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바래어버린 기억의 색채를 간직한 화소들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명멸하며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스쳐 지나가는 것은 

새벽녘이 되어서까지 멈출 기세가 없었던 풀벌레 소리와

베어진 이름 모를 들풀이 마지막으로 내뱉은 향취.

그리고 마지막까지도 헤아려지지 못했던 비명.


사랑했었다. 망설임 없이.

사랑했었다. 가진 힘껏.

사랑했었다. 더없이 추악한 모습으로.


그림은 한때 품고 있던 자그마한 축하와 위로의 뜻마저 부정당하여 뒤틀렸고

끝끝내 낳고 만 비통을 비추는 거울로 변모하고 말았다.


빗방울이 내려앉는다.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을 때 늦은 부끄러움과 참회는 

벗겨진 바닥 페인트의 틈 사이로 스며들어 갔다.


나는, 꿈을 꾸고 있다.

10년이라는 시간 속에서도 굳건하던 성체를 무너뜨린 목마의 꿈을.


나는 꿈을 꾸고 있다.

사랑했기에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어느 고철의 꿈을.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금언처럼

지금 이 순간에도 관계는 맺어지고 잘리고 확장되어 나갔다.


눈비가 내리며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흉터가 비명을 토해내며 몸을 뒤척일 때마다.


글이며, 사진이며, 영상이며 이제는 파도가 지워낸 바닷물에 비친 상처럼 희끄무레해져 버린 기억이 말을 걸어올 때마다.


과거는 그곳에 있었다.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그래, 그것은 마멸이었다.

감추기 위해 뒤집어서 썼던 가면은 뒤틀려 얼굴이 되었고

솔직함에조차 거짓이 스며들어 추악함만이 무너져가는 몸뚱이를 지지하는 마지막 들보가 되었다.


때늦은 후회의 의미도 다가올 나날에 대한 공포의 가치도 퇴색시키며. 


환상은 그곳에 있었다.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그래, 그것은 부패였다

삼킨다면 문드러지고 말 맹독.

그럼에도 나는 마약에 중독된 이들처럼 

그 알량한 허깨비가 안기는 안식을 포기하지 못한 채 

그 끝에 다가올 응보를 기다리며 독이 든 성배를 삼켜냈다.


구름 너머로 보름달이 응시해 온다.

거울이 토해낸 악몽에 방점이 찍힌다.

새벽녘의 칼바람이 눈가를 엤다.


세상은 희뿌옇게 흐려져 간다.

때로는 안락한 요람으로써. 때로는 대못 박은 이에 대한 징죄로써 찾아와

내 꿈과 공상마저 먹어 치운 환시가 끝끝내 현실에 따라잡혀 흩어져 가듯이.

마지막 불덩이를 삼켜냈다. 

목구멍 너머로 느껴지는 열기가 한밤중의 쌀쌀함을 천천히 데워나갔다.


그때는 모르고 있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것이.

내게는 허락되지 않았음을.


사랑했기에. 불행해졌다.

사랑했기에. 낙인찍혔다.

사랑했기에. 원망받았다.

나 뿐 아닌 모두가.

설익은 끝에 썩고만.

끝내 사랑조차 되지 못한 부스러기 탓에.


핸드폰의 전원을 내렸다.

내게 베풀어졌던 선물은 나타났을 때처럼 갑작스레 모습을 감추었다. 

오늘도 기나긴 밤이 꿈에게서조차 버림받은 날 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