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마당의 평상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곳에선 지옥불같이 뜨거운 햇볕이 강렬히 내리쬐고 있었다.

 

 '더워...'

 

 소년은 더위를 조금이라도 피하고자 기와지붕이 드리운 그늘 아래, 평상 끄트머리에 몸을 숨겼으나 이미 더울 대로 더워진 공기는 차츰 그의 피부를 태워갔다.


 매년 여름방학마다, 그것도 한창 더울 때인 8월 초, 한 번도 빠짐없이 외진 곳에 있는 시골집으로 내려오는 연례행사에 소년은 지쳐있었다. 에어컨은커녕 그나마 있는 낡아빠진 선풍기도 어른들이 옹기종기 서로 달라붙어 차지하고 있으니, 그 모습이 지겨워 밖으로 뛰쳐나온 것이다.


 '안이나 밖이나 더운 건 마찬가지니 차라리 이렇게 혼자 있는 게 훨씬 낫지.'


 소년은 속으로 계속 되새겼으나 어디 한여름의 무더위가 만만하겠는가. 하늘 꼭대기에 자리 잡은 해는 더욱 거세게 열을 내뿜기 시작했다. 이마에서는 땀이 뚝뚝 흐르고 있었다. 소년은 손을 움직여 땀을 훔칠 기력조차 없어 자신의 땀이 나무판자로 스며드는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그는 목격했다. 얼마 남지 않은 피난처를 햇빛이 서서히 침범하고 있었다. 해의 위치가 조금씩 바뀌면서 그의 그늘을 조금씩 없애고 있었다. 소년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어디선가 아득히 들려오는 매미의 울음소리가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소년은 어느새 가까워진 그늘의 경계선을 보며 분명 저 매미도 이 더위에 고통을 호소하는 것이라 확신했다. 저 매미는 머지않아 나무에 매달려 활활 타오를 것이다. 


 하지만 햇빛은 무심하게도 소년을 향해 점점 다가왔고, 어느새 손끝이 노출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순간 소년은 환각을 보았다. 극심한 열기가 그의 앞으로 모이더니 형태를 이루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서로 진득하게 달라붙으며 뭉치더니 처음에는 구의 형태에서, 동물의 형태, 그리고 마침내 인간과 비슷한 모습이 되었다. 그는 만화에서나 보던 사신의 모습과 몹시 유사했다. 오른손에는 새빨갛게 타오르고 있는 거대한 낫까지 들고 있으니 아마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그는 천천히 양손으로 낫을 다잡더니 그 끝을 소년에게 들이밀었다. 소년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아버지, 어머니, 이 불효자는 먼저 가나 봅니다. 부디 저를 발견하시면 어두컴컴한 관 속이 아닌 시원하고 고요한 바닷속으로 던져주세요!’


 마지막 각오를 마친 그의 팔에 낫이 닿기 직전,


 “아들!”


 연한 갈색의 목제 문이 활짝 열렸다. 나는 깜짝 놀라 공상에서 빠져나왔다.


 “거기서 뭐 하고 있어. 안 더워?”


 나는 그제야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투박하게 닦아내며 대답했다.


 “더운 건 집이나 밖이나 비슷해요.”


 “하하, 그렇긴 하지.”


 아버지의 이마에도 나와 똑같이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아무래도 역시 낡은 선풍기 한 대로는 여섯 명 모두를 만족시키진 못한 듯했다. 아버지는 내 맞은편에 슬며시 앉았다.


 “여긴 아무래도 어른들밖에 없으니 많이 심심하지? 게다가 날씨도 이렇게 쨍쨍하고.”


 “네... 뭐...”


 아버지가 무얼 말하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다. 이미 똑같은 광경을 십여 년째 봐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위로하기 위한 것은 아닐 터였다.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항상 이런 구석이 있었다. 아들인 내가 불편한 건지 청소년기인 아들을 배려해주는 건지 뭐든 명령조로 말하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말을 걸 때면 ‘나는 널 존중하고 있어.’라는 의미가 가득 담긴 듯한 서두로 시작한다. 물론 그런 화법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다른 강압적인 아버지들보다는 백배 낫다만 나로서는 그런 지루해 빠진 화법을 질리도록 듣다 보니 도저히 아버지와의 대화에 흥미를 느낄 수 없게 되었다. 그런 변화는 나까지 존댓말을 하도록 만들었다.


 “어린 시절 내내 여기서 살아온 아빠도 그땐 얼마나 지루해했는데, 같이 놀 사람도 없는 넌 얼마나 심심하겠니.”


 “뭐, 그렇죠.”


 “아빠는 그래서 밖에 나갔다 하면 도통 집으로 오지 않았어. 친구들이랑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노느라 바빴거든. 산에 올라가서 곤충들도 잡고, 또 냇가 같은 데를 발견하기만 하면 누구 먼저라고 할 거 없이 물속으로 뛰어들었지. 그땐 참 재밌었어.”


 뜨거운 열기를 뚫고 날아온 잠자리 한 마리가 아버지의 어깨에 사뿐히 앉았다. 고개를 비스듬히 들어 올려 무언가 바라보고 있는 아버지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아니, 어쩌면 보고 있는 게 아니라 생각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친구들과 웃고 떠들고 있는 어릴 적 아버지의 모습을. 나는 이미 대화 상대가 여겨지지 않게 된 건가.


 갑자기 아버지가 고개를 휙 돌림과 동시에 어깨에서 쉬고 있던 잠자리는 날아가 버렸다. 


 “물! 그래, 물이 있었지.”


 아버지는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말했다.


 “혹시 수영장 가고 싶지 않니?”


 “수영장이요?”


 수영장의 존재는 처음 들어봤다. 이곳은 주변이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고 계곡이나 냇가도 몸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깊게 흐르는 곳은 햇볕이 강렬히 내리쬐고 없었기 때문에 시골에서의 물놀이는 나에게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래, 수영장! 그걸 왜 지금까지 잊고 있었지?”


 그렇다고는 해도 아버지의 반응은 단순히 옛 추억을 떠올렸다는 기쁨보다는 보물을 찾은 듯한 환호에 가까웠다. 아버지는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어서 따라오라는 손짓으로 대문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자, 빨리 가자.”


 나는 딱히 가지 않을 명분을 찾지 못했기에 그 뒤를 터벅터벅 따라나섰다.



 대낮의 태양은 여전히 저물 줄을 모른 채 하늘 아래를 비추고 있었다. 우리는 몇십 분째 그 열기 속을 힘겹게 걸어나갔다. 아스팔트가 깔린 바닥은 곳곳이 부서진 흔적이 있거나 아예 흙으로만 남아있었다. 꽤 많이 걸었다 생각했는데 아직 주변이 온통 과일나무나 채소가 자라고 있는 밭인 것으로 보아 아직 목적지까지는 먼 모양이다. 게다가 정말 가끔씩 지나가는 차 몇 대를 제외하면 사람 인기척이라고는 없었기 때문에 마치 꿈속 세계로 빨려 들어온 듯한 이상야릇한 망상에 휩싸이기 마련이었다. 

 

문득 더위에 지쳐 왜 차를 타고 오지 않은 거냐고 물었더니 다시 이 길을 걸으며 그 시절의 두근거림을 또 한 번 느껴보고 싶다는 알 수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그 말의 의미에 의문을 가지면서도 어째선지 그 궁금증을 입 밖으로 내뱉는 행동은 수월하게 이루어지지 않아 하는 수 없이 조용히 밭에 심어진 작물들을 구경하며 이동했다. 그러나 후끈한 열기가 눈앞을 가리기라도 하고 있는 건지 흐릿해진 시야는 그마저도 방해하고 있었다.


 확실히 시골은 도시에 비하면 고요한 구석이 있었다. 어디를 보아도 바쁘지 않은 사람 하나 없는 도시에서는 이대로 나 혼자만 뒤처지는 건 아닌지 하는 조바심이 나까지 다급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눈 몇 번 깜빡였을 뿐인데 나는 벌써 고등학생이 되어 있었고 여전히 도시는 빠릿빠릿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매년 시골집에 내려오는 날이 되면 또 땡볕 아래서 고생하겠구나 하는 걱정이 생김에도 막상 도착하면 시골의 안락함에 취해버렸다. 몇 년이 지나면 금세 예전의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되는 도시와 다르게 여기에 변하는 것이라곤 기껏해야 옆집 강아지의 크기였기에 이곳의 시간이 다소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 특별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평소의 성적, 진로, 미래 같은 막연하게만 느껴지는 고민들에게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었고, 그것만으로 나는 자연의 한 부분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역시 인간은 적응의 동물인가, 타들어 갈 것만 같은 더위에도 점차 익숙해졌는지 시야가 선명해졌다. 코앞 밭에서 무엇이 자라고 있는지 구별하기 어려웠던 눈에는 잠자리나 메뚜기, 여치 같은 기척만 내던 작은 생명체들의 형태가 조금씩 뚜렷해졌다. 그건 세 발짝 정도 앞서 가고 있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는지 길게 이어진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여긴 곤충들이 참 많지? 도시에서는 이제 잘 보이지도 않는데. 이런 걸 보면 여긴 참 그대로란 말이야. 예전 모습이랑 하나도 달라진 게 없어.”


 “그러게요.”


 예전 모습은 알지도 못하면서 공감하는 말투로 대답해버렸다. 이상하게 아버지와 대화를 할 때면 적합한 말을 찾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떤 대답이든지 전부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예전... 그래, 아빠도 딱 너 나이일 때가 있었지.”


 아버지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나에게 하는 말인지 아니면 과거를 회상하며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혼잣말인지 확실하게 구분되지 않은 말을 묵묵히 이어갔다.


 “지금 가는 수영장도 내가 너 정도 나이일 때 갔던 수영장이란다. 그땐 친구들도 한평생을 살아온 이곳이 질렸는지 도시로 가서 돈을 벌겠다는 목표 하나로 미친 듯이 공부하기 시작했지. 나에게도 그런 소망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어. 다른 곳에 있는 이곳을 좋아하고 있었거든. 그야 여기는 공기도 맑고 풍경도 좋지, 그냥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이랑 말도 섞고 그러면 얼마나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지금 내게는 군데군데 흰 빛이 섞인 아버지의 뒤통수밖에 보이지 않았으나 그 너머로 시원 씁쓸한 미소를 짓는 얼굴이 그려졌다.


 “아무튼 밖으로만 나돌던 아빠 주변에는 친구들이 점점 줄었단다. 그런 애들의 속마음을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면서 어린애같이 십 년도 넘게 지속되던 우정에 배신당했다며 말도 안 되는 억지로 공부와는 멀어졌지. 약간의 반발심도 섞여 있었을지도 모르겠네.”


 나는 처음 들어보는 아버지의 어릴 적 이야기에 머릿속으로 그 장면들을 천천히 그려봤다.


 “하지만 그 반항도 그리 오래가진 못했지. 말로는 이곳이 좋다,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듯한 이 집이 좋다 하지만 막상 여태껏 같이 다니던 친구들이 한순간에 없어지니까 금방 모든 것들이 재미가 없어졌단다. 이 좁디좁은 곳에서 친구들과 안 해본 놀이는 있을 리가 없었고 혼자 있는 현재와 시끌벅적했던 과거를 비교하기 일쑤였으니 나는 곳에 있는 이곳에 흥미를 느낄 수 없게 된 거야. 그리고는 급속도로 우울해졌지. 남들보다 내가 뒤처지고 있다는 불안감과 불확실한 내 미래의 모습은 쉴 틈 없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어.”


 나는 깜짝 놀랐다. 지금의 나와 비슷한 과거 아버지의 모습은 크게 와 닿지 않던 아버지의 옛날이야기에 현실성을 한 컵 추가해주었다. 나는 지금까지 이야기를 들으며 느낀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지만 적당한 말을 찾지 못했다. 저도 지금 그런 고민을 하고 있어요. 아니, 무언가 어색한 느낌이 든다. 그럼, 그랬군요? 아냐, 이건 너무 무뚝뚝해 보여. 나는 역시 대화에 익숙하지 못하다. 그 상대가 가족일지라도. 아버지도 잠잠한 내 반응 때문에 시들해진 건지 아니면 뒤를 이을 말을 찾지 못한 것인지 이야기를 멈춘 채 발걸음만 옮겼다. 


 그렇게 십 여분을 걸었을까, 점점 건물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고 한결 가벼워진 아버지의 발은 목적지가 머지않았음을 알려주었다.


 “자, 도착이다. 그런데...”


 난 아버지의 말문이 막힌 이유를 굳이 묻지 않았다. 그 이유가 한눈에 보였기에.


 “문을 닫았네요...”


 생각해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이곳의 존재를 잊고 있었고, 다시 떠올린 현재와의 간격은 보나 마나 상당했을 것이다. 내 나이를 따져보면... 적어도 20년쯤인가. 아무리 예전 모습을 간직하는 시골이라도 이 정도 시간이면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만 해도 다행일 터다. 


 “하하... 당연한 건데 왜 생각을 못했을까.”


 해탈한 듯한 말투였지만 이상하게도 아버지의 얼굴은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오랜만에 지인을 만난, 반가움이 여린 표정이었다.


 “어쩔 수 없지. 그럼, 다시 돌아갈까?”


 오직 시원한 수영장 물만을 기대하며 고약한 땡볕을 견뎌 온 것이었는데, 그저 헛걸음질이었다니. 이런 생각이 겉으로 티가 났는지 아버지는 수영장 옆 낡은 슈퍼에서 아이스크림을 사주었다. 서늘한 공기가 은은하게 퍼져있는 가게 내부에서 아버지는 가게 주인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다. 백발의 가게 주인은 누구냐는 듯 낯선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도 잠시 예전에 질리도록 봤던 소년의 얼굴을 발견했는지 마치 오랜만에 만난 아들처럼 반겨주었다. 이어서 시작된 안부 인사와 옛날이야기를 옆에서 듣고 있자니 외부인이 된 느낌에 금방 끝날 것 같지도 않아 물 흐르듯 가게를 슬며시 빠져나왔다. 


 가게 그늘에 몸을 숨겨 소음 하나 없는 풍경을 감상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야옹 소리와 함께 검은색 고양이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그 녀석은 오랜 친구를 만난 양 내게 다가오면서 친한 척을 해댔다. 배가 고프기라도 한 걸까 내 다리에 온몸을 비비는 모습이 마냥 귀엽기만 했다. 이 녀석도 이곳에서 나고 자랐겠지. 척 보기에도 노년의 기운이 느껴지는 이 고양이에게 나는 하나의 변화로서 비춰질까? 매일 똑같은 거리에의 처음 보는 인간은 확실히 새로운 하나의 장식물처럼 여겨질지도 모른다. 


 그럼 어째서 이렇게 친근하게 다가올 수 있는 걸까. 낯선 변화에 금세 적응하는 고양이. 그런 생각을 하니 이 시골도 딱히 다를 게 없었다. 도시와 달리 겉으로 크게 보이는 변화는 없을지라도 그 안을 세세히 살펴보면 분명 무언가 달라졌을 거다. 하늘 끝까지 닿을 기세로 자라난 나무나, 새끼를 낳은 강아지라던가, 쥐도 새도 모르게 반지가 끼워진 총각의 손가락, 하루아침에 볼 수 없게 된 노부부의 모습 등... 아주 미세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는 건 아닐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살짝이나마 가벼워짐을 느꼈다.


 “자, 이제 가볼까?”


 대화를 마친 아버지는 후련한 얼굴로 가게를 나섰다. 그 자그마한 틈으로 백발의 노인은 내게 손을 흔들었다. 나도 그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인 뒤 아버지의 옆으로 달려가 걸음을 맞추었다. 아버지는 살짝 놀란듯하면서도 조용히 비닐봉지에서 아이스크림 하나를 꺼냈다. 


 “자, 이거 주인 할아버지가 너 먹으라고 주신 거다.”


 나는 금방 하나를 먹어치운 뒤라 아직 입안이 시렸지만 감사히 받아들었다.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가는 건 그야말로 노동에 가까웠다. 이미 충분히 구경하며 걸어왔을 뿐 아니라 하필이면 오르막길이 많아 올 때의 편안함이 그리워졌다. 그래도 그 잠깐 사이 무언가 변한 게 없나 주변을 둘러보는 재미로 묵묵히 걷고 있는데, 문득 아까 미처 묻지 못한 궁금증이 떠올랐다.


 “그래서 왜 갑자기 그 수영장에 절 데려가고 싶었던 거예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더위에 찌든 아들을 위해 오래전 수영장을 떠올리고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다는 대답은 부자연스러웠다. 내 의견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 보였고 더구나 그 길을 걷던 아버지가 더욱 신나 보였기에.. 무슨 추억이라도 있는 걸까.


 “아, 아빠가 얘기 안 했나?”


 아무렇지도 않게 이어지는 대답에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거기서 네 엄마랑 만났거든.”


 “네?”


 상상도 못한 인물의 등장에 조금 과한 반응이 나왔다. 


 “아이고, 깜짝이야. 귀청 떨어지겠다, 야.”


 아버지는 내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이 미소를 보였다.


 “어쩌다가, 어쩌다가 만난 거예요?”


 처음 듣는 부모님의 연애 시절 얘기라 그런지 조금 들뜨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건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는지 신나하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그때가 아마 고등학생 막바지였을 태지. 아까도 말했다시피 아빠 친구들은 공부하겠다고 더는 놀러 다니지 않았단 말이지. 나도 이제 슬슬 뭐해 먹고 살지 고민하기 시작했는데 공부는 못하겠는 거야. 할 수 없이 집에는 못 있겠고 밖은 쌀쌀하니 수영장에 갔지.”


 “예?”


 밖이 쌀쌀한데 수영장에 갔다니, 순간 잘못 들었나 싶었다.


 “아, 거긴 겨울에 따뜻한 물을 채워줬거든. 참 이상한 곳이었지. 덕분에 거의 전용 수영장처럼 이용할 수 있었다. 물에 몸을 맡긴 채 둥둥 떠다니기만 하면 모든 고민이 해결되는 느낌이었단다. 모든 게 완만하게 흘러갈 것 같았지. 그리고 어느 날에 너희 엄마가 갑자기 나타난 거야. 우린 서로 당황했지. 이 날씨에 수영장에 오는 미친놈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알고 보니까 거기 주인이랑 연이 있어서 따뜻한 물이란 걸 알았다고 했나, 잘 기억이 안 나네.”


 아버지 뒤를 졸졸 따라갈 때에는 미처 보지 못한 얼굴에는 인자한 기쁨이 서려 있었다.


 “아무튼 날마다 그렇게 얘기를 나눠보니 이 애도 나랑 비슷한 고민을 갖고 있다는 걸 알았다. 네 엄마는 여길 떠나고 싶어 했는데 어디 혼자 도시로 나간다는 게 쉬웠겠니. 나도 막연하게나마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걸 느끼고 있었고. 우린 현실이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진 채 한껏 짓눌려 있는 작은 새였단다.”


 작은 새. 아버지의 그 비유가 왠지 모르게 마음에 와 닿았다.


 “아무튼 그렇게 여차여차 해서 그런 사이가 된 거지. 그게 아무리 견디기 힘들고 금방이라도 버리고 싶은 짐이라고 해도 공통점이 있다는 건 그것을 서로 나누고 때로는 도울 수 있는 파트너가 생겼다는 것이란다. 둘이 함께여도 어쩌다 현실이 버거워지는 날이 있기도 했지. 그럴 때 우리는 수영장에 와서 마음 편히 힘을 빼고 물에 몸을 맡겼어. 부력에게 잠시 그 무게를 짊어져 달라 부탁한 것이지.”


 어느덧 집이 자그맣게 모습을 드러냈고 영원할 것만 같던 해는 중천에서 내려와 천천히 저물고 있었다. 현실의 짐을 함께 짊어져 줄 파트너라, 언젠가 내 앞에도 그런 존재가 나타날지도 모른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내 짐과 직면해야 한다. 그것이 오로지 힘든 것만은 아니란 걸 명심하고서, 굳이 혼자 감당할 필요가 없다는 걸 실감하면서.


 아버지의 얼굴은 새빨간 황혼으로 물들어있었다. 마냥 나쁘지는 않은지 살짝 미소 지은 얼굴이었다. 아마 나 또한 그런 얼굴일 것이라 짐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