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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검은색 투버클 슬리퍼, 슬랙스 바지, '구찌' 영문로고가 그려진 흰 면티와 위에 오버핏 카디건을 걸친 승연이 내린다. 승연은 아파트를 나오자마자, 담배를 깨문다. 그는 담뱃불을 붙이며 담뱃갑 속 남은 담배를 확인한다.

담배는 다섯 대 정도 남아있다. 승연은 담뱃갑을 도로 카디건 주머니 속에 넣으며 "내일까진 필 수 있겠네." 중얼거린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자, 만개한 벚꽃이 가로등 빛을 등지고 흩어진다.

승연은 보도블럭을 따라 정해진 곳 없이 길을 거닌다. 홈플러스 옆을 지나치고 아담한 카페가 시야에 들어온다.

고등학생 시절 자주 이용하던 카페였다. 스무 살 이후에는 폐점하여 더 이상 방문할 수 없었다.

승연은 반가운 마음에 카페로 성큼성큼 들어가더니 한 손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쥐고 나온다.

그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고나서 상쾌하게 웃는다.


"음, 역시 이 맛이지."


승연이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향에 끌려 추억에 젖어들고 있을 때, 카디건 주머니 속에서 벨소리가 울린다.

승연은 주머니 안에서 폴더폰을 꺼내 전화를 받는다. 엄마였다.


"어, 엄마."

"아들. 어제 옷 샀어?"


승연은 '아차.'하며 이런저런 핑계를 가져와 얼버무린다.


"입을 만한 옷이 없어서. 사야할 때도 된 것 같고."

"엄마가 사준다고 할 때는 괜찮다고 하더니."

"내가 그랬었나. 그런데 나 옷사러 간 건 어떻게 알았어?"

"오늘 백화점가니까 직원이 말해주던데. 친구랑 같이 왔었다고."


승연은 엄마와 통화를 이어간다. 그리고 마치려는 찰나,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 있는지 전화를 끊으려는 엄마를 붙잡는다


"참, 엄마!"

"왜?"

"아빠한테 말해서 나 기사하고 가사도우미 좀 붙여줘."

"갑자기? 너 필요없다고 하지 않았어?"

"이제보니까 있는 게 더 좋은 것 같아서."

"이상한 일이네. 알았어. 아빠한테 이야기 할 게."

"땡큐, 고마워요."


승연이 인사하자 전화가 끊어진다. 

그는 폴더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간사한 미소를 그린다.


"이제 술도 마음껏 마실 수 있겠네."



···



용준의 핸드폰에서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람이 울린다. 

그는 메시지를 확인하더니, 옷걸이에 걸려있는 후드집업과 삼선 슬리퍼를 챙겨 집을 나선다.

아파트 출입구를 걸어나오자 익숙한 목소리가 그의 이름을 부른다. 용준은 목소리가 들린 놀이터 쪽을 돌아봤다.

그곳엔 빨간색 오버핏 카디건을 걸쳐입은 승연이 그네에 걸터앉아있었다.

용준은 승연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승연의 옆자리, 빈 그네에 걸터앉으며 어쩐일이냐고 묻는다.


"늦은시간에 왠 일이야."

"그냥 심심해서."


승연은 간단하게 대답하며 손에 들고 있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신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용준은 승연에게 손에 쥐고 있는 것에 대해 물어본다.


"그건 뭐야. 음료수야?"

"아, 이거? 아이스 아메리카노."


승연이 아이스 아메리카노에서 용준에게 시선을 옮기며 말한다.


"한 번 마셔볼래?"


용준은 승연이 건네주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받는다. 그리고 빨대에 입을 대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아주 살짝 빨아본다. 

씁쓸한 커피 향이 입 안 한가득을 매웠다. 그러면서도 뒷맛은 살짝 달콤함이 느껴졌다.


"커피네. 쓰다."


용준은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승연에게 테이크 아웃 잔을 되돌려준다.

승연은 킥킥 웃으며 테이크 아웃 잔을 받는다. 그리고 남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천천히 비운다.

허공만 바라보며 그네를 살짝살짝 움직이던 용준은 무언가 떠올랐는지, 승연을 의아하단 표정을 바라본다.


"근데 너 커피 싫어하잖아. 그러고보니 커피는 어디서···."

"내가 커피를 싫어한다고?"


승연이 당황한 얼굴로 용준을 보더니 강한 어조로 부정한다.


"아냐, 나 카페인 없으면 안돼. 중독자야."

"그랬나."

"응. 하루에 네 잔은 마신다고."


용준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괜히 그네를 살짝 흔들거린다. 

그리고 승연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학교 끝나고, 밤에 부르는 것도 처음이다."

"그동안 학교 밖에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나."


용준이 말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승연은 헛웃음을 터트린다. 그리고 한 숨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내가 진짜 사람보는 눈이 없었나보네."


승연은 '읏차.' 소리내며 먼저 그네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뒤돌아 그네에 앉아있는 용준을 보며 말한다.


"중앙공원가자."

"갑자기?"

"커피 사줄게."

"그건 상관없긴 한데···."


용준은 우물쭈물해한다. 그러면서도 또 언제 이런 날이 올까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아주 잠깐, 자신의 집을 쳐다본다. 그리고 마지못해 따라가는 척 승연을 선택한다.



 ···



"다녀왔습니다."


승연과 산책을 마친 용준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다. 그의 왼손에는 '스타벅스' 로고가 그려진 테이크 아웃 잔이 들려있다.

용준은 슬리퍼를 벗고 집으로 들어오마자 나오는 부엌너머 거실 겸 안방에서 홀로 소주를 들이키고 있는 아버지와 눈이 마주친다.

그 순간, 용준은 잔뜩 긴장하며 아버지를 외면하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려한다. 


"손용준."


그의 아버지가 용준을 멈춰세운다. 용준은 문고리에서 손을 때고 술 취한 아버지를 바라본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네···."

"이 새끼야, 어딜가서 지금 기어들어와!"

"친구···."


용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빈 소주병 하나가 날라온다. 소주병은 현관문에 부딪치고 날카로운 쨍그랑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난다.

그리고 각종 욕설이 담긴 폭언이 이어진다.

그는 이런 상황이 익숙한듯, 무덤덤하게 빗자루와 걸레를 찾아 깨진 소주병을 치운다.

용준은 모든 걸 내려놓은 사람마냥, 자신에게 욕지거리를 내뱉는 아버지를 스윽 훑어본다.


어두컴컴한 아파트 복도. 현관문이 덜컹 열리자 낡은 센서등에 불이 들어온다. 

용준이 복도로 나왔다. 그는 현관문이 닫히자 그대로 난간에 기대며 천천히 주저앉는다.

닫힌 현관문 사이로 아버지의 욕설이 미세하게 흘러나온다.

곧 센서등이 꺼지고 긴 아파트 복도를 뒤덮은 적막한 어둠이 용준의 두 어깨를 감싸앉는다.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