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가에 서서

담배로 잠깐의 도피를 즐기다

하늘에서 한 방울 한 방울

그렇게 수십만 방울이 되어 

땅과 하늘을 적시는 것을 보고

담배와 하늘을 번갈아 바라본

검객을 꿈꾸는 어느 나약한 존재는

자신의 하찮은 신세를 회상한다


그 존재도 아마 봄비에 적셔진 벛꽃처럼

아름답게 팔을 벌리다가 몽환적으로

그리고 미적으로 사라져가고 싶었다

그리고 인간의 50년같은 꽃이 진 자리에

내 눈을 찌르는 듯한 녹엽을 피우며

내 옆자리와 사람들의 눈을

영원한 태양의 기운을 받으며

초록빛으로 물들게 하고 싶었건만


환상적인 영광의 벛꽃도

눈을 찌르는 초록빛도 나한테는 없다

이미 시들어 땅에 떨어진 낙엽이거나

앙상한 가지만 드러내는 것 같은데

어떻게 앞으로 나아가라는 것인가

앙상한 가지만 있다면

나중에 다시 벛꽃이 되겠냐는 일말의 희망도

속이 완전히 죽어버린 나무에겐

그마저도 없을 것이다

 

사계의 순환 중에

영광의 봄이 없고

생기의 여름도 없고

하나의 석양같은 가을도 없고

인고의 겨울만 있을 뿐

이미 속이 썩어버린 나무는 

절벽 아래에 외로이 서서

조용히 담배만 물고 있을 뿐이니라


차라리 나의 껍질도

이미 죽어버린 속살을 따라간다면

사계의 순환의 달콤한 영광도

강렬한 생기의 맛도

씁쓸한 석양의 맛도 음미할 수 있겠지

그렇게 거쳐가면서

울다가 웃다가

자연을 즐기다가

시련을 맞아도 이겨낼 법을 같이 찾아내고

별에 닿길 바라는 허황된 꿈도 꾸다가

소중한 누군가의 몽환에 사로잡히다가

인고의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겠지


하지만 사계의 순환을 터득할 수 없는

볼품없는 껍질만 남은 나무에겐

사계의 순환은 바라만 볼 수 밖에 없는

별 밖에 되지 못하니

강렬한 빛이 이 나무를 불태우기를

그리고 이 나무가 죽은 곳 위에

새로 새싹이 태어난다면

사계의 순환을 알 수 있는 나무가 되기를 바라며

담배를 비벼 끄고

난간 위로 올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