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광반조 10장 보러가기


다행히도 연희는 원래 바라던 대학보다는 한참 낮지만 그래도 서울의 4년제 대학교는 갈 수 있었다. 반 년 동안 쉰 것에 비하면 기적이랄 수 밖에. 문제는 등록금이었다.


명자가 입버릇처럼 두 남매에게 했던 말이 있었다.

"우리는 둘 다 대학 보낼 만큼 형편이 좋지 않아. 봐서 영 아니다 싶은 놈부터 걸러낼 거야."


아무리 그 시대 엄마들 같지 않게 아들딸 차별 없이 길렀다지만, 그래도 머리에 박힌 통념상 아들은 그래도 대학은 나와야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었고, 딸은 아무리 좋은 대학을 나와서 좋은 기업에 취직을 한다고 해도 시집 가면 그만이었다. 당시 사회 통념상으로 시집을 가는 여자는 사실상 경력이 단절될 수 밖에 없었으니. 둘 다 보내면 좋겠지만 형편상 등록금은 한 명에게만 허락된다.


연희가 학력고사를 잘 봤으면 하고 기도는 했지만 막상 대학에 원서를 넣는다고 하니, 등록금 문제가 생각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막상 너는 딸이니 네 동생에게 양보하라고 하기엔 연희는 부부에게 너무 아픈 손가락이었다. 명자의 이 속사정은 훗날 연희가 엄마가 된 후에나 털어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대입 합격자 발표 당일. 어제 저녁부터 온 눈이 오늘 아침에도 내리고 있었다.


"엄마, 나 다녀올게."

"그래. 어제부터 계속 눈 와서 길이 미끄러울 테니까 조심히 다녀와."

"응."


미선이와 같은 학교에 지원했다. 미선이는 원래 연고대 갈 실력은 됐지만 작년에 집이 폭삭 망해버린 관계로 어려운 집안 살림을 생각해서 전액 장학금을 받는 쪽으로 간 것이다. 우리 연희도 전액 장학금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니지. 그래도 병 중에 대학 갈 성적이 나온 것만도 다행으로 여기자.






눈이 와서 그런가. 유독 오지 않는 연희가 걱정되기 시작한다.


"미선 엄마!"

"응. 무슨 일이야?"

"미선이 집에 왔어?"

"아직. 안 그래도 연희는 왔는가 물어보려고 나도 나갈 참이었는데, 연희도 안 왔나 보네."

"음... 우리가 차 몰고 학교 쪽으로 가볼래?"

"그래. 미선 아버지! 운전 좀 해야겠어!"


사근고개 넘어가는 길부터 한양대에 아이를 데려다주러 온 학부모들 차로 꽉 막혀 시내버스조차 후진해야 했다.


"오라이! 오라이!"


일대 교통이 마비되어 경찰관들이 모두 큰 길로 나간 바람에 사근고개 쪽은 동네 사람들이 교통정리를 해야 했다.


"이러니까 아직도 못 왔지. 아니, 동네에서 나가는 길을 이렇게 막으면 어쩌자는 거야? 지들 자식만 자식이야?"


초조함이 짜증 섞인 말투와 표정으로 나온다. 길가에 쌓여 검은 흙탕물이 잔뜩 묻은 눈더미가 눈에 거슬렸다.


"이래서 난 겨울이 싫어."

"난 좋아. 나는 나이가 이렇게 먹어도 하얀 눈 내리는 날이 좋더라. 그럼 연희 엄마는 여름이 좋아?"

"여름이 낫지. 겨울은 춥기만 춥고 길은 다 얼어붙고..."

"여름에는 물난리 나고."

"... 겨울이 낫다."


고갯길을 겨우 빠져나와 교외 방향으로 달린다. 답답한 마음에 손잡이를 돌려 차창을 연다.


"안 추워?"

"갑갑해서 그래. 갑갑해서."

"연희 엄마. 풍경을 좀 봐."


'이렇게 먼 곳으로 어떻게 다닌담.'


차에서 내려 대운동장으로 들어가니, 학생들이 우글우글했다. 합격자 명단 대자보를 붙인 곳으로 가던 중에 한 부자가 명자의 시선을 잡는다.


한껏 풀이 죽어 아버지가 탄 용달차로 돌아가는 학생. 차 안에 탄 학생이 아버지에게 어떤 말을 전하자 아버지의 눈꺼풀이 내려간다. 아들의 등을 토닥이며 시동을 걸고 핸들을 돌려 운동장 밖으로 빠져나간다.


"연희 엄마! 뭐해! 여기야!"

"어, 가."


연희의 수험번호를 손수 메모지에 적어왔다. 대자보에 써진 숫자들과 메모지에 써진 숫자를 대조해 본다.




없다. 등록금 걱정은 했지만, 막상 떨어졌다고 하니 기분이 미묘했다. 병 중에도 공부하던 딸의 모습이 생각난다. 그래. 대원이 줄 등록금 굳었다 생각하자.


그리고 고개를 돌려 연희를 찾았다.

"미선 엄마! 애들 봤어?"

"아니! 길이 엇갈렸나 봐! 연희 붙었어?"

"잘 안 들려! 차로 가자!"


"아이고~ 헛수고했습니다~ 돌아갑시다. 아, 여보, 가는 길에 뭐 먹을까? 연희 엄마, 어때요?"

"그냥 갑시다."


두 사람은 명자의 표정에서 연희가 떨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연희가 집에 도착하기나 했을까?"

"미선이가 같이 있을 텐데 무슨 걱정이예요."


차는 벌써 한양대학교 앞을 지난다. 바로 앞 신호에서 우회전을 하면 사근고개 입구다. 사근동이 가까워지자 집에 가서 축 쳐진 딸의 얼굴을 볼 생각을 하게 된다. 얼굴을 보면 위로를 해줘야 할까, 아무 말도 하지 말까, 혼을 내야 할까.


한양대 앞은 아직도 차가 막힌다.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생각할 시간을 벌어서 다행이다. 그래서 차가 막혀도 짜증이 나지 않는다.






"미선아, 저거 너네 집 차 아니야?"

"어? 왜 저기 있지?"

"어차피 길도 막히는데 여기서 내리자. 아저씨! 여기서 내릴게요!"






똑, 똑ー


누군가 차창을 두들긴다. 연희가 차창 밖으로 서있다.

창문을 열고 연희를 바라본다.


"너, 떨어졌더라..."

연희 얼굴을 보니 갑자기 눈물이 올라 얼굴을 떨군다.


"어? 나 붙었는데?"

"응?"



오랫동안 연재를 쉬었습니다. 이제 연재를 안 하려보다 하셨을 수 있겠는데, 앞으로는 더욱 성실하게 연재를 할 생각입니다.


지난 19일에 이 소설의 배경인 서울특별시 성동구 사근동에서 최근 유행 중인 코로나바이러스 확진자가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모쪼록 사근동 주민 여러분께서 건강하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