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슬슬 지나가고, 가을이 다가오는 9월. 따뜻한 것을 좋아하는 서재 창가의 아프리카제비꽃은 방의 한기를 이기지 못하고 시들어 갔다.


이 꽃의 주인이자, 매일 이 꽃을 확인하는 다예 리네스티치 또한 창가의 그 꽃처럼 마찬가지로 하루가 갈수록 시들어갔다. 꽃이 태양의 온기를 받지 못해 시들어갔다면, 다예에게 필요한것은 한사람의 관심 뿐이었다.


그녀는 꽃의 썩어버린 줄기같은 손으로, 그녀에게 필요한 온기를 얻기위해 오늘도 편지의 막바지 부분을 쓰고 있다.


'...이곳, 크라쿠프는 날씨가 참 차답니다. 샤니 백작님, 오늘은 어디에 머물고, 어디를 보고, 무엇을 생각하셨나요? 이곳과는 다르게, 당신이 머무는 곳은 어디든 따뜻하길 빕니다. 편지 줄이겠습니다. 여름때에, 크라쿠프에서 뵙길 희망해요. 당신의 충실한 아내, 다예 리네스티치가.'


다예는 편지를 다 쓰고, 밀랍으로 대강 밀봉했다. 처음 편지들을 쓰고 시작했었던 때보다 밀봉의 정도는 약해져 있었다.


어차피 전해지지 않거나, 전해지더라도 읽지 않을것이었다.


편지를 쓰기 시작한 지난 5년간, 백작으로부터 돌아온 답장은 단 1통 뿐이었다. 그 편지 마저도 내용은, 자신이 파리에서 사귄 여자 '친구'들과의 오찬을 자랑하는 내용이었다. 


다예는 딱히 화도 나지 않았다, 아니, 그녀는 그런 감정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그녀가 사랑하는 백작에게 무례를 범하는 것이라 생각하여, 그저 예전처럼 그녀의 백작님이 다시 돌아와 그녀를 안아주거나, 그러지 못하더라도 늘 그녀 생각을 하고있길 바랄 뿐이었다. 


그녀는 하녀에게 편지를 주고, 그이가 묵고있는 숙소에 45번째 편지를 보냈다. 


하녀는 늘 그녀를 간곡히 말렸다. 날마다 초췌해가는 다예를 보는것은 다예를 극진히 모시는 그녀 입장에서도 고통이었다. 


불쌍하고, 초췌하고, 말수는 점점 적어진 주인. 다예가 33번째 편지를 쓰던 날, 하녀는 그녀를 동정하여 잘릴 각오를 하고 이리 말도 해보았었다.


"주인님, 백작님을 그리워 하시는건 알지만, 백작님이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혹시 다른 일에 몰두해볼 생각은 있으신가요? 원래 무언가를 잊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른 것에 집중하는 거라고도 하잖아요."


하녀에게는 갑작스럽게, 아무힘도 없어보였던 다예가, 잉크병을 그녀에게 던지며 목소리를 쥐어짜내 소리쳤다. 비록 힘이 부족해 잉크병은 하녀의 앞에서 떨어져 깨졌지만.


"감히 너 따위가, 백작님을 모욕해?!"


그후 하녀가 맞닥들인것은 다예의 냉대였다. 사실상 유일한 말동무였던 하녀를 무시하기 시작한 뒤부터, 다예는 더욱 초췌해지기 시작했다. 

'...감히 백작님을 의심하셨던-저를 백작님이 기억하지 못할것이라 말한-하녀는 내치려다가, 불쌍한 마음이 들어 말았습니다. 저를 걱정하고 있단것은, 저를 맞아주신 백작님 또한 걱정하고 있단것 아니겠습니까. 다만 백작님이 이러한 상황에 있을때는 어찌 하셨을까, 생각하다가, 그녀에게 관심 하나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년도 하녀로서의 분수를 곧 알게 되겠지요..... 만약 답장 하신다면, 저에게 "당신을 기억한다오, 다예" 이리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34번째 편지를 쓰기 시작했을때, 다예는 5살때부터 있었고, 늘 그것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그녀의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까지 덧붙여져, 거의 가보 급으로 지키고 있는 왼쪽 팔목에 박혀있는 보석에 말을 걸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 보석을 백작이라 생각하고, 편지를 쓰는데에 있어서 자문자답으로 조언을 얻곤 했다.

보석에 말을 걸기 시작한 이후로 홀로 서재에 있는 시간이 늘어났고, 밥도, 잠도, 서재에서 모두 자기 시작했다.


늘 편지를 어떻게 보낼지, 편지를 어떻게 퇴고할지, 편지는 잘 갔는지, 생각, 또 생각하고, 백작이 잘 있는지, 생각, 또 생각했다. 생각, 생각, 생각. 


'...팔의 이 보석을 볼때마다, 백작님과 같이 지냈던 세월이 떠오릅니다. 늘 당신은 하찮고, 평민출신인 저를 다뤄 주셨지요. 처음 당신을 만나 지팡이와 주먹으로 저를 다루어 주셨을때, 가보라서 지켜야 한다고 했던 그 보석만은 피해서 다뤄주신 당신과 당신의 희열감에 가득찬 미소를 당신과 떨어져 있는 어떤 순간에도 잊지 못하겠습니다. 피범벅이 되었는데도, 죽지 않고 살아있는 저를 보고는 "신기한 년이군. 새로운 부인으로는 쓸모 있겠어." 이리 제게 말씀하고, 저를 거두어 주신것 또한 잊지 못합니다. 그립습니다. 당신의 미소가 그립습니다. 당신의 손과 그 손에 쥐어짐이 그립습니다...'


37번째 편지까지 쓴 그녀는, 잠시 정신이 들었다, 아니, 오히려 더욱 미친것인지도 몰랐다. 그녀는 백작을 그리워 하기를 중단하고, 처음으로 서재에서 나왔다. 백작을 잊으려 나간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다예 자신이 백작을 잊고, 편지를 그만 보내야 백작도 여행지에서 계속 행복할것이라는 생각도 밑에 깔려있긴 하였다.


다른 귀족 부인들이 그러하듯, 사교 파티도 열거나 참석하고, 그곳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났다. 다예의 외모가 원래 출중하기도 하기도 하여, 이러한 짓을 여러번 반복하다 보니 옛날의 백작처럼 다예를 진심으로 선호하는 남자가 한명 생겼다. 


바르샤바 출신인 크레익 코왈스키. 귀족은 아니고, 중산층 가정의 남자였지만, 객관적으로 보았을때는 매력적이었다. 


쾌활했고 성격도 좋을뿐만 아니라 정말 참하고 착하기까지 했다. 다예가 오래전, 너무도 오래전, 가난한 거리의 소녀였을때 그녀의 유일한 친구가 되어주기도 한 그녀에게는 은인이기도 한 그런 사람이었다. 연상인 그에게 커서 결혼하고 싶다고 말한적도 있었다.


크레익은 사교 파티에는 잘 나오지 않아서 나오는 날에는 거의 모든 여자들이 크레익만 볼 정도였다. 그런 그는 오히려 다른 여자들은 무시하고 그를 보지않는 다예에게 다가갔다. 반가움과, 이상함이 걸쳐진 그런 눈빛으로 크레익은 그녀에게 손을 흔들며 다가갔다.


다예는 그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기억도 하지 못했다. 평생 이성적으로 바라본 남자가 백작 하나뿐이었기에, 역설적이게도 그녀는 백작을 잊기 위한 남자를 백작과 얼마나 닮았는지를 기준으로 선택하고 있었다. 크레익이 그녀와의 옛 기억을 내세워서 대략 몇개월간의 정기적인 데이트를 가지긴 했지만, 그런 그녀에게 크레익은 너무나도 물렁하고, 자극이 없었다. 


다예는 자신이 손을 먼저 내밀고 크레익이 그것을 꽉 쥐기를 원했지만, 크레익은 그녀에게 손을 내밀고 그녀가 그것을 꽉 쥐길 원했다.


크레익은 얼얼한 무더위로 그녀와 그녀의 상처를 다루어, 벌려주지 않았고, 단지 따뜻한 봄햇살처럼 그녀의 몸 구석구석에 난 화상의 흉터를 따뜻하게 감싸줄 뿐이었다. 다예는 크레익은 내치고, 다시 서재로 돌아갔다. 

크레익은 구슬퍼져 다예만을 그리워했다. 

거리의 소녀였던, 너무나 순진하고 순수했던 옛날의 모습은 없어진듯 보였다. 몇번이고 저택의 문을 두드렸지만 다예는 그를 맞아주지도 않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다예를 다시 생각


다예에게,


그런건 즐겁지 않았다.


심심하기만 했다.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크레익은 옛 다예처럼 서고로 들어갔다 한다. 


상관 없었다.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애써 잊으려 해보았지만, 역시나 역부족이었다.

'...그 모자란 놈이 쓴 연애편지를 보면 지금도 소름만이 돋을 뿐입니다. 그자는 저에게는 맞지 않는, 그만의 무서울정도로 지루하고 플라토닉적인 사랑을 저에게 강요했었습니다. 그자와는 이제 절대 만나지 않을 것이니 안심하십시오. 그리고, 만약 이번 달 내에 돌아오신다면 어느정도 보석을 거칠게 다루어주셔도 좋습니다. 저는 감히, 잠시동안 이라지만 백작님을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했었습니다. 그에 대한 어느정도의 체벌이 필요하실거라 생각하시는것을 저도 이해합니다. 백작님이 보석 외에 다른곳을 다루는것을 좋아하신다는건 아시지만, 그것은 저와 당신 모두 즐겁고, 쾌감을 느끼는 사랑의 감정으로 행하는 것이니, 저를 증오하는 마음으로, 체벌의 성격으로 그 보석을 다뤄주십시오. 반면교사 삼기위해, 안그래도 추한 저의 모습을, 반면교사 삼기 위해 화가에게 의뢰하여 더욱 추하게 그려 주십시오...'


40번째 편지를 퇴고하던 때, 완벽한 폐인이 되었을때, 그녀는 백작과 다시 함께하기까지는 매우 많은 세월이 걸릴 운명인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다시 서고에서 나와, 편지지와 잉크, 펜을 검정색이 되어버린 손으로 들고 더욱 어두운 지하실로 들어갔다. 지하실은 백작이 그녀와의 데이트를 자주 하던 곳이었다. 이곳에서, 그녀는 백작에게서 배운대로, 백작의 아내답게 조신하며 소극적으로 행동하는 법을 배우고 실행에 옮겼었다. 다예는 백작이 그녀를 다룰때 사용했던 도구를 만지고, 다예 스스로를 다루었다. 얼얼한 채찍 소리가 온 저택에 울려퍼졌다. 다뤄짐으로써, 그녀는 잠시나마 백작과 함께 있는듯한 느낌을 얻었다. 백작의 뜨거움이 다시 느껴졌다. 


다예는 눈을 다시 떴다.

늘 그랬듯이 하녀가 편지를 전달하러 우체국까지 가는것을 보려 했는데, 저 멀리에서 어떤 자동차가 보였다. 이 외딴 저택에 일부로, 그것도 자동차까지 타가며 오는 사람은 단 한명, 백작 뿐이었다.


다예는 자동차가 저택까지 오는 모습을 관찰했다. 파리로 출발하는 배편을 타기 위해 탔었던 오픈카 그대로였다. 백작과 동승한 사람은 운전기사, 그리고 한 여자였다.


다예는 백작을 맞기 위해 달려갔다.

분명히 다예가 그를 생각했던것처럼, 그도 그녀를 생각해 줄것이었다.


그녀가 보냈던 44개의 편지속에서 늘 반복되었던 마지막 문구.


"당장 오시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저를 꼭 생각해 주세요."


이 문구처럼, 그는 그녀를 꼭 생각할 것이었다.


백작은 말했다.


"이 꾀죄죄한 년은 누구야...? 아, 다예? 니 방으로 들어가 있어. 나는 레민카와 지하실에서 볼일이 있어서. 이만."


드디어 그녀를 대체할 여자를 찾았다.

맹목적이지도, 또 비현실적으로 완벽하지도 않은 그런 여자다.

그녀에게는 오래전에 싫증이 났다. 

고통받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는것은 내 취향에는 도통 맞질 않는다. 

그녀는 너무 완벽하게도 순종적이고, 순진하고, 비-반항적이다.

그에 비해 파리에서 찾은 이 레민카라는 여자는 ’적당한‘것이란걸 안다. 적당히 순진하고, 복종적이고, 반항적이다. 

잊을만하면 오는 편지때문에 내가 멀리 떠난 파리에서도 그녀를 원치 않게 생각하게 된 것은 한순간이었다.

그녀와 헤어져도 가끔 한순간, 잠시정도는 그녀가 생각나는 날도 있을테지만, 

레민카를 새로운 아내로 들인 이상 그녀와의 합당한 이혼 사유가 필요하다. 어차피 그녀를 찾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리네스티치 부인. 백작님께서 지하실로 들어오라 하십니다.“

그녀는 엎어져 있던 서재에서 나왔다. 재회의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백작은 그녀와 눈을 딱 한번 맞추고 입은 맞추지도 않은채 지하실로 들어가 버렸었다.


“나갈게.”

다예는 문을 열고, 하녀의 부축을 받으며 지하실로 내려갔다. 

조용한 저택에는 하녀들의 노동하는 소리와 다예의 힘겨운 걸음소리만이 들렸다. 다른 한쪽에선 문을 힘없이 간절히 두들기는, 한 남자의 맥빠진 울음소리가 들렸다.

더 내려가자 모르는 남자의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지하실의 문을 열자, 백작이 달려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다예! 아까는 미안했어.. 예전처럼, 다뤄줄게.”

다예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퍼석‘ 하고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앞은 더 잘 보이지 않았고, 모든 감각이 희미해져 갔다.

”약속할게 다예. 꼭 기억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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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의 유령의 ’생각해 줘요‘라는 넘버를 보고 써봤음.

이게 잘 된건지는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