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만7천자가 넘어버린 분량! 그만 폭주해버린 겁니닷!



명/청시대도 분류 상 근세로 포함되니 그 시대라고 생각해주면 감사합니닷!





역시 자신은 박복할 팔자다.


젊은 남편의 위패를 두고 든 생각이었다.


아, 그는 없어지고 이제 대신할 세 글자만 남았구나.


위연연(衛聯恋)은 그리 탄식하며 향에 불을 붙였다.


저를 제외한 사람 없는 사당에 향 냄새가 퍼지며 흐릿한 추억을 불어온다.


'부인, 이것 보시오! 내가 폐하로부터 서역의 물품을 받아왔소!'


'소녀는 관심 없습니다.'


'거참 이토록 귀한 물건을 가져왔는데도 눈길 한 번 안주는 거요? 너무 냉담하구려 냉담해.'


'제 태도는 항상 이랬습니다.'


'집안은 잘 돌보지만, 내게 관심은 커녕 소실(小室:첩)만 신경쓰니 내가 부인을 들인건지 친우를 사귄건 지 헷갈릴 지경이오.'


'제게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합방은 바라지도 않소. 하지만.....'


'.... 후야(侯:후작 작위)?'


'조금만 이라도 마음을 열어주오. 가주가 될 당신을 억지로 끌어온 결혼인 걸 알기에 많은 욕심은 바라지도 않소.'


'.......'


'그저 그 냉담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풀리면, 그 작은 틈을 나로 채워 달란 부탁일 뿐이요.'


그러곤 제 손에 귀하디 귀한 서역의 물품을 놓고 부끄러운 듯 후다닥 자리를 피했지.


그 당시 든 생각은 별거 없었다.


얼마나 잘생겼으면 남자의 자아를 가진 내가 봐도 토 나올 정도로 역하진 않구나, 그런 생각.


아마 그가 알았다면 몹시도 큰 상처를 입었겠지만, 지금 그는 이미 죽었다.


"..... 그래 이미 죽었지..... 죽었어."


슬프지 않은 건 아니다. 


그렇다고 다른 어염집 여인들처럼 졸도할 정도로 극도로 슬픈 것도 아니다.


그저......


툭 투둑


"당신을 좋아하진 않았어요, 그래도 하지만.... 하지만...."


이렇게 허망하게 가길 원하진 않았다.


"오래 살아주길 바랬어..... 그렇게 방정맞은 말이나 행동도 조금씩 좋아졌는데....."


만약 그가 계속 살아있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아마 조금씩 그를 받아들였겠지. 자신은 그리 단단한 사람은 아니었으니.


떨어지는 눈물을 훔치며 제삿상에 망원경을 놓는다. 그가 황제에게서 받아온 서역의 물품이었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상공(相公:남편을 부르는 애칭). 부디 좋은 곳에서 다시 태어나 다른 여자와 사랑하세요."


진심 어린 애도를 하며 절을 올린다. 이제 만날 수 없는 다정한 이를 위해. 다시 태어난 그가 행복한 삶을 살길 바라며, 남편을 배웅한다.


남편을 추모하고 벌개진 눈으로 사당을 나오니 도씨 어멈이 따뜻한 수건을 들고 나를 반겼다.


도씨 어멈은 친정에서부터 나를 따라온 측근으로, 내 유모의 친딸이기도 했다.


"아이고 마님, 예쁜 눈이 이리 다 퉁퉁 부니 어떻합니까. 이제 곧 노마님(내 시어머니)을 만날 차례인데."


"괜찮네. 어차피 그 분은 내 눈이 멀쩡해도 트집을 잡는 분 아닌가, 그럴 바엔 퉁퉁 부은 눈으로 가는 게 낫지."


"그래도....."


"어허, 어서 갑세. 이러다 또 늦었다고 한 소리 들을라!"


먼저 걸음을 서두르자 도씨 어멈은 어쩔 수 없다며 애정 어린 한숨을 내뱉곤 나를 따라왔다.


말투는 저리 퉁명스러워도 항상 나를 아끼고 챙겨주는 충실한 시녀였다. 그렇기에 저도 불충한 말투를 봐주는 거고.


그렇게 시어머니의 안휘당(安徽堂)에 가던 중, 의외의 인물을 만날 수 있었다.


"연(恋) 언니!"


내 이복동생이자 남편의 첩인 위연하(衛聯夏)였다.


제가 시집올 때 잉첩(媵妾:결혼하는 신부가 자매나 조카를 첩으로 데려오는 것)으로 따라온 그녀는 대신 저 대신 남편의 시중을 들어주고 아들까지 대신 낳아주었다.


아마 연하(聯夏)가 아니었다면 다른 야망 넘치는 첩에게 밀려 쫓겨날 수도 있었기에, 제가 정실 자리를 지킬 수 있게 만든 공신이기도 했다.


"하(夏) 동생."


연하는 자연스럽게 내 팔을 잡으며 부축을 한다. 괜찮다며 손사래치지만 부득불 내 시중을 드는 그녀였다.


이처럼 유일하게 아들을 낳았으면서도 철저히 저의 아랫사람으로 행동하기에, 자신도 섭섭치 않게 그녀를 대해주었다.


동침을 들지 않는 자신을 대신해 가장 많이 남편을 밀어넣은 첩도 연하였고, 상당 수의 집안일도 맡긴 터였다.


시누이가 없었기에, 집안의 권력 순위가 시어머니-나-연하 순일 정도로 첩 치고는 상당한 힘을 지니기도 했다.


그렇기에 이렇게 충실하게 구는 거지만.


"연 언니, 여기는 안휘당으로 가는 길이 아닌가요? 설마 노마님께서 또 언니를 부르셨나요?"


"맞단다."


"또 언니를 부르셨어요? 아니 이번에는 또 무엇으로 괴롭히실려고! 도대체 왜 노마님은 언니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난 거에요! 언니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죽은 후야 때문이지. 아들은 죽고 그 화는 풀 데 없으니 안 그래도 고까운 내가 더 얄미워 보이는 거지."


"아니 그래도 그렇지! 막말로 후야께서 돌아가신 게 언니 탓도 아닌데!"


"위 이랑(姨娘:첩), 말씀 조심하세요!"


점점 험담이 선을 넘어 도씨 어멈이 경고하자, 그제야 연하의 입은 다물어졌다. 그래도 아직 분하단 듯 입술을 삐죽 나와있었지만.


나는 왠지 그런 그녀가 귀여워 입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그렇게 걱정되면 같이 갈테냐?"


"네? 언니, 그래도 되나요?"


"누굴 따로 데려오지 말란 말씀은 없었단다. 너 정도야 노마님께서 아끼시니 괜찮을 거란다."


실제로도 그랬다. 유일하게 후계를 낳은 연하를 시어머니께선 상당히 아끼셨다.


연하는 도씨 어멈의 눈치를 보며 쭈뼛거렸다. 내가 도씨 어멈에게 작은 꾸중을 내리고서야 연하와 나는 안휘당으로 갈 수 있었다.


아들을 잃은 슬픔 때문인지 안휘당은 평소와 달리 어딘가 적막하고 우울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나와 연하가 온 걸 안 시어머니의 측근 시녀는 바로 들어오라 문을 열어준다.


아마 나 혼자 왔다면 반 시진(1시간)은 족히 세워뒀겠지. 이미 전적이 있던 터라 그리 화나지도 않는다.


안으로 들어서니 상복을 입은 시어머니가 차를 마시고 있었다.


"쯧, 채신머리 없이 엉망인 꼴로 돌아다니기는. 어서 앉거라, 위 이랑도 앉고."


한 번 나를 흘겨보곤 바로 명령을 내린다. 요즘 남편의 상으로 히스테리가 극에 달한 터라 익숙해져 있기에 아무런 묵묵히 앉는다.


나는 시어머니의 맞은편에, 연하는 내 오른쪽에 앉았다.


우리가 앉자, 시어머니는 마저 차를 마시곤 부른 이유를 말씀하셨다.


"알다시피 가주를 잃은 작금의 영평후부(永平侯府:후작 지위의 가문)에 큰 위기가 온 걸 알테다."


""네, 노마님.""


"아직 원백(연하의 아들이자 후계자)이 어리니, 다 클 때까지 우리 여자들이 가문을 지켜야 할게야."


아직까진 모두가 아는 원론적인 말이다.


"앞으로 원백이 커서 가주가 될 때까지, 먹는 입을 줄이고 집안의 문을 단단히 잠가야 한다."


조금씩 밑밥을 깐다. 전형적인 수법이다. 원론적인 이야기를 깔다 그걸 근거로 갑자기 논리적인 비약을 펼치는 방식.


항상 시어머니가 즐겨쓰는 수법이었기에, 모를래야 모를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명목 상 윗사람에게 무례하게 굴 순 없으니 선수를 칠 수 밖에.


어차피 꺼낼 사안이기도 했고, 차라리 지금 말하는 게 낫지.


"네, 맞습니다 어머님."


"그렇다면...."


"그렇기에 저는 앞으로 본가에 있는 가묘(家廟:집안의 사당)에 가 후야를 모시고 싶습니다."


"뭣....!"


"언니?!"


갑자기 떨어진 폭탄 발언에 시어머니는 물론 연하까지 경악하며 나를 바라본다.


하긴 누가 상상이나 하겠어. 이제 남편이 죽고 후계자는 어린 지금, 집안을 휘어 잡을 수 있는 본처가 자발적으로 가묘에 간다니.


가묘는 죽은 사람을 모시는 곳이다. 그곳에선 사람을 만날 수도 없고 상을 올리느라 아주 검소하게 지내야만 하고.


차라리 절간에 들어가는 게 낫다는 사람도 있었지. 차라리 거기는 승려라도 만날 수 있으니.


그런데 내가 왜 그곳에 들어가냐고? 답은 간단하다 저 시어머니를 피하기 위해.


아무리 내가 본처라 한들 나를 호시탐탐 잡아먹으려 하는 시어머니는 있지만, 집안의 후계자가 될 친아들은 없다.


게다가 가주 대리를 맡아도, 시어머니가 권한을 내놓으라 하면 꼼짝 없이 내줄 수 밖에 없는 신세.


그 전까진 후야가 막아줘 호된 시집살이를 피할 수 있었지만, 그 방패막이 사라진 작금의 후부에 남을 순 없었다.


그럴 바엔 먼저 선수를 쳐 가묘로 가 시어머니의 손길을 피한 뒤, 죽은 후에 돌아와 집안을 다스리면 그만이다.


시어머니 건강이 부쩍 안 좋아지신 걸로 보아 가묘에 가 있는 시간도 그리 길지 않을테고.


'그 정도는 견딜 수 있어. 혼처가 정해지고 불교에 귀의할까 진지하게 고려하기도 했고.'


"그동안 후야의 시침을 들지도 못했기에, 죽어서라도 이렇게 모시고 싶을 뿐입니다.


제 친정인 위 가(家)의 위세는 어머님의 영국공부에 비할 수 없고, 집안에서의 공로는 후계자를 위 이랑에 비할 바가 못 되죠.


차라리 저는 한적한 곳에서 후야를 모시는 동안, 어머님은 집안을 보호하고 위 이랑이 원백을 기르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폭탄 발언에 먼저 정신을 차린 사람은 연하였다.


"언니! 제발 그 명령을 거두어 주세요! 언니처럼 똑똑한 적녀(嫡女:본처의 딸)를 어찌 한낱 서녀(庶女:첩의 딸)가 넘어설 수 있나요.


애초에 소첩이 감히 영평후부의 후계자를 낳을 수 있던 것도, 언니의 자비와 안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차라리 언니 대신 소첩이 가묘에 가 후야를 모시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언니는 본처로써 집안의 중심을 잡아주세요."


연하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는 듯, 머리를 조아리며 내게 애원했다.


이 정도로 격렬한 거부에 당황해 연하를 달래려는 찰나 불호령이 내려왔다.


"그만-!!!! 이 무슨 추태냐? 위 이랑 너는 조용히 하고 의자에 앉거라! 어찌 이랑 주제에 집안일에 첨언을 하더냐? 묵묵히 명령을 따라도 모자랄 것을!"


드디어 정신을 차린 시어머니가 불같이 화를 내자, 연하는 서둘러 자리에 앉을 수 밖에 없었다. 물론 계속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았지만.


"그래서 정말로 가묘에 가 후야를 모실테냐?"


"노마님!"


"시끄럽대도!"


시어머니가 그 안의 꿍꿍이를 다 밝히겠다는 듯 나를 빤히 바라본다.


나는 동요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그리고 힘 있게 또박또박 한 단어씩 내뱉는다.


"네 그렇습니다, 어머님. 저는 3년상을 치루면서 후야를 추모하고 싶습니다."


"흠, 만약 다른 가문들이 알게 된다면 같이 부친상을 치룬 조강지처를 내쫓았다고 헐뜯을 터. 그건 어찌 대처할 게냐?"


"건강이 안 좋아 본가로 휴양을 가면서 후야를 모신다고 하면 됩니다. 그동안 제가 두문불출한 것도 사실이고, 설령 제 건강에 이상이 없단 걸 알아도 남편을 잃은 슬픔에 그리 됐다고 둘러대면 그만이죠. 그래도 사람들이 수군거리면 다른 이랑을 보내고 제가 돌아오면 됩니다."


"되었다! 그정도까지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갔다 돌아오면 지조가 없다고 사람들이 비웃을 터."


내가 돌아온다는 말에 바로 손사래를 치며 말린다. 허, 어머님 어지간히 제 얼굴이 보기 싫은 모양이셨네요.


"그러면 언제 내려갈 예정이더냐?"


"오늘 바로 짐을 쌀 생각입니다."


"마님!!! 노마님!!!!"


"이랑 주제에 건방지구나! 내쫓거라!"


내가 바로 짐을 싼단 말에 연하는 비명지르듯 소리쳤지만, 시어머니의 명령에 바로 안휘당 밖으로 내쫓겼다.


시어머니는 큰 힘 들이지 않고 가장 껄끄러운 상대를 치웠단 생각에 얼굴 근육이 흐물흐물 풀어지며 미소를 지었다.


워낙 노화가 진행된 터라 어딘가 기괴하고 이상했지만.


"그래, 삼년상을 치루면 가문에게 큰 명예가 될 터. 어쩌면 열녀문을 받을 수도 있겠구나. 


그러면 연연, 3년 동안 수고하거라."


"네, 어머님."


그동안 받아 본 적 없는 따스한 작별 인사를 받고 안휘당을 나갔다.


밖에는 연하가 무언가 중얼거리며 빙빙 돌다, 나를 발견하곤 곧장 달려온다.


"언니, 정말로 후부를 떠날 생각인가요?!"


"하 동생, 진정하렴."


"저는 못합니다! 배운 것도 없이 그저 시침 들 줄만 아는 제가 어찌 언니 대신 집안을 다스리고 후계자를 키울 수 있나요? 그러니 제...."


"연하야, 그만하래도."


무릎을 꿇으려는 연하를 다시 일으켜 세우며 그녀를 설득한다.


"이미 네가 집안일의 반 정도는 나 대신 처리하고 있지 않더냐? 어멈이나 사환에게서 별 말이 안 나오는 걸 보면 분명 순리와 이치에 맞게 집안일을 처리하고 있을 터."


"하... 하오나..."


"위 이랑, 끝까지 듣게!"


참다 참다 참지 못한 내가 소리를 지르자, 연하는 깜짝 놀라 고개를 움츠린다.


내가 조금 심했나란 생각에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편안한 어투로 조근조근 설득한다.


"그러니 너를 믿고 맡기는 거란다. 내가 있는 한 어머님은 나를 벼르려 들테고, 그러면 기둥 없는 이 집안은 휘청이겠지.


그렇기에 차라리 내가 본가로 떠나 분란을 방지할 동안, 어머님이 총애하는 네가 집안을 돌보면 된다.


게다가 원백도 적모(嫡母:아버지의 정실부인)보단 친모의 품에서 자라는 게 더 낫겠지. 나보단 네가 더 세심하게 그리고 사랑으로 키울 것 아니냐?"


"마.... 마님....."


"더 이상의 거부는 하지 말게. 이미 어머님과 상의해 결정된 일이고, 바꿀 수도 없는 게야.


계속 못한 다 하면 너 말고 양 이랑에게 맡길 테니 그럴 줄 알고!"


양 이랑은 연하 다음으로 버금가는 총애를 받은 첩이었다. 분명 그녀가 내 권한을 이어받으면 그동안 벼르고 벼른 원한을 연하에게 쏟아낼 것이 자명했다.


결국 단호한 내 결정에 연하는 꺾였다. 비록 기어다니는 말투였지만, 명령을 받은 게 어디야.


위로하듯 다시 연하의 머리를 쓰다듬고 내 거처로 향했다.


큰 고비를 넘어 기분이 맑은 하늘처럼 후련했다.


"도씨 어멈, 미리 말하지 못해 미안해. 후야께서 돌아가시마자 바로 계획을 세우느라, 결국 일이 터지고서야 밝히고 말았네."


"아뇨, 저는 괜찮습니다 마님."


"정말로? 전이었으면 '아이고 마님 그렇게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후부 부인의 체면을 지키셔야죠.' 라며 일장연설을 늘어 놓았을 텐데."


"정말 너무하십니다, 마님! 제가 그 정도까진 아닙니다!"


"알았어 장난이야, 장난. 그런데 진짜로 궁금한데 왜 괜찮은거야?"


"그야 위 이랑과 떨어져 지낼 수 있지 않습니까. 제가 누누히 경고했던 걸 받아들여 주셔셔 기쁠 따름입니다."


"아.... 그러고보니 도씨 어멈이 그랬었지. 그런데 왜 그랬던거야? 다른 건방진 첩들에 비하면 연하는 선도 잘 지키고 내게 정성이지 않은가?"


"아이고, 마님! 말도 마십쇼! 그렇게 똑똑한 첩이 별다른 이유 없이 철저히 선을 지키며 살 이유가 없습니다!


첩은 총애를 받으면 반드시 기어오를 존재고, 그렇기에 마님께서도 위 이랑 외 다른 첩들은 철저히 누르고 사셨지 않았습니까?"


"그건 내가 아니라 도씨 어멈이 맘대로....."


"마님 어머님께서 제게 특별히 내린 명령입니다! 마님께서 첩들에게 무르니 제가 잘 단도리 하라고요.


그래도 다른 첩들은 다 욕심이나 술수가 투명하지만..... 위 이랑 만큼은 이유나 술수를 파악할 수 없어요.


안 그래도 사가 시절부터 이상할 정도로 마님께 충성하면서 시집 올 때도 잉첩이란 명목으로 따라오니....."


"그만하게. 아무리 그 이유를 몰라도 지난 20여년 동안 나를 충실히 섬기고 헌신한 사람이야. 


그 이상 연하를 모욕하진 말게, 나도 화나는 수가 있어. 게다가 이제 곧 후부를 떠나니 만날 일도 없고! 그러니 그만하게!"


"알겠습니다, 마님."


결국 내가 꽥 소리를 지르고 나서야 도씨 어멈의 열변은 멈추었다. 잠시 동안 나나 어멈이나 열기를 가라앉히고 다시 거처로 향했다.


하지만 저번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엿처럼 의문이 진득하게 머릿속에 달라붙었다.


왜 연하가 나에게 충성할까. 날 따라서 얻을 특별한 이득도 없을텐데.


'왜 일까.....'


거처로 가는 내내 머리를 굴렸지만, 특별히 생각 나는 것은 없었기에 늘 상 그렇듯 어디 한구석에 치워 놓고 그 일을 지워버렸다.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그 때의 나는 모른 채.


그렇게..... 그렇게.....




--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벌써 후부를 떠나는 날이 되었다.


10여년 동안 지난 세월이 있던 지라 쌓인 짐을 정리하는 게 결코 쉽진 않았지만, 그래도 어찌저찌 모두 정리할 수 있었다.


가볍고 단기간 쓸 수 있는 것들은 챙겨가고, 무겁고 귀중한 것들은 잘 정리해 혼수 창고에 넣었다.


그 열쇠는 연하에게 맡겼다. 나중에 돌아왔을 때 귀중한 것들만 아니라면 물건 몇 개가 사라져도 묻지 않을 생각이었다.


원래 다 그렇게 하며 맡기는 거고.


혼수 창고의 열쇠를 받으러 온 연하는 다른 때보다 더욱 수척해 보였다.


"하 동생, 어디 아픈가?"


"아니에요. 그저 이제 집안일을 제가 맡는단 생각에 걱정돼서 열심히 공부하다 보니 이렇게 됐지 뭐에요. 조금만 쉬면 다시 괜찮아질테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러니? 그러면 피로 회복에 좋은 약재를 보내줄테니 달여먹거라. 친정에서 보낸 거라 효과가 좋을 거야."


연하는 다시금 거절했지만, 이번 실랑이 끝에 굽힌 건 연하였다. 두 눈 가득 고마움을 담아 내게 감사 인사를 올렸다.


"그동안의 수고비라 생각하게. 그게 더 마음이 편할 테니."


"정말 감사합니다, 연 언니."


"그래."


"....... 연 언니."


"왜 그런가, 하 동생?"


"오늘은 일찍 침수에 드세요. 내일 멀리 나가려면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늦게 잠드면 힘드실 테니까요."


"조언 고맙구나. 오늘은 동생의 말을 듣고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겠어."


연하는 희미한 미소를 띠고 제 거처로 돌아갔다. 하지만 나는 그 미소가 왠지 모르게 섬뜩해 흠칫 떨고 말았다.


애써 그걸 지우며 일찍 잠자리에 들어갔지만..... 그 경고를 기억했어야했다.


그렇다면


"마님!"


"으..... 으음? 여.... 연하? 이 시간에 왠 일이니?"


"노마님께서 독살당하셨습니다."


"뭐?"


이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텐데.


전혀 상상도 못한 일에 잠이 확 깨어 일어났다. 한 5초 동안은 꿈이거나 연하가 장난을 치는 걸로 생각했지만, 진지한 눈을 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당장 대문을 걸어잠그고 의원을 부르거라. 혹시 벌써 돌아가신 건 아니지? 어서 가서 문단속을 하렴!"


'그럼 어떻게 되는거지? 돌아가면 상을 치루느라 본가에는 못 갈테고 그럼 계획이 망..... 아니 잠깐만 애초에 시어머니 때문에 내려가는 게 아니었나 그러면 왜 내려갈 필요가 없지 않나?'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초특급 사건에 머리와 입이 핑핑 돌아갔다.


입은 일단 그동안 교육 받은 대로 척척 잘 돌아갔지만, 머리는 혼란 그 자체.


"어서 나가.... 아니 일단 가벼운 채비부터 해야지. 연하야, 어서 도씨 어멈을 불러주렴. 올린 머리라도 하고 빨리 상황을 봐야겠어."


"연 언니, 도씨 어멈은 없어요."


"...... 뭐? 그게 무슨 소리....."


"경악스럽게도 노마님에게 독을 먹인 범인이 도씨 어멈으로 밝혀졌거든요. 그래서 도씨 어멈의 주인인 언니도 조사를 받아야 할 것 같네요.


어서 끌고 가거라."


연하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순식간에 내 방에 사람이 들이닥치더니 내 입과 팔다리를 꽁꽁 싸매고 나를 연행해갔다.


갑작스런 기습 그리고 믿었던 사람의 배신.


난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억센 어멈에게 들어져 후부 구석의 처소로 내던져졌다.


그 처소는 옛날에 한 부인이 친정이 역적 가문으로 몰리고 남편에게도 소박 맞아 비관해 자살했단 소문이 떠도는 곳이었다.


기본적인 가구는 있었지만 결코 청소하는 사람 외엔 아무도 그 근처를 지나가지 않을 정도로 흉흉한 곳.


물론 나는 귀신따윈 믿지 않았기에 소문은 상관 없었지만, 연하가 인적이 드문 이곳에서 벌일 일이 두려웠다.


도씨 어멈의 안위도 너무나도 걱정되었고.


하녀들이 기둥에 단단히 결박시켜 놓은 끈을 풀려 애쓰는 동안, 한 사람이 들어왔다.


배신자 위연하였다.


"언니, 괜찮으신가요? 세상에 이렇게 피부가 까지다니 그 어멈에게 혼을 좀 내야겠네요."


방금까지의 일이 거짓이라는 듯, 연하는 천연덕스럽게 내 상처를 보며 마음 아파한다.


남이 보면 진심으로 언니를 위하는 동생처럼 말이다.


그런 그녀의 연기에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웁! 우우읍!! 우우우웁!!!"


"아! 그러고보니 입마개가 그대로네요. 기다려주세요, 금방 풀어드릴테니까."


입을 봉한 천이 풀렸다.


"위연하, 이게 무슨 짓이야!!! 당장 풀어!!"


"진정하세요, 언니."


"지금 진정하게 생겼니? 어머님이 쓰러지고 도씨 어멈이 그 범인으로 잡혀갔는데.....! 이게 진정할 상황이야?"


"제가 다 설명할게요. 잠깐만 진정하세요."


연하는 내 뺨를 두드리며 나를 달랜다. 지금은 그녀의 그런 행동이 위선적이기 짝이 없었지만, 그래도 혹시 또 모르지. 이게 또 큰 계획일 수도 있잖아.


"...... 설명해봐."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붙이자, 연하는 싱긋 웃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 따라 연하의 얼굴은 마치 그것과 같았다. 아담에게 선악과를 권하는 악마 릴리스를.


"이 모두 제가 언니를 갖기 위해 벌인 일이에요."


"....... 뭐?"


사고가 정지한다.


사람이 제 상식 외 발언을 들으면 당황해 굳는다 하더나.


아마 제가 딱 그런 상태일터다.


경우 외의 상황, 단 한 번도 생각조차 하지 못한 이유.


당황한 것도 분노한 것도 모두 잊혀진 채 나는 멍청하게 연하를 바라본다.


"...... 왜?"


"......."


"도대체 왜?"


"..... 어렸을 적, 언니가 제게 은혜를 배푼 적이 있었죠.


어머니가 화풀이용으로 저를 때려 화원에 앉아 엉엉 울던 날이었어요."


마치 제 먹이를 꽁꽁 싸매는 뱀처럼 천천히 그리고 집요하게 연하의 손이 얽혀든다.


"총애 잃은 첩 따위의 딸. 하녀나 어멈들은 신경 쓰지도 않고 저를 무시했었죠.


비가 와 흠뻑 젖어 덜덜 떨어도 아무도 정말 아무도.....


그러다가 언니가 우산을 제게 씌어주셨죠. 아직도 그때 하셨던 말이 생각나요."


조금씩 기억이 난다. 그때의 비 내리던 후원과 정자 끄트머리에 앉아 덜덜 떨던 한 소녀.


그 날 맡았던 은은한 백합 냄새가 어딘가 풍겨오는 듯 싶었다.


나와 연하의 입이 동시에 열린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도 이리 물을 많이 먹이면 쓰나.""


연하의 얼굴에 점점 웃음꽃이 피더니 이윽고 여름의 해당화처럼 만개한다.


"기억하고 계셨군요!"


"그 날의 일을 어찌 잊겠더냐."


"아, 언니! 언니!"


연하는 감격해하며 자신에게 안기며 얼굴을 문댄다. 


연하의 눈은 별빛을 닮았구나. 안기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언니. 항상 언니 만을 사모하고 원했어요. 


망할 후야 따위 없었다면 친정에서 언니와 함께 행복할 수 있었는데.....


그래도 이렇게 함께할 수 있으니, 너무 기뻐요."


별다른 긍정의 기색조차 없었건만, 그저 그 때의 추억을 떠올려 준 것만으로 이리 기뻐할까.


흥분으로 붉게 물든 연하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진다.


잠깐 너무 가까워!


"연하야 멈....!"


"사랑해요 언니"



입술이 닿는다.


그리고 열리며 혀가 들어온다.


"웃.... 후웃.... 흣...."


"츗.... 후으...... 츄읍..."


이번 생 첫 번째 입맞춤 그리고 키스.


어머니에게도 결혼한 남편에게도 절대 허락해 주지 않은 입술의 순결이 너무나 간단히도 사라졌다.


하지만 그것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계속 치고 들어오는 연하의 혀.


입술로 수줍게 인사하며 치열을 두드려 들어가 내 혀를 얽맨다.


그와 함께 서서히 내려가 내 허벅지를 어루만지는 그녀의 손.


마치 먹잇감을 사냥하는 뱀처럼, 나를 꽁꽁 싸매 탐한다.


너무나도 가쁘게 몰아치는 그녀의 사랑이 버겁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내 입을 탐하며 불어넣는 숨이, 너무 버겁다.


"읏... 하읏.... 훗.... 수움.... 아흣.... 숨 막혓...."


결국 내가 키스 중에 힘들게 입을 열어 숨이 막힌다 하자, 떨어지는 그녀다. 마지막까지 내 입을 헤집어 놓는 건 덤이고.


가쁘게 몰아쉬는 우리 둘 사이로 은빛 실이 늘어진다.


어두운 방, 닫힌 문 그리고 흥분한 여자 둘.


아까의 저항으로 내 상의는 반쯤 풀려 어께와 가슴골을 보여주고, 허리께에 좀며진 치마는 내려가 뽀얀 속살을 보여준다.


연하도 잔뜩 움직인 탓에 옷의 매듭이 풀려 헐렁해 조금씩 속살을 노출하고, 하얀 옷이 땀에 젖어 핑크빛이 은근 비쳤다.


"......."


"......."


연하나 나나 아무 말도 없었다. 아니, 할 필요가 없었다.


일심동체, 이심전심. 앞으로 할 행동을 굳이 말 하지 않아도 둘 다 알기에.


스윽


연하가 제 치마를 들어 올린다. 적당히 매끈한 허벅지 위로 그녀의 잔뜩 젖은 꽃잎이 보였다.


새하얀 속살 가운데 수줍게 피어난 분홍 꽃 한 송이. 그 것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저도 모르게 그 꽃에게 가볍게 입맞춤 한다.


츗-


"하읏...."


간드러지는 연하의 교성이 피어나며 꽃이 더욱 촉촉하게 젖어 들어갔다.


아름다운 여자를 만족했다는 만족감. 어언 26년 내내 짓밟힌 남자로서의 자존심이 다시 생겨나며 오기가 생긴다.


'너만큼은 내가 만족시켜줄게.'


비록 손 발이 모두 봉해지고 허리도 기둥에 꽉 묶인 신세라지만, 입은 자유로운 만큼 봉사엔 문제가 없었다.


하음


"웃...?!"


오동통하게 솟은 음핵을 삼킨다. 비록 그 크기가 크지 않아 겨우 혀에 닿는 정도지만, 이미 연하는 자지러지듯 교성을 내지른다.


"하웃.... 흐응.... 후웃.....♡"


쯋 쮸읏


혀로 부드럽게 음핵을 쓰다듬다가도 강하게 빨아들이자, 더 큰 자극에 연하는 어쩌지 못하며 쓰러진다.


"앙.... 연연..... 흣.... 가.... 가앗....!"


푸슛


제 이름을 부르고 꽃잎을 벌름거리며 조수를 쏟아내는 게..... 진짜 정말이지 너무나도 유혹적이다.


마음 같아선 그 안 쪽의 속살까지 모두 탐하고 싶지만, 연하가 절정해 쓰러진 여기서 멈추는 수밖에.


"하아..... 하아.... 너무 좋아.... 하아... 


연하는 숨을 몰아쉬며 벌개진 뺨으로 침을 줄줄 흘린다.


그러면서 잔뜩 풀린 눈으로 하트를 띄우며 내 하체에 납작 엎드리자, 나는 그녀의 뜻을 알 수 있었다.


다리를 벌리자마자 곧장 파고도는 그녀의 얼굴. 치마를 걷추자 그녀의 뜨거운 숨결이 비부에 닿는다.


간질간질하면서 오그라들 것 같은 감각. 연하의 야한 숨이 닿을 때마다 발가락이 오므라들며 교성을 지를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적어도 연하보단 먼저 가면 안 된다. 마지막 자존심의 보루였다.


"이제..... 시작할게요."


쮸읍


"웃.... 흐엣?!"


자.... 잠깐! 이건 반칙이잖아....! 이렇게 기분 좋을 줄 몰랐느은...... 으흣 데에....


쮸웃 쮸우웃


"앗.... 흣.... 헷.... 하앗.... 후웃...?! 아앗.... 갓.... 가버려어....♡"


푸슛


숨결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연하의 혀가 내 안으로 들어오자 안쪽을 유려하게 자극시키는 게 정말이지 너무나도 기분 좋아서 그만 절정하고 말았다.


허벅지와 발끝을 덜덜 떨며 연하의 몸을 감싼다. 남자의 절정과 달리 여자의 절정은 점차적으로 퍼져가는 느낌이라 만약 연하가 없었다면 당장 바닥에 비부를 부볐을 터.


처음으로 맛보는 절정에 반쯤 정신이 나간 나를 연하는 쉴새없이 계속 탐한다.


"너무 하음..... 후웃..... 야해요 언니..."


"웃.... 후웃.... 힛?! 너뮤우..... 쟈... 흐응... 극적 이햐아....♡"


그 때문에 첫 번째 절정을 갈무리할 새 없이 벌써 두 번째 오르가즘의 전조를 느낀다.


잦아들 틈 없이 더욱 떨리는 허리. 그리고 절정 하려는 찰나


꾸욱


"홋?!!"


g스팟을 누르는 그녀의 혀.


잔물결이 밀려오다 빠져나가고


"엣.... 흐에..... 옷... 홋♡ 후웃?! 아히에엑♡?!!!"


푸슛 푸슈웃 푸슛


큰 해일이 덮친다.


얼굴근육이 주체할 수 없이 풀어지고 눈 앞이 핑핑 돈다. 절정의 여파로 입은 교성을 가득 지르며 침을 줄줄 흘린다.


조수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잔뜩 쏟아져 연하의 얼굴을 적시고, 손 발은 묶여있음에도 간헐적으로 덜덜 떨었다.


그 이전까지의 경험이 모두 부정 당하는 느낌.


무엇을 하든 그 이상이고 너무나도 만족스럽다.


아....


'인생의 절반 손해 봤어엇.....'


이 대사를 내가 칠 줄이야. 




--




그러고는 다시 키스하고 서로 사랑을 고백했다.


이미 지쳤기에 몸을 섞진 않았지만, 대신 서로를 밀착시켜 꼭 붙어있었다.


 연하는 내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반쯤 누워있는 자세로.


나도 연하에게 몸을 기대고 싶었지만, 기둥에 얼마나 세게 묶어놨는지 상체를 움직이지도 못해 그냥 포기하고 기둥에 몸을 기댔다.


너무 불편한데, 이 정도면 슬슬 풀어줄 때가 아닌가?


조심스럽게 연하에게 말을 꺼낸다. 당연히 그녀가 날 풀어주리라 생각하며.


"연하야...."


"왜, 연연? 어디 아픈 데 있어?"


"아, 그건 아니고 혹시 결박 좀 풀어줄 수 있어? 어멈들이 너무 바짝 묶어서 꼼짝도 할 수 없네."


그녀의 맘을 살살 녹이기 위해 마치 앙탈을 부리듯 연하에게 투덜거린다. 평소라면 고압적으로 명령을 내렸을테지만, 지금 상황에서 절대적인 갑은 연하. 되도록 그녀의 심기를 거슬리지 않는 게 좋았다.


하지만 연하는 아무 말 없이 계속 내 가슴에 머리를 기댈 뿐이다.


"연하....?"


말 없는 그녀가 불안하다. 설마 이대로 날 계속 묶을 작정인가?


"우리 서로 사랑하는 사이잖아, 응? 내가 도망칠 것도 아닌데 이 정도는 풀어줄 수...."


"연연, 조용."


연하가 내 입에 손가락을 갖다댄다. 무슨 마법이 걸린 것도 아니지만, 입은 바로 다물린다.


내가 조용해지자 연하는 잘했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는다. 


뭔가, 뭔가가 이상했다. 이런 건 연인끼리 하는 행동이 아니다.


"당연히 연연이 내 옆을 떠나지 않으리란 건 알아, 나를 사랑한다는 것도."


그럼 대체 왜? 눈빛으로 물어본다.


"그렇지만 그 지난 세월 동안 받은 상처가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 내가 연연의 곁에 있으면서,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았는데."


무슨 말이지?


"분명 결혼하지 않고 가주가 된다 했을 때, 내 상의도 없이 날 시집 보내려 했었잖아."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뭐 다행히 술수를 써서 위 가(家)에 남을 수 있었지만..... 그 후에는 약속을 어기고 시집을 가버렸잖아.


감히. 내가 아닌. 다른 남자와."


"그건 나도 원치 않았던 혼인이야! 너도 잘 알잖아, 후야가 제 멋대로 집어넣은 혼....!"


"후야? 내 앞에서도 그 놈을 그렇게 부르는 거야? 아주 애칭으로 부르지 그래?"


연하가 강한 악력으로 내 턱을 붙잡았다. 마치 한 번 만이라도 더 죽은 남편을 부른다면 당장이라도 으스러트릴 것처럼.


하지만 억울하다. 원치 않은 혼담이었고, 원치 않은 결혼이었다. 그렇기에 잉첩을 데려가고 시침을 들지 않은 거였지.


게다가 이런 내 마음을 가장 가까이서 본 연하가 제일 잘 알텐데.


그런데도 왜? 왜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거야?


"다시는 내 앞에서 망할 놈 이야기 꺼내지 마. 그렇지 않으면 그 도씨 어멈 바로 죽여버릴 테니까."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서늘한 어조. 귀에서부터 자르르한 소름이 올라와 나도 모르게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순순히 받아들이자 연하의 표정이 풀린다. 그러곤 다시 잘 했다는 듯,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상처 받은 지 알겠지? 그러니까 이건 나에 대한 연연의 속죄야, 알겠지?


그 세월 동안의 업보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잖아."


궤변. 이건 궤변이다.


반박하려면 충분히 할 수 있다. 그 일들은 모두 연하가 가진 감정을 몰랐을 때였고, 제 의지로 일어난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소중한 이의 목숨이 달려있다면


'도씨 어멈.....'


상황은 달라진다.


시어머니를 독살한 혐의로 끌려간 터. 굳이 관아로 가지 않아도 가법 선에서 죽는 목숨이었다.


도씨 어멈을 죽일 사람도 연하였고, 살릴 사람도 연하였다.


그러면 굽힐 수 밖에.


"응 맞아. 연하 말이 맞아."


연하가 만족스런 웃음을 지으며 짧게 볼키스한다.


그래 이 정도는 견딜 수 있어. 이 정도는......




--




영평후부의 사랑채는 특이한 구조였다.


다른 권세가들의 사랑채는 보통 대문과 가깝고 안채와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영평후부의 사랑채는 대문보다 안채와 가까운, 안채와 바깥채를 이어주는 문 바로 앞에 놓여있었다.


그러면서도 구석에 방 하나를 만들어 벽과 발로 가려 놓은 것이 안채의 여인이 들어와도 문제가 없게 만들었고.


왜 사랑채가 이런 구조인지는 수수께끼였지만, 적어도 영평후부의 여인들은 이 독특한 구조의 사랑채를 유용하게 써먹었다.


그 예로, 지금 위연하가 제 친정 오라비를 만날 때처럼.


위 가(家)의 가주이자 의붓오라비 위소운(衛蘇韻)은 바깥 탁자에, 위연하는 안쪽 방에 앉아 발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하는 구도였다.


"네 말대로 전달했다. 이제 위연연은 본가로 내려간 사람이다."


"감사합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의 호의를 잊지 않을게요.


취아, 올케에게 줄 선물을 가져오거라."


마지막은 시종에게 한 말이었다. 시종이 방을 나가자, 위소운은 두리번거리더니 작은 소리로 속삭인다.


"네가 말한 약은 언제 준비가 되더냐? 어머님께서 슬슬 상황을 눈치 채고 계신다."


잔뜩 긴장했는지 떨리는 손과 흔들리는 동공 그리고 떨어지는 식은땀까지. 위연하는 그런 위소운의 겁쟁이 모습을 속으로 비웃었다.


'중풍으로 쓰러진 양모 하나 처리 못해서야. 아버지는 왜 이런 사람을 양자로 들이셨담.'


하지만 어찌 됐든 한 배를 탄 이였기에, 입도 벙긋 않고 씩 웃을 뿐이다.


"상자에 올카와 조카를 위한 약을 넣어 놓았어요. 잘게 부수고 음식에 조금씩 섞어 넣으면 알아 차리지 못할 거에요."


때마침 시종이 상자를 가져왔다. 상자를 열자, 그 안에 녹색 환단 10개가 있었다.


환단을 보자 위소운의 표정이 눈에 띄도록 밝아지더니, 서둘러 상자를 챙겨 나갔다.


위연하는 그런 위소운을 못 본 척, 풍경을 바라보며 차를 들이켰다.


이제 자신을 막는 장애물은 모두 사라진다.


저를 핍박하던 적모는 친모를 구슬려 독을 먹여 처리했다. 친모는 독살로 이미 죽었고, 적모는 이제 다신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가장 거슬렸고 최대의 적이었던 영평후는 자신의 손으로 끝장냈다. 멍청한 놈, 연연에게 푹 빠져 제 턱 끝에 겨눠진 칼도 못 보다니.


직접 목숨을 거두고 제 나름의 분풀이를 했지만, 여전히 그를 떠올릴 때마다 화가 났다.


그 자식만 없었다면, 원치 않던 잉첩 노릇도 연연이 남의 아내로 시집가는 모습도 보지 않았을텐데.


위연하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는다.


모두 연연이 절조 없이 남자를 꼬셔셔 그런거야. 연연은 나만의 것인데, 나만의 연인이 되야 하는데.


규수 시절에도 그랬어. 자신은 결혼 생각이 없다 해놓고 수많은 공자들을 꼬셔댔잖아. 그러다 결국 영평후에게 코 꿰여버렸고.


연연이 나쁜 거야. 전부 연연이 잘못 한거야.


그러니까 내가 연연을 가둬 놓은 건 옳아.


문득 코 끝에 그 날의 향기가 스쳐지나간다.


젖은 흙 냄새와 진한 백합 냄새.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아름다운 여인의 향취를.


"오늘 잡상인이 온다 했지."


"네, 이랑."


"온다면 바로 들이거라. 진귀한 서역의 물품을 좀 사야겠어."


"알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위연하는 몸을 일으켜 익숙한 길을 걸어갔다.


자신만의 새장과 연결된 아주 은밀하고도 비밀스러운 길을.


아 오늘은 연연에게 무엇을 할까. 이번 잡상인이 오면 쓸 만한 것이 있을까.


저번에 산 진동기는 꽤나 유용하던데 이번에도 그런 게 있었으면 좋겠네.


어느새 자신의 새장 앞에 도착했다. 여러 잠금장치로 묶인 문은 그 안에 들은 것의 귀중함을 보여준다.


철컥- 철컥-


"......!"


자물쇠를 풀어나갈 때마다 안 쪽에서 여자의 비명 소리가 들려온다. 마치 그것이 저를 반겨주는 세레나데 같아 위연하는 그만 미소를 지었다.


마침내 장치를 풀고 문을 열자,


위이이잉-


"웁! 후읍....! 훗.... 흐앙..... 후굿?!"


진동기를 매단 여인이 자지러지며 조수를 내뿜는다. 이미 수십 번 절정을 맞이한 듯 옷과 바닥 모두 여자의 향기가 듬뿍 묻어있었다.


아, 내 귀여운 연연. 나를 착실히 기다리고 있었구나.


이곳은 그녀만의 자그마한 천국. 작은 종달새가 묶인 곳이다.


앞으로 그녀의 새는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 줄 것이다. 오직 그녀만을 위해서,


어쩌면 영원히.






연모(恋慕 : 연을 탐하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