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소설이란 매체(혹은 표현형태)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가는 걸 느낀다.

 <소설>이라는 미약하다는 것. <게임>이나 <만화>같은 이야기에 비해 너무나 초라하다는 것. 

 어찌보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오랫동안 외면해왔던 사실을 이제야 직면해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가 뭔데 그런 감상을 가지느냐" 라고 묻는다면, 그야 나는 무슨무슨 작가도, 작가지망생도 되지 못하는 애매한 존재이지만..


 그래도 한 때는 소설예술이 살아가는 이유였던 시기도 있었다.


 대학을 졸업할 즈음이었다.

 실패한 연애에, 미뤄뒀던 가정문제에(나의 부모님은 존경하기 힘든 사람이다), 졸업 후에 생각해뒀던 진로계획도 망가진 끝에, 나는 거의 폐인처럼 되었다. 정말 언제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처럼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던 중에 유일하게 나를 지탱해주었던 게 부전공으로 신청했던 국문학과 수업이었다. 그 안에 있던 문예창작수업.

 그 반 년 정도 되는 시간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의미있는 일>이 소설쓰기였다.

 망가진 머리로는 글자도 잘 읽을 수가 없어서, 공책에 필사를 해가며 읽어야 했다.

 하지만 결국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은 한 번 내 목숨을 구했다. 그 안에서 '환상이 없이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순문학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나는 아마 목을 매달았을 것이다. 그때 나는 내 주위의 현실을 (비로소) 증오하고 있었으니까.


 그 후로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들은 내 목표지점이었다.

 저런 소설을 쓰고 싶다. 저런 현실적인 아름다움을 쓰고 싶다. 작가가 살아있다면, 칭찬해 주는 있는 글을 쓰고 싶다.

 그렇게 (내 기억이 맞다면) 2년 정도를 졸업도 미뤄둔 채 짐승처럼 지냈다. 자취방 안에서만 지내다가 돈이 떨어지면 일하고, 돈이 떨어지면 일하고 그런 식이었다.

 그러다 어찌저찌 일자리를 얻어 몇 학기를 넘겨가며 졸업은 했지만, 인생은 많이 틀어진 상태였다ㅡ 정확히 말하자면 원래의 망가진 스스로를 되찾은 셈이었다.

 아마 그 상태 그대로 졸업하고 학벌과 성적을 바탕으로 성공적인 취업을 했다면, 나는 지금쯤 분명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성범죄자나 살인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 후로 이런저런 일들이 지나, 또 이런저런 글들을 써내고서,

 나는 서로 울면서 통화했던, 같이 살 생각을 했었던 여자와 헤어지고서 부산의 서점에서 일하고 있다.

 박봉에, 주6일의 격무에(취직하고 두 달 후에 바뀐 남자 사장은 독서애호가가 아닌 책장사꾼이었다) 어쩌다가 나는 여기 붙잡혀서 학생들에게 교과서와 교재를 팔고 있는가, 싀펄 넥슨주식은 떨어지고 방계약은 반 년 넘게 남았는데 하고 회의하면서.

 어찌되었든 이제 한동안은 예전처럼 방에 틀어박혀서 소설만 쓰며 생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확실히 이전 1년 정도 돈에 쪼들리며 살아가다보니, 나는 자연스레 돈을 벌기 위한 글을 쓰게 되었다.

 작년 하반기에 100만원 정도를 딴 단편은 심사위원의 기준을 저격했을 뿐 <내 글>이라고 부를 수 없는 무책임한 글이었고(그러나 그 돈은 소중한 이사비용이되었다), 작년 하반기부터는 친구의 제안으로 코믹월드에서 팔 수 있는 팬픽을 가장 많이 쓰고 있다. 물론 팬픽의 경우는 공동작업인만큼 간신히 <내 글>이라는 인장은 찍힐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지만 (=얘기가 노잼이라는 뜻)

 어찌되었든 이제 머릿속에서 <팔릴만한 글>이라는 기준점은 사라지지 않게 되었다.


 ㅡ목숨을 걸고 소설을 사랑하던 시절은 언제인지도 모르게 끝나버렸다.

 레이먼드 카버. 나는 당신의 삶과 글을 내 목숨을 바칠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하지만, 네. 당신의 글은 시대에 뒤떨어졌어요.

 그리고 당신처럼 쓰기를 원했던 제 문장과 이야기들도 굉장히 세상과 유리되어 있지요.


 세계문학전집을 꺼내 읽는 것이 그리 즐겁지 않다. 언제 푹 빠져들어 읽었는지가 기억나지도 않을 정도로. 그야 수도없이 필사하고 따라했던 소설들은 내 모든 문장에 녹아있겠지만, 그래봤자 내 재능엔 모사품일 뿐이다.

 나는 그런 모사품인 문장으로, 다음 <내가 쓸 수 있는 돈이되는 글>은 어떤 것일지를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그러면서 점차 강해지는 생각은ㅡ


 소설이란 미력하다.

 소설예술이란 미력하다.

 시대에 뒤떨어졌다.


 라는 깨달음이다.


 씨발, 버튜버들이 개인방송을 하고 <발더스게이트3>같은 게임이 출시되는 시대에 소설을 읽어주길 원하다니, 제정신인가


 문예는 시대에 뒤쳐진/유리된 자들의 창작물이다.

 지금 이 시대에 <이상> 같은 세련된 작가가 태어났다면 절대로 시나 소설 따위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이상은 분명 개쩌는 영화감독이 되었을 것이다.


 소설예술과 비교한다면, 텍스트 뿐만 아니라 오감을 아우르는 <게임>이나 <영화> 같은 결과물은 얼마나 거대한가. 얼마나 위대한가. 얼마나 다양하고 재능있는 사람들의 노력이 들어갔는가.

 <소설>이란 표현방식은 얼마나 보잘것 없는가. 타자를 두드려 글로만 써내는 표현방식은 <만화>같은 매체에 비해 얼마나 무성의한가.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아니, 개추 받고 싶으면 그 스토리 가지고 만화를 그리라고

 어디서 타자 딸깍질로 관심을 받으려고 하는 거냐. 노력을 해라 병신아. 등신. 나는 왜 타블렛이 아니라 글자들을 만지고 있지


 그리고 (물론) 이 모든 건 내가 <글을 잘쓰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도무지 이야기를 재밌게 쓰지 못한다.

 오랫동안, 나는 <소설>을 흰 도자기처럼 생각해왔으니까. 하지만 싀펄 요즘 시대에 누가 하얀 도자기를 사랑하겠나.

 나는 오래 소설을 쓰면서도 정작 '이야기를 쓰는 능력'을 기르지 않은 것이다.


 정말 몰랐던 건지, 아니면 외면하고 있었던 건지

 가끔은 이제와서 이런 생각까지 드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렇게 낡아빠진 소설을 따라하던 시간에 웹툰 그리는 연습을 시작했다면 어땠을까. 나는 만화도 좋아하는데.

 일찍부터 좀 더 다양하게 표현할 시도를 했으면 어땠을까. 심지어 나는 그림에 재능도 있는 편인데. 지금이라도 시작해 보는 건 어떨까.


 우습게도 지금 이런 나를 붙잡아 두는 것도 소설가의 문장이다.

 가즈오 이시구로가 말했던

 There was another life that i might have had but i am having this one.

 내가 발을 붙이고 있는 곳은 바로 이 땅이라는 것. 다른 삶은 없다는 것. 나는 오직 나의 현실을 살아야 한다는 것.


 결국 나에게 살아간다는 건 무언가를 읽고 무언가를 쓰는 것이니까.

 어쨌든 계속 하는 수 밖에 없다. 창백한 글자들을 들고서

 아마 나는 평생 그 사람처럼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써낼 수 없겠지만.


 ...지금 이 글로 머리를 비운 나는, 손 풀이 삼아 <100일 후에 나를 죽이는 마법소녀>라는 중편을 쓸거임.

 그런 하루의 결말이다.


 2주 정도 글을 쓰지 않았더니 도무지 머리가 굴러가지 않아서, 떠도는 생각들을 적어보았다.

 하..


 이제 소설을 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