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발판은 시우가 마련해주었으니, 이다음부터는 내가 해야 했다.

 

연락할 수단도 생겼고, 지낼 공간도 생겼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첫 번째로 자립심을 키우는 것이었다. 아니, 그럴 마음은 있으니까, 행동으로 옮기면 되려나?

 

아무튼 신분 없이도 이 세상을 꿋꿋이 살아갈 수 있음을 증명해야 했다.

 

…이건 증명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불법 체류자들과 다를 바 없는 신세에 조금 침울해질 때가 있다. 긍정적인 사고를 하려고 해도 역시나 금세 주눅 들고 말았다.

 

그보다 이전에 대뜸 내게 연애 상담을 해온 화인이 조금 신경 쓰였다.

 

다들 시우랑 뭐 있어 주변에 있는 거겠지만… 설마 전부 다 좋아하는 걸까? 아니, 여자들의 생각은 알 도리가 없지. 애초, 여자가 있는 걸 알아도 주변을 맴도는 여자가 있기도 하다던데.

 

“끄응.”

 

시우 여자를 내가 신경 써서 뭘 할까. 나는 나 할 일부터 제대로 해도 모자랄 판국에.

 

“그나저나, 아르바이트 요즘 다 4시간씩밖에 안 구하네.”

 

폰을 빤히 바라보았다. 눈살을 찌푸리고 다시 한번 보아도 하루 종일 구인하는 건 찾기가 어려웠다. 사람이 많은 시간대나 슬쩍 구하고, 사람이 뜸할 땐 그냥 돌려보내는 게 슬슬 유행처럼 퍼졌다.

 

어쩔 수 없이 시급보다 더 쳐주는 곳을 찾는 수밖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여자인 모습이라 괜찮은 환영을 받아서 다행이었다. 가끔 여자만 구하는 홀 아르바이트도 훑어볼 수 있는 게 장점이라면 장점이다.

 

만 오천짜리 시급이 다섯 시간? 이건 못 참지.

 

오늘도 일일 알바다. 그래도 점심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돈을 벌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만족이었다. 서울은 하루만 일해도 되는 곳이 널려 있으니까 다행이었다.

 

폰을 쥐고 거리를 걷던 도중 무언가 작게 울렸다.

 

폰의 진동인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다.

 

“…바닥?”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내 폰이 막 울어댔다.

 

애애애애앵!!

 

귀를 때리는 소음에 깜짝 놀란 나는 어떻게든 폰을 끄려고 했다. 진동만 울리게 해놨는데 왜 갑자기 소리가 나는지는 화면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긴급 문자?

 

애애애애앵!

애애애앵!

애애애애애애앵!!

 

두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폰이 생긴 뒤로 맞이하는 첫 괴수 출현.

 

사람들은 이미 다 대피소가 있는 곳으로 바삐 움직였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따라 주변을 홱홱 둘러보았다.

 

어디로 가는 거지?

 

“이쪽으로!”

 

“엄마 손 꼭 잡아!”

 

소란이 일었다. 지하로 가는 사람이 보이고, 건물 내부로 들어가는 사람 또한 보였다. 어디로 가야 할지 망설이던 찰나 순식간에 사람들은 자리를 피하고 도망갔다.

 

다들 아는 사람이었는지 서로가 서로를 위해 대피소를 가리키고 도망갔다.

 

내가 잠들어 있던 사이에 대한민국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전에도 보긴 했지만, 안전불감증 타이틀을 얻었던 그 대한민국이 맞나 아리송해졌다.

 

웬만한 충격 아니면 이런 문자는 집에서 딸랑 받고 말 텐데, 혼비백산 도망가는 모습이 눈에 선명히 남는다.

 

문제는 그들끼리 다 도망가고, 얼이 빠져 멍하니 서 있던 나만 홀로 도로에 남았단 점이었다.

 

도로 위의 자동차는 속력을 올리거나 자동차마저 버리고 도망가는데, 그 모습에 시선을 빼앗겨 도망가야 한다는 사실조차 망각하고 있었다. 서로 손을 잡아끌고 도망가는 와중에 내게는 아무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도움을 바라기만 하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말 한 번 해주면 어디 덧나나.

 

“끄응.”

 

투덜거리며 걸음을 옮기던 찰나, 미처 도망가지 못한 꼬마애 하나가 두리번거리며 거리로 나왔다. 어디 골목 쪽에라도 있었는지 당황한 모습이 역력했다.

 

사람이 전부 사라진 듯한 세상 속에서 꼬마 남자애와 둘만 남은 기분이 들었다.

 

“―누나!”

 

눈을 크게 떴다.

 

나를 향해 울먹이며 다가오는 꼬마애. 내가 누군 줄 알고 그렇게 친근하게 부르며 달려온단 말인가.

 

당황한 눈으로 움찔 떨었지만, 꼬마는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홱홱 돌렸다.

 

“저, 저 어디로 가야 해요? 다 사라져 버려서…”

 

대체 뭘 하고 있었길래 아무도 이 꼬맹이를 데려가지 않았단 말인가. 각자 알아서 도망간 건지, 아니면 저들끼리 챙기느라 놓친 건지. 어느 쪽이든 간에 조금 안타까운 녀석이었다.

 

아쉽게도 난 이런 알림을 받고 제대로 도망친 적이 없었다.

 

이전에는 설하란 사람이 와서 물리쳐 주는 덕에, 다른 사람들과 같이 도망가던 도중에 물리치는 광경을 마주하고 말았다. 이번이 두 번짼데, 이번에는 진풍경이랍시고 멍때리고 보다가 낙오되어 이 꼴이었다.

 

“…미안한데 나도 못 도망쳤어.”

 

땀을 삐질 흘리자, 꼬맹이는 이상하단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누나 마법소녀 아냐…? 막 변신해서 괴수들이랑 싸우는 거.”

 

“그런 거 아냐.”

 

머리카락 색깔 때문에 이곳저곳에서 질문 세례가 날아오는 건 언제나 꺼려지는 일이었다. 마법소녀로 오해받는 일은 종종 있는 일인지라 그렇게 새삼스럽진 않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런 질문을 받는 건 또 다른 일이었다.

 

마법소녀 같은 힘이 있었으면 혹시 모르지.

 

“…엥?”

 

내 말에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을 지었다. 꼬맹이와 말을 길게 이어봤자 시간만 끌린단 걸 깨달은 난 곧바로 방향을 돌렸다.

 

“어, 어디 가?”

 

“도망.”

 

“정말 마법소녀 아니야? 그냥 염색이야?”

 

왜 이렇게 시끄러운지 모르겠다. 들을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었지만, 반대로 사람들이 너무 없어서 그런지 세상에 울리는 느낌도 없잖아 든다.

 

못 들은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진땀을 흘렸다.

 

이런 몸으로 대체 뭘 하라는 거야?

 

설하가 말도 안 되는 힘으로 거대한 포를 쏘고, 망치를 휘두르는 꼴을 보고 있으면 저게 같은 사람인가 의구심을 자아낼 정도였다. 한데, 반대로 난 당장 홀 아르바이트로도 팔과 다리에 근육통을 맞이한다.

 

이런 게 마법소녀일 수는 없는 거다.

 

이런 게.

 

“조용히 하고, 가자.”

 

사실 내가 챙겨야 할 녀석은 아니다. 그래도 혼자 버려두는 것보단 누가 하나 챙겨주는 게 나을 것이다. 그래도 꿈자리가 뒤숭숭하지 않으려면 이게 최선이었다.

 

“저기로 가면 되는데…”

 

가까운 대피소로 갔더니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전문적으로 지은 건지 엄청난 철벽이 건물을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 세우고 있었다. 잠깐만 열어달라고도 하지 못하게 굳센 철로 아예 밖을 막아버렸으니, 어째야 하나 진땀을 뺐다.

 

지하철로 가면 되나?

 

그렇게 생각하며 급히 자리를 옮겼지만,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철망 같은 것도 아니고, 완전히 문을 틀어막는 철문을 가져다 박다니, 새삼스레 대단하단 생각도 들었다.

 

문제는 이렇게 되면 어디다 말하기도 뭣하고, 들어가게 해달라고 외칠 수도 없단 거였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괴수가 이쪽으로 오지 않길 바라면 되는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은 했지만… 아쉽게도 계단을 올라오자마자 그 거구가 눈에 보이고 말았다. 저 대로 끝부분부터 보이는 거구의 괴수가 자동차를 발로 으깨며 걸어오는 게 보였다.

 

입에 천둥을 머금고, 불꽃을 내뿜어 주변 고층 건물 윗부분을 그을렸다. 색깔이 순식간에 검게 변해버린 꼴을 보고 있자니 탄식이 나올 정도의 위압감이 전해져왔다.

 

“아, 이쪽으로 오는 거 같은데…”

 

“어떡해요?”

 

SNS에 따로 가입한 게 없다 보니 급하게 근처 쉘터 문 열어줄 사람 구하는 것도 어려웠다. 결국, 방향을 틀어 괴수의 피해를 받지 않도록 하는 게 우선이었다.

 

“뭘 어떡해. 빨리 움직여야지!”

 

“으아. 정말 마법소녀 아니에요?!”

 

“아니라니까!”

 

어차피 멀리서 오는 거기도 하고, 이곳으로 오는 동안 다른 곳으로 도망가 시간을 끌면 설하나 화인, 혹은 유나까지 해서 괴수를 물리치러 와줄 것이다.

 

그렇게 믿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꼬맹이의 보폭에 맞춰 달렸다. 원래 신체였더라면 이런 꼬맹이쯤은 안고 뛰는 게 가능했을 텐데, 지금은 조금 빨리 달리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드는 순간 나도 숨이 차서 얼마 못 달릴 테지.

 

“…언제 오는 거야.”

 

땀을 삐질 흘리며 고개를 홱 돌렸다. 건물 뒤로 넘어간 탓에 괴수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저 멀리서 빌딩과 부딪쳤는지 쿵 울리는 소리와 유리창이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지는 소리가 귀에 선명히 박혔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진다.

 

상황을 지켜보려고 멍하니 서 있었던 다리는 다시금 시동을 걸듯 움직였다.

 

“저거, 저거 왜 이쪽으로 오는데?!”

 

“으아아아!”

 

꼬맹이는 잠시 숨을 돌렸는지 눈을 질끈 감고 다시 달려 나갔다.

 

그 모습을 보고 다시 돌아보니, 괴수와 눈이 마주친 느낌이었다. 마치 목적은 나라는 듯이 굴었다.

 

뭔가 있는 건가…?

 

꼬맹이의 등을 돌아보았다. 저쪽으로 가면 다시 저쪽으로 올 것 같아서 다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방향을 홱 틀어버린 난 괴수가 어느 쪽을 바라보는지 확인하며 걸음을 쟀다.

 

어차피 중간엔 괴수 크기만 한 빌딩들이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잠깐씩은 멈춰도 된다.

 

“…나한테 오는 게 맞네.”

 

꼬맹이는 완전히 다른 쪽으로 갔다. 그렇다면 이쪽은 최대한 피해가 덜 나오도록 움직일 뿐이었다.

 

사람들이 건물 안으로 대피한 걸 생각하면 다시 대로변으로 나가는 게 그나마 피해를 덜 줄 텐데…

 

“에라.”

 

결국 다시금 골목을 빠져나갔다. 떨리는 숨을 꾹 참으며 교차로가 있는 곳으로 달렸다. 모든 신호가 붉게 물들어 버린 세상 한가운데로 나가, 괴수를 마주했다.

 

멈추어 버린 신호.

 

멈추어 버린 도로.

 

멈추어 버린 자동차들.

 

그 사이를 비집고 나가 도로의 가장 한가운데로 도망갔다. 가운데를 가르는 중앙선을 밟고 열심히 달렸다.

 

보폭의 차이 때문에 점점 좁아지는 게 느껴졌다. 차들이 프레스기에 눌린 듯 압축되고, 괴물의 발아래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폭발음마저도 죽이는 육중함은 괴수의 무서움을 알리는 듯했다.

 

“…헉, 허억.”

 

이런 몸이 되고 나서 이렇게까지 뛰어본 적이 있던가.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눈앞이 흐려질 정도로, 더워서 온몸을 땀으로 적실 정도로 힘이 들었다.

 

마법소녀는 대체 언제 오는 거지. 설하든, 화인이든, 유나든. 시우 근처에 있는 마법소녀 말고도 다른 것들이 있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무작정 발을 굴렀다.

 

그리고 그 바람이 이루어지듯, 너무 힘이 들어 발이 멈추었을 때 타이밍 좋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어서 도망가!”

 

양손에 건틀릿을 쥔 화인이 주먹을 맞부딪히며 걸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