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은 열심히 지는 중이었다. 호실 친구가 내 반으로 오더니 오늘 저녁에 외식을 하쟨다.


급식이 맛이 없었거든....




한 시간 좀 지나서 나와 그 친구와 우리 반 호실친구 한 명은 학교 담장 옆구리에 찰싹 붙어 있는 허름한 중식당 '삐리리'에서 탕수육과 짜장면을 신나게 흡입하고 있었다.




 체육 시간에 애들이 자주 치는 게 배드민턴인데, 18세기 커피가게에 모이던 군인들마냥 무용담을 친구 둘이서 해댔다. 비배드민턴인이었던 나는 잠자코 짜장면을 먹으며 듣고 있었다. 배드민턴은 다른 파트너랑 같이 치고 그러니까 거기서 자기들의 착한 정도를 얘기하는 화제로 넘어갔나 보다. 야, 솔직히 나 정도면....... 그래도 난 여자랑 처음 보는 사람한테는 잘 해주는 편....... 착하다고 얘기될 수 있는 여러가지 방술들이 나열되고 있었다. 거기에 나는 아무 해당사항이 없었다. 나 참 이런 데에서도 섭섭함을 느끼다니... 초면 앞에서 무감각하고 어른 앞에서 우유부단하고 친한 사람 앞에서 뻔뻔한 게 나다. 이래저래 착하다거나, 성격이 좋다거나 하는 평가를 못 얻는다. 더해서 나는 정신분열에 걸린 쓰레기 같은 짓을 저 두 친구 앞에서도 저지른 기록이 있다. 그 일이 있은지 시간이 좀 지나서 묻어가고 조용히 섞여 살고 있는 상태가 지금이다. 나는 절대 착할 수 없다. 지금까지 내 인격이 드러난 인간관계들을 살펴보면, 다 내가 꽂힌 관심사만 남들에게 주구장창 보여줘서 알게 모르게 성가신 애가 되었다가 나 혼자 왜 그랬지?하고 반성하고, 타협 없이 나 혼자 하던 짓을 그만두고, 시간이 흘러서 그 모습이 많이 무뎌져서 겨우 정상 궤도에 오른 경우들이다. 친할 때 하는 일상적인 것들만이 나와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관계 전반을 망쳤다가 개선시켰다가 하는 숭고한 노력은 다 내 안에서만 일어난다. 내가 나한테 사과하고 내가 나한테 고백한다. 사실 잘 생각해 보면 싸움을 거는 것도 내 속에 비친 그놈의 형상에다 불을 붙이는 것이다. 원인이 밖에 드러나질 않으니 싸움의 당사자도 구경하는 사람도 원인을 몰라 어안이벙벙하다. 누가 선뜻 사건의 전말을 다 알고 나서서 말려 주겠는가? 지리멸렬하게 나 혼자만의 증오가 이어지고, 내가 갑자기 새로운 마음을 먹거나 참다 못한 누가 나서서 뜯어말릴 우연의 그날을 기다릴 뿐이다.




 내가 왜 이리 답 없는 성격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굳이 따지자면 어렸을 때, 그러니까 사람 정서발달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시기 같은 때에 내가 제대로 못 살아왔다는 말이 꺼내질 수 있다. 유치원 때 애들은 날마다 모여서 블록이나 주사위, 색종이 같은 걸 갖고 놀았다. 나는 구석에서 빈 종이에 연필로 그림을 그렸다. 또래 애들이랑 친해지는 방법은 그때 다 배웠나 보다. 나는 주위에 관심을 끄고 미친듯이 그림을 그린다. 지나가는 누군가가 내 그림이 잘 그렸다는 걸 알고 다가온다. 나는 그 그림에 대해 물어보는 말에 답만 달아주면 된다. 그게 내가 친구 사귀는 방법이었다. 그나마 누군가가 물어봐 줘서, '계속되는 그림 그리기가 아이의 자폐를 심화시키는'지경까진 안 갔나 보다. 그래서인지 내 곁엔 친구 같은 게 있어 보였고, 그걸 문제 삼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계속 현상을 유지했다. 계속 만화를 그리고, 캐릭터가 잘 그려지는 것에 희열을 느꼈다. 말투는 빠르게 중얼거렸다. 주말에 밖에 나가 노는 일은 절대 없었다. 난 친구들하고 놀아야 되는데 밖에 나가면 무슨 친구가 있냐고. 다 모르는 인간들뿐이지.




 초등학교 5학년 때, 그 해는 운이 없게도 죽고 못 사는 친구가 반에 한 명 밖에 없었다. 게임 얘기, 노트에 만화 그리는 것, 무기 얘기, 그러다 어쩌다 빠져 버리는 매니아적인 얘기들. 뜻이 잘 통해서 우린 늘 같이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걔 혼자 싸이코 모드가 되어서 (원래는 나도 같이 되어야 하는데) 주머니에서 접이식 커터칼을 꺼내 내 엄지손가락에 찍었다. 나는 그날 이후로 마주치는 모두에게 그놈의 욕을 씨부리며 다녔다. 대전으로 이사 가서도 중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발신자 번호를 바꿔서 욕문자를 보냈다. 이래저래 나는 안 착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그 해는 좀 성공적이었다. 3월초에 만화 그린게 잘 먹혀서 나랑 같이 다니는 남자애들이 열 명은 남짓 되었다. 점심시간마다 열심히 좀비놀이를 했다. 같이 뛰는 게 남자애들의 우정이구나, 나는 새로 배운 밝고 건전한 감정에 깊이 취해서, 그것에 죽고 못 사는 애가 되었다. 5학년 때 내 이름을 가지고 놀리는 애랑 철천지원수였는데 단 한번 웃어넘겨주는 순간 걔랑 친구가 되었다. 우정은 아주 쉽고 값진 것. 나는 우정을 그런 식으로 배웠다. 거리가 좀 멀어지고 시간이 좀 지나면 얼마든지 희미해질 수 있는 것을. 나는 절대로 인정할 수 없었다. 순전히 타의로 대전으로 전학을 갔을 때, 내 하루 일과의 35%는 고향 친구들과 문자하는 거였다. 나중엔 전화도 서슴지 않고 했다. 절정에는 '나 오늘 네가 나한테 문자하는 꿈 꿨다.'하고 문자를 최대 동시 전송 한도인 20명한테 보냈다. 고향에서 만화 그리는 뜻까지 맞는 절친 중의 절친이었는데 걔가 나를 귀찮아하며 답장을 안 해서 나는 그 새끼도 욕을 씨부리며 다녔다. 이래저래 착하지 않고 미쳐 돌아버렸다.




 이대로 가면 학년마다 다 늘어놓을 것 같아서 서둘러 말을 끊어야겠다. 그 후로는, 내가 이제까지 갖고 있었던 성격상의, 화법상의 결점들을 하나하나 교정하는 과정이었다. "야, 너는 왜 말할 때 눈을 안 마주치냐?"하고 중1때 한 양아치가 나한테 던진 불평이 그 첫 번째였다. 전학 와서 다시 좁아진 식견을 넓히고, 받아들여야 할 내 결점들을 받아들였다. 나는 중학교 내내 공부하면서도(석차를 유지하려고) 착해지기 위해 노력했고, 3학년 때 그것에 나름 완성의 도장을 찍었다. 추대되다시피 반장이 되고, 반장이 된 것은 한 차원 더 넓은 인간관계에서 신경을 가동할 기회였다. 참 쉽지 않았다. 그래도 그 쉬워 하지 않아하는 내 모습이 우스워서인지 면전에서 불평하는 친구는 없었다. 그래도 가끔씩 친한 애들 앞에서 한결같지 못하고 기분 따라 기복을 보이는 건 여전했다. 억제당한 초등학교 때의 자폐가 그런 식으로 튀어나온 걸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고1때 기숙형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내가 1년 동안 그래도 바람직한 방향으로 다져 왔던 관계의 기반에서(길 가다 만나면 반갑게 인사할 수 있는. 슈퍼마켓 앞에서 만나면 음료수 얻어마시고 갈 수 있는.) 강제로 뽑혀져 나왔다. 각자의 지방에서 공부 좀 한다고 어지간히 격려받은 자부심들이 유출된 LPG가스처럼 깔린 OO산 자락에 던져졌다. 그때 난...... 너무 나가 있었다. 감상주의, 일희일비, 몽상가. 고등학교 초반의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단어들이다. 세상에 대한 내 감정을 서슴없이 늘어놓으면 대전에서는 어떻게든 인정을 받았다. 그런데 여기 와서는 그런 내 감정표현에 아무도 신경을 안 써 주는 거였다. 내 감상은 결국 '시'를 적어놓는 작은 스프링노트로 침잠했다. 백일장에 그걸 내보내도 별다른 평가를 얻지 못했다. 개인적 기억이 섬세하게 얽힌 개인적 상징의 나열이었고, 그걸 나는 '시'로 읽었고 남들은 '암호'로 읽었으니까. 난 고등학교 1학년이 다 가서야 그것들의 쓸모없음을 알았다. 다음으로 택한 전략은, '가능한 한 감정을 숨기고 고상하게 보이기'였다. 철학자 이름들도 좀 알았겠다. 일부러 예스러워지려고 노력했다. 길고 화려해진 내 글은 백일장에서 장원을 타는 데 도움이 되었겠지만 그것 말고 그런 허영이 나한테 좋게 다가온 기억은 없었다. 자세한 이때의 얘기는 내가 작년에 블로그에 쓴 수필인 '자경문-스스로 경계하는 글'에 잘 나와 있다. 결론적으로 나는 짜장면을 먹는 친구들의 눈에 결코 착하게 보일 수 없었다.




 이렇게 '착함'의 관점에서 나를 살펴보면 나는 철저한 열등생이다. 이제까지 내가 나를 반성할 때 했던 말들을 잘 생각해봐도 다 '착함'이 기준이었다. 그런데 착하다는 게 뭔데 남들이 나를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는 건가? "착하면 바보 되는 게 요즘 세상이다."할 거면 무엇하러 착함으로 평판을 가꾸는가? 뭐하러 착해지려고 피해를 감내했다가 나중에 돌아서서 펑펑 우는 건가?




 지금까지 내가 착해지기 위해 노력했던 시간들에 상관없이 착하다는 것에 대한 회의가 든다. 착하다는 건 딱히 똑바로 정해진 의미도 없다. 다른 성격을 포용하는 일보다는 자신이 생각하는 도덕의 틀로 남을 재 보는 것이 감정 소모가 덜 드니, 착하다는 의미는 이타성, 도덕성 이런 걸 넘어 지극히 주관적인 평가의 기준이 된다. 나는 '다름'을 포용하는 부담 갖기가 지금의 착함을 대신하는 도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 역시 사람을 죽이는 성격도 기꺼이 받아들인다거나 하는 말장난 같은 일반화로 이어져서는 안 되지만, 그게 발전에 별 도움도 안 되는 자의적인 평가를 얻기 위해서 우스꽝스럽게 노력하는 현재의 노력을 대체하면 모두가 훨씬 살기 편하다.




 나도 여태까지 그런 자의적인 평가들이 얻고 싶어서 '자경문'을 쓰고 별별 말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현재도 그런 자의적인 평판들이 조금 좋아져서 숨통을 좀 트고 있다. 하지만 내가 지금 이렇게 편해하는 것은 그런 게 편한 세상 속에서 살기 때문에 편해하는 것이지. 내가 드디어 인격과 도덕에 대해 완전히 알아 버려서 자부심을 갖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세상이 내가 원한대로 바뀌지만은 않는다. 내가 선생님이 될 때까지 우리 사는 세상에 그 멋진 '다원주의'가 도래하기 전까지는, 나는 세상을 새롭게 보는 눈을 학생에게 갖게 해 줘야 하는가 혹은 그래도 고통 없이 살아가라고, 현재의 세상에 맞춰가는 법을 가르쳐 줘야 하는가 이런 것도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이래저래 착하지 못하고 근심만 많은 시절을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