 않는다. 이 책에는 별로 의미도 없는 글쟁이의 망상만이 가득했고 얻을 수 있는 교훈이나 깨우침조차 없었으니까.

정태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이 책을 구입하느라 사용한 5만원이 썩 아쉽게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아들을 사랑하는 조금 나이 먹은 아버지인 정태수는 아들의 웃는 모습이 떠오름에 따라 곧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는 다시 페이지를 넘긴다.

그리고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양장본에서 불길한 보랏빛이 조금씩 새어나오고 있었지만 이를 발견하기엔 방이 너무도 밝았다.

어두운 방에서 조명만 키고 책을 읽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정태수의 시력이 그닥 좋지 않았다는 점이 요인 중 하나이리라.


그렇게 책의 불길한 기운은 점점 더 커져만 가고, 그 기운은 알게 모르게 정태수에게 깃들어 그를 서서히 저주로 물들이기 시작한다.

책의 내용은 읽는 자를 우롱이라도 하듯이 점점 무성의해져갔고 더는 읽지 못하겠다 싶어질 쯤엔 이미 책을 완독하게 된 그가 있었다.

기승전결의 구조 조차 갖춰지지 않은 글이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울 정도인 내용에 정태수는 결국 이 책을 산 본인이 바보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다.

이마를 감싸며 한숨을 내쉰 그는 아들의 생일 선물을 사기로 해놓고 정작 쓸데 없는 곳에다 5만원을 사용한 것에 후회했다.


"음... 그나저나 굉장히 나른한데."


너무 바보 같은 글을 읽고 정신에 무리가 온 탓일까. 온 몸이 나른하고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원인불명의 피로감에 휩싸인 정태수가 침대를 찾아 비틀거리며 몸을 움직이지만 그것도 쉽지 않아 보였다.

이내 책에 대한 것은 머릿속에서 사라져버린 그는 침대로 돌아가기도 버거워 결국 바닥에 몸을 뉘여 쓰러지듯 잠에 빠져들었다.




"...여긴?"


눈을 떠보니 정태수의 주변에 그 무엇도 존재치 않았다. 한마디로 무의 공간. 무색으로 가득찬 미지의 공간 속에서 그는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이상하다거나 놀랍다는 감정은 일말도 존재치 않았다. 이유는 그조차도 모른다. 그냥 내가 처음보는 장소에 있구나 싶었다.

그리고 무표정한 그의 앞에 형체를 알 수 없는 기묘한 무언가가 나타난다. 말이나 글로도 표현할 수 없는 고정되지 않은 무언가였다.


"새로운 장난감이구나. 이번에는 어떻게 가지고 놀아야 할 지 고민을 좀 해볼까."


"장난감이라... 내가?"


"저번에 가지고 놀던 게 너무 금방 망가져서, 이번엔 최대한 오래 쓰고 싶으니 세심하게 신경을 써주도록 하지. 축복받은 자."


서로가 동문서답을 하고 있는 가운데,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정태수의 몸 속 깊이 잠든 저주와 반응했다.

그가 읽고 있던 기묘한 책에서 흘러나왔던 저주의 기운이 순식간에 정태수의 모든 것을 잠식하고.

곧 그의 의식이 심연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한다.


"음... 저주를 지니고 있기엔 너무도 성실한 인간이군. 아무래도 덤터기를 쓴 모양이야.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의식을 잃은 정태수의 몸을 알 수 없는 기운으로 세워둔 채로 품평이라도 하듯 그의 주위를 맴도는 무언가.

정체불명의 무언가는 순식간에 정태수의 머릿속에서 기억을 끄집어내어 그의 모든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하하하, 좋아. 가족을 사랑하는 아버지, 허나 그 가족은 아비를 저주하는 연극이면 좀 재미있을지도 모르겠어."


곧 정태수의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던 무언가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흘리기 시작했다.


"아내와는 여전히 금슬이 좋고, 아들이 하나. 썩 재밌어지겠는 걸. 아, 그래... 차라리 이게 좋겠어."


무언가 중얼거리던 그것은 정태수의 몸을 만지작 거리기 시작하더니 마치 점토로 도자기를 빚듯 그의 몸을 변화시키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줄어든 정태수의 육신이 다시금 재구성되기 시작하며, 남성의 상징부터가 당장 소거되고 말았다. 이제 그는 고자가 되었다.

하지만 하나를 가져갔으면 하나를 주는 것이 인지상정이라며 헛소리를 중얼거리는 무언가.


"기뻐해라. 대본을 조금 바꿔줬으니 말이야. 난 착하게 살아온 놈들을 그다지 싫어하지 않거든. 다만 나도 재미는 봐야 하니까."


그리 말하면서 그의 육신을 천천히 늘이고 줄이고 비비고 돌리면서 이전의 모습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다른 생김새로 변화시키는 무언가.

점점 완성된 모습을 갖춰가는 정태수의 육신은 어쩐지 남성적이기 보다는 여성적이면서도 절제된 아름다움으로 탈바꿈되어 있었다.

예쁘고 적당히 부풀어 오른 젖가슴에는 아직도 성장의 여지를 두도록 했고, 그 아래로는 각선미를 확실하게 살려내어 확실하게 여성성을 강조.

예술에 대한 집착마저 엿보이는 정태수의 뒤바뀐 육체는 남성이 여성에게 바라던 성적인 매력이 한가득 실려있었다봐도 무방했다.


"중년 남성이었던 아버지가 아들의 이상형으로 변한다면 과연 어떻게 될 지 궁금한 걸."


달라진 정태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재창조에 대한 뿌듯함을 느끼는지 코로 추정되는 부분을 슥슥 비벼대는 무언가.

정태수의 아들에게서 뽑아낸 취향을 아비인 그에게 담아낸 그것은 스스로도 썩 자부심이 느껴지는 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이른다.


"네 녀석 아들의 생일선물로는... 아주 잘 어울리겠어."


창조의 여신을 우롱하기 위해서, 유린당한 가족이 향할 이야기의 종착점은 과연 어디일까.

밤이 지나고 아침이 찾아올 때, 정태수가 쓰러지듯 잠들었던 자리에는 중년의 남성이 아닌, 가녀리고 무방비해 보이는 미소녀만이 남겨져 있었다.





-담에 계쏙



싸벅소설대회에 냈던 내 아버지는 동급생의 시작지점임

다음 화 내용은 대충 https://arca.live/b/tsfiction/8957465 에서 이어진다봐도 무방할듯

재밌게 읽어줬길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