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 응? 뭐라고?"


마침 TV에선 한참 등장인물들끼리 웃긴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으니까. 그가 그녀를 부르는 소리에 그녀는 소파에 앉아있는 채로 건성으로 답했다.


"내 말 듣고있기는 한거 맞아?"


"사실. 아니."


아하하. TV에 푹 심취해있던 그녀는 눈물방울까지 눈에 매달아가며 웃음을 터트렸고, 심통이 난 그는 리모컨을 순식간에 빼앗아 가 TV를 꺼 버렸다.


"앗! 제일 재밌는 부분인데 꺼버리면 어떻게 해!"


"그러니까. 좀 내 말좀 들어줄래?"


후우. 어쩔 수 없지. 이렇게 무언가 한가지에 꽂혀버렸을 때의 그에게는 이야기를 들어주는 방법이 전부라는 걸 연애 때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무슨 일인데, 정말."


그렇지만 정말 오랜만에 재미있는 프로그램이었는걸. 요즘 TV는 무모한 도전도 없고 빵빵 터지는 프로를 도통 찾아볼 수 없단 말야.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뾰루퉁하게 입술을 내민 채로 그를 바라봤다.


"TV가 중요해 내가 중요해?"


"으음…."


물론 그도 소중한 남편이니까 무척이나 중요하지만, TV도 어떻게 보면 20년도 더 넘게 같이 생활해온 소중한 사람…아니. 물건이란 말야.


"…티비?"


"우리 여보. 엉덩이 맞고 싶다고?"


"어…. 그게 왜 그렇게 돼?!"


"됐어. 너.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건진 알고 있는 거야?"


으음…. 무슨 이야기일까. 기억력이 좋지 않으니까 매번 이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퀴즈를 맞추는 것 같았다. 무언가 윤곽이 잡혀올 것 같은데. 혹시. 그건가?


"오늘은 뒤로 하고 싶어?"


태연하게 말하던 뻔뻔스러운 그녀의 표정을 보고, 그녀의 남편은 싸하게 웃었다.


"진짜 오늘밤에 죽여달라는 소리지?"


"아니었어?"


"맞겠어 그게?"


"근데 저번주엔 그거였잖아!"


할말을 잃었다는 듯 그는 날 빤히 바라보면서 이걸 어떻게 해야 되지... 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치?"


"오전에도 얘기했었잖아. 금붕어야?"


"금붕어라니…. 내가 그만큼 귀여워?"


하아. 하는 한숨소리가 났다. 오예. 이겼다!

킥킥거리며 한참 승리자의 기분을 맛보고 있으려니까. 심통이 난 얼굴로 그가 말했다.


"그럼 오늘 난 거실에서 잘 테니까."


"거실…?"


"응."


"그러면 나보고 혼자 외롭게 자란 소리야?"


"응."


"히잉... 알았어. 내가 잘못했어. 무슨 이야기였어?"


"이불이 어디 들어있더라? 창고방?"


이대로면 정말 따로 자야될지도 몰라. 정말. 낮에 하던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 앗. 맞다. 정말 그걸 왜 깜빡했지?


"아이... 갖고싶다고 말했던 거 맞지?"


그제서야 창고방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던 그였다.


"이제 기억났어?"


"응. 그치만. 낮에도 말했잖아. 아직은 너어~ 무 이르다고. 삼십대도 안 됐는데. 결혼…한지도 얼마 되지도 않았고."


"그래도 상관 없다니까? 그냥….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의미의 결정체잖아. 난 그냥 그걸 원하는 거야."


"…. 그렇게 말해도. 그냥 싫어."


맞아. 그걸 거부하는 건 정말 단순한 이유일 뿐이었다. 거부감이 드니까. 성적인 쪽으로는 볼장 안볼장 다 봐놓고 이제와서 왜? 라고 묻는다고 해도 그녀 스스로도 몰랐다. 마음 속 깊은 곳이 아릿해질 뿐이었기에.


"난 사실…. 네가 불안해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래. 생각해 봐. 아이까지 생기면 네가 불안해할 필요가 없어질 거 아냐."


"그렇… 네."


불안한 건 사실이었다. 사실은 이 모든게 그저 깨어나면 사라질 하나의 꿈이었다거나. 하는 따위의 비현실감이 항상 자리잡고 있었다. 그래서 어느 날엔 그 비현실감에 압도당해서 하루 종일 그이의 옷자락을 붙잡고 울기만 한 날이 있을 정도로.


"그러면. 이렇게 하자."


"어떻게?"


"봐봐?"


그는 어딘가에서 꺼내온 포장된 콘돔과 내 바느질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그리곤 콘돔 하나의 중앙을 바늘로 콕 뚫어버리곤 말했다.


"눈 감고 있어."


살며시 눈을 감았고, 이내 뜨라는 말이 이어졌을 때, 눈 앞에 보이는 건 포장이 벗겨진 두개의 콘돔이었다.


"이게…뭐야?"


"뭐긴. 콘돔이잖아."


"그니까아! 하나는... 구멍 뚫은 그거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르라고?"

끄덕끄덕.


"…. 그냥 새거 하나 까면 되잖아."


"오늘은 안 돼."


"너무해!"


포장이 안 벗겨졌더라면 뚫린 구멍이 티가 났을텐데. 애당초… 왜 이런 짓을 하는거야?! 야한 걸 이런식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여도 되는 걸까..?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어가는 것 같아서 입술을 들썩였다.


"그럼 우리 오늘 따로 자."


응. 그 방법이 최선일 것 같아.

뒤도 한번 안 돌아보고선 이불을 꺼내러 창고방으로 향했다.


"정말 그렇게 나오기야?"


"아까 너도 그랬잖아. 진짜. 변태랑은 같이 못 자. 아니. 안 자!"

"그 변태한테 맨날 울고불고 매달려서 박아달라고 하는게 누군데!"


"닥쳐 개새끼야아!"


그는 그녀를 뒤돌게 만드는데 성공했고, 그 댓가는 그의 상상보다는 컸다. 진심으로 꽉 쥔 주먹으로 한대도 아닌 여러대로 얻어맞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뼈 맞았어 뼈! 으악!"

"죽어 그냥…. 하아. 내가 하지 말랬잖아 그런거…!"


맞은 부위를 꽉 움켜쥐면서 아픈 티를 내던 그에게 미안해진걸까, 그녀는 조심스레 발걸음을 내밀어 다가가 손을 뻗었다.


씨익.

앗. 속았다! 를 외칠 새도 없이 붙잡힌 손에 끌려들어갔고 금방 다른 두터운 손이 그녀의 뒷목을 감싸 끌어당겨졌다.


순식간이었다.

따듯하고 말캉거리는 입술이 맞닿는 것도. 까끌거리는 무언가가 자그마한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것도.


어느샌가 깍지끼워 잡았던 그의 단단한 손가락이 슬그머니 허리를 타고 내려오더니 골반에 닿았다.


"같이 잘까?"

정말, 그녀는 제 입술을 쓸어내리는 손가락을 햝아올리는 순종스러운 강아지가 되어 고갤 끄덕였다.




***




"…어라."


평소와도 같은 일상을 보내길 일주일. 아침 일찍 일어나 혹시나 하고 퇴근길에 사둔 임테기를 내려다봤는데.

희미한 빨간색 선이 두 줄 생겨나 있었다.


이게 무슨 뜻이야?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 그녀는 눈꺼풀을 몇번이고 깜빡거렸고, 곧 느껴지는 토기에 입을 틀어막을 수 밖에 없었다.

설마. 아닐거야.


진짜…?


그와 그녀의 출근시간은 두어시간 차이나는 편이었다. 아무래도 거리가 가장 큰 문제로. 그녀의 직장은 집과 같은 도시 안에 있었지만 그의 직장은 도시를 벗어나 다른 도시에 위치해있었으니까. 임신… 했다는 걸 알려주면 분명 기뻐하겠지. 평소부터 입에 달고 살던 그녀의 전업주부화도 분명 이야기뿐만이 아닌 사실이 될 터였다.


그렇지만 어쩐지 되도록이면 그가 이 사실을 알게 되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늦추고 싶었다. 단순히 조금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같은 이유가 아니라. 아직까진 그녀 스스로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문제였으니까. 새로운 생명의 창조. 그녀가 어머니가 되는 것.



결국 그에게 그녀가 임신했다는 이야기를 전하는 건, 그가 퇴근하고도 몇시간이 더 지나 저녁을 먹고 나서였다.


"나. 있잖아……?"


티비는 시끄럽게 몇주 전의 재방송을 내뱉어대고 있을 뿐이었지만, 그에게나 그녀에게나 그것은 평범하게 식사자리의 따분함을 달래주는 것 뿐. 주는 서로끼리 대화를 주고 받는 것이었다.


"응. 무슨 일인데?"

식사 시간 내내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다가도 계속해서 뜸을 들이는 것 때문에, 그는 정말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싶어서 조금은 진지해져 있었다.


"나 있지…?"

"있다는 소리만 오늘 밥 먹으면서 수십번도 더 했을걸… 너."


"그러니까… 나. 임신했어."

"그래. 임신. 뭐?"


임신이라는 단어에 사레가 들린 건지, 마시던 물을 풉 뿜은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거짓말 아냐. 진짜... 로."


"아니. 아니. 정말? 진짜로?"

"응."


그녀는 슬쩍 주머니에 밀어놓았던 임테기를 꺼내 그에게 보여줬다. 명백하게 그어진 붉은색의 선 두개. 그녀가 임신했다는 사실은 거짓이 아니었으니까. 겨우 하룻밤이었지만.


"그래서 오늘 쉰다고 한 거구나 …어쩐지. 평소에는 성실해서 한번도 쉰 적 없던 애가 갑자기 쉰다고 하니까 놀랐잖아."

"놀랐어…?"


그의 반응이 생각보다 무미건조했다. 임신했다고 말하면 울거나 웃거나 둘중에 하나는 할 줄 알았는데. 그렇게 기쁘지 않은 건가…. 뭐야. 그럼 난 어떻게 해야 돼?


"우리. 다음주에 여행 가자."


그녀는 차분한 말투로 여행가자는 말을 꺼낸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기쁜 것 같은 표정 같기도 하고.


"여행?"


"지금 아니면 못 갈 거 아냐... 너랑, 하고 싶은 거 엄청 많은데. 임신했으니까."


눈꺼풀을 깊게 감아내렸던 그는 심호흡을 하고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사랑해. 정말."


사랑한다는 말. 그제서야 말 끝에 묻어난 감정의 편린이 그의 표정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만큼 환희에 찬 표정을 다시 볼 수 있을지 의문일 정도로. 맞잡은 손길은 무척이나 따듯해서 그녀도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만큼이나 서로의 진심을 확인할 수 있는 단어가 또 있을까.


"사랑해. 나도…"


조금은 거북스럽게 느껴졌던 뱃속이, 더 없이 사랑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근대 TS언급이 없으니가 이게 TS소설인지 그냥 로맨스단편인지 모르겟음

그림이나 글이나 TS묘사하는건 마찬가지로 난이도가 되게높은거 아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