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잔에선 소녀의 흥얼거림만이 간혹 들려왔다. 하얀 발가락을 허공에 내어놓고 마루에 엎드려 소녀는 온종일 글을 썼다. 다른 손에는 검을 쥐었다. 때론 검을 내려놓고 빗으로 머리를 어루만졌다. 빗을 내려놓아도 대나무가 내뱉은 바람은 쉴새 없이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바람은 밤낮없이 불었다. 소녀도 밤낮없이 글을 썼다. 마침내 종이의 여백이 대나무 군락의 빈틈처럼 촘촘해졌을 때, 소녀는 객잔의 안으로 들어섰다.

    객잔은 난장판이었다. 뜻을 함께할 수 없는 두 무리가 생사결을 각오했거나, 건물이 체한 게 틀림없었다. 사방에선 먹다 남은 국수 면발과 청주가 흘러내렸다. 등잔은 기둥마다 매달려 희미한 불빛을 내뿜었다. 자신의 움직임을 증명해줄 불빛과 바람 사이에는 어떠한 합의가 있었다. 소녀는 내던져진 의자와 기저귀와 원형 식탁 사이를 걸었다. 흥얼거림은 멈추지 않았다. 소녀는 장식 없는 머리끈을 주워 머리를 묶었다.

    바람이 거세짐에 따라 지붕 없이 노출된 중앙 광장이 흔들렸다. 호들갑을 떠는 등잔이 싫어 두세 개를 베었더니 그림자는 잠잠해졌다. 작은 몸이 비틀거려 소녀는 기둥을 짚었다. 객잔의 꼭대기로 향하는 층계 앞이었다. 저 위로 올라가면 전망대가 있다. 무언가를 날려 보내기에 적합했다. 소녀의 눈동자에선 머뭇거림이 보였다. 바람은 나무 기둥을 긁어 자국을 남기고 객잔에 영구적인 흠집을 남겼다. 그들 존재에 대한 공격임을 소녀가 모를 리 없었다. 그건 이곳에 몸을 담은 이상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소녀의 입가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소녀는 숨을 고르다가 매화가 박힌 창호지를, 등잔을, 기둥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검이 지나간 자리는 꼭 글씨처럼 남았다. 곧 눈을 감고 과거를 떠올렸다. 비릿한 쇠 맛이 소녀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객잔 전체가 무너질 듯 진동했다. 홀로 객잔을 세우고 아이들을 받던 그때를 되새겼다.

    눈을 떴다. 종이를 접고 또 접으며 나무 계단을 밟았다. 소녀는 두려움 속에서 발걸음을 떼고 검의 끝으로 밤하늘을 가리켰다.

 

    잠금장치의 비밀번호는 그대로였다. 문 너머의 상대방은 띄엄띄엄 비밀번호를 눌렀다. 준모는 맞잡은 어머니의 손에 힘을 주었다. 남주도 손깍지를 풀지 않았다. 미나리가 돌아온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집을 떠났던 미나리가 문 앞에 서 있다. 준모는 그녀가 돌아오면 모든 게 달라질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끝의 시작일 터였다. 그녀의 연락을 받고 둘은 얼마나 설레는 마음으로 장을 보고 환영 파티를 준비했던가. 문이 벌컥 열렸다. 현관문을 열고 나타난 미나리는 쑥스럽게 웃었다. 그녀를 눈물과 함께 환영하려던 남주와 준모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잘 차려입은 미나리 옆에 선 검은 도복의 남자는 분명히 검객이었다.


    “이렇게 한가족이 모여 식사 자리를 함께한 게 얼마나 오랜만인지 몰라.”


    남주는 짝, 하고 손뼉을 쳤다. 누나는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 걸까, 하고 준모는 중얼거렸다. 준모는 남주와 미나리의 미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달라진 게 없는 미나리의 모습도, 묵묵히 질긴 고기를 써는 자기 자신도, 잊어버렸던 추첨으로 받은 커다란 김치냉장고 같은 저 검객도. 저녁 식사는 조용한 분위기 아래서 진행되었다. 검객은 얼굴을 가린 헝겊을 풀지도 않은 채 가만히 있었다. 남주는 미나리와 준모를 입양한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나이프를 움직이며 말했다. 너희들은 다른 보육원 아이들에 비하자면 어딘가 품격이 있었지. 원장 엄마가 되면 정말 별별 아이들을 다 본다니까. 물론 그렇다고 그 아이들을 차별 대우했다는 건 아니지만. 이 엄마가 자기 자신에게 좀 깐깐해야지. 네가 돌아와서 참 기뻐. 미나리는 그저 실실 웃었다. 준모는 맞은편에 앉은 두 남녀를 노려봤다. 이따금 그들과 눈이 마주치면 눈빛만으로 뇌를 파괴하고 내부 장기를 헤집어놓았으나 그들은 뛰어난 재생력으로 상황을 반전시켰다. 둘은 눈빛에 담긴 뜻을 알아볼 눈치가 없었다.


    “제가 바깥을 떠돌면서 유일하게 사귄 친구예요. 검객 씨.”


    검객이라 소개된 검객은 헝겊을 내리고 꾸벅 인사했다. 그는 예의가 바르고 품행이 단정했다. 눈만 봐도 잘생긴 얼굴이 분명했다. 저 남자는 누나와 잤을까. 준모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황당한 상상이었다.

    얼추 식사가 마무리되자 남주는 그릇을 치우고 포트 와인과 투움바 파스타를 내왔다. 급격히 공기가 가라앉았다. 미심쩍은 얼굴로 면을 건드리던 검객이 두 접시째를 해치우는 동안, 그녀는 미나리에게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털어놓길 요구했다. 중요한 대목이었다. 준모는 고개를 숙이고 자기 앞의 접시에 묻은 소의 핏물을 내려다봤다. 남주의 검은 눈동자에는 벽이 서렸다.

    미나리는 입을 열었다. 그녀는 남주가 아이들을 모두 내보내고 보육원의 문을 닫았을 때부터 집을 나가 세상을 떠돌았다. 단지 무작정 길을 걷다 보면 친부모는 아니더라도 길의 끝에서 모르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이유였다. 미나리는 식탁 밑에서 발가락으로 준모의 종아리를 두 번 찔렀다. 둘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정해둔 암시였다. 거짓말, 이라는 신호였다. 그녀의 목적은 따로 있었으니까. 무궁화호를 타고 사방팔방 전국을 떠도는 동안 그녀는 점차 해안가에 찾아가는 횟수를 늘렸다. 태초의 광활함에 그녀는 처음 집을 나왔던 목적 따위는 잊어버렸다. 어쩌면 다 먹은 짜장면 그릇을 핥던 준모를 만나 함께 보육원에 들어가기 전, 그녀에게 주어졌던 무신경함에 또다시 취해버렸던 걸지도 몰랐다. 자유라는 이름의. 아예 마지막 일 년째엔 그녀는 바다와 결혼한 것처럼 온종일 밀려들고 부서지는 파도만 바라보며 살았다. 새하얀 포말에 자기 자신은 완전히 내던져버린 채로. 준모는 미나리가 종아리를 두 번 찌르기를 바랐다. 그녀는 싱긋 웃더니 그의 종아리에 대고 부드럽게 발바닥을 쓸었다. 준모는 쌍욕을 간신히 참았다.

    어느 날 검객은 뒤늦게 세상에 나왔다. 그는 자신이 객잔에서 마지막으로 나온 검객임을 알았다. 이미 그와 같은 검객은 차고 넘쳤다.


    “드물지는 않죠. 흔하지도 않지만.”


    검객은 남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 준모는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아까부터 숨길 생각이 없어 보이던 기색은 식탁 위의 검을 하얗게 질릴 정도로 세게 쥔 주먹에서 더욱 심해졌다. 준모는 다 먹은 병을 아래로 슬그머니 내려 역수로 쥐었다. 남주는 처음의 기세는 어디로 갔는지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었다. 준모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한쪽 눈으로 쉰하나의 남주를 바라봤다. 새치가 하얗게 셌지만 늙지 않았다. 지지 않은 꽃잎에 하얀 눈만 내려앉은 것 같아서, 조금만 털어낸다면 금방 빛깔을 되찾을 것처럼. 준모는 남주가 팔짱을 낀 옛날 사진 그대로 하얀 가운을 입은 모습을 상상했다. 

    검객과 그녀는 저 멀리 옹도 등대가 보이는 신진도항에서 만났는데, 일평생 죽순 비빔국수만 먹고 자란 검객은 미나리가 허름한 가게에서 사준 꼼장어 구이를 보며 기겁했다. 알루미늄박 위에서 흐느적거리는 생선 살은 꼭 변종 지렁이 같았다. 그래도 먹어보니 맛은 있어서, 검객은 새 지평을 열어준 미나리를 졸졸 따라다녔다고 했다. 남주는 가만히 듣다가 입을 가리고 눈웃음을 지었다. 보육원의 모든 이들이 사랑해 마지않던 그 눈웃음을. 그때였다. 식탁에 바람이 불어왔다. 준모는 어딘가 낯익었다. 보육원생 모두가 타 시설로 흩어지기 전, 단체 사진을 찍은 적이 있었다. 막 동이 터오는 검푸른 하늘 아래서였다. 그때 소용돌이쳤던 공기는 아주 먼 세계의 것이었다. 두 명의 직원은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어떤 아이는 남주를 무책임하다고 욕했다. 어떤 아이는 말을 아꼈다. 두 아이는 두 손을 맞잡고 선물을 교환했다. 미나리는 그들 속으로 섞이지 못한 채 안타까운 눈길만 던졌다. 미래라는 이름의 악몽 앞에서 아이들은 비로소 저마다의 운명은 그들 각자가 감내해야 함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들이 다 함께 고유한 유체의 흐름을 간직한 것은 분명했다. 아직 어려도 그것이 일종의 자부심으로 남으리란 것은 그들 모두 직감할 수 있었다. 준모가 멈칫한 것은 바로 그 바람 때문이었다. 검객은 자리를 박차고 식탁으로 뛰어들었다. 팔이 향하는 곳 끝에 남주가 있었다. 미나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준모는 황급히 그를 내리찍으려 병을 높이 들었다.


    “엄마, 엄마. 여기 계셨습니까. 어디 가셨었나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모두가 어안이 벙벙했다. 검객은 두 팔로 남주를 껴안고 엉엉 울었다. 갸름한 얼굴이 눈물 콧물로 망가졌다. 그녀는 그저 어색하게 웃으며 이거 좀 떼어줘, 하는 눈길로 미나리와 준모를 번갈아 쳐다봤다. 

    조금 진정이 되고 난 이후에, 검객은 바닥에 머리를 박고 절을 올렸다. 이제 일어나도 된다고 타일러도 꿈쩍도 안 했다. 남주는 검객 앞에 쪼그려 앉고 그의 머리를 두드렸다. 검객은 머뭇거리며 일어섰다.


    “죄송합니다, 제가 아는 분과 너무 닮으셔서….”


    남주는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는 분이 누구신데요?”


    검객은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저희를 저희로 길러주신 분이요.”


    남주는 자신의 이름을 김남주, 라고 밝히곤 준모와 미나리를 각방으로 몰아냈다. 검객은 갈 곳이 없어 난처해했다. 말도 안 된다며 날뛰는 준모를 무시하고 남주는 검객에게 자신의 안방을 내주었다. 손님이잖니. 거실에서 불을 끄고 일찍 잠든 남주 옆에서 준모는 식칼을 들고 밤을 지새웠다. 새벽이 되자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였다. 준모는 허공을 걷듯 소리 없이 움직이는 검객을 그냥 내버려 뒀다. 검객은 고개를 꾸벅이곤 현관문을 열고 사라졌다. 보육원의 아이들 속 저 검객의 얼굴이 있던가? 아니었다. 준모는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준모는 신경질적으로 줄을 잡아당겼다. 작업의 막바지에 전기톱의 줄은 자꾸만 중간에 걸렸다. 노란 안전모를 쓴 작업자들은 그의 우스운 꼴을 보며 피식거리며 지나갔다. 연료가 새는 실수는 현장의 초짜들이나 하는 거였으니까. 준모의 팔뚝 위에 나타난 검은 자국의 정체는 구슬땀과 뒤섞인 휘발유였다. 알고 보니 전방의 안전장치를 해제하지 않은 게 문제였다. 장치는 짜증이 날 정도로 쉽게 올라갔다. 누굴 놀리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오늘치 대나무는 거의 다 베었다 싶어 준모는 욕심을 버렸다. 그는 몸에 묻은 찌꺼기를 닦아내고 담배를 꺼내물었다. 저 멀리 노을 아래 이십오 미터 되는 대나무가 허리가 잘려 넘어가고 있었다. 준모는 모든 것이 질린다고 생각했다. 끝없이 자라나는 대나무 군락도, 연일 투입되는 인부들의 무의미한 작업도. 정부는 저 드넓은 군락이 사실은 소수의 몇몇 개체일 가능성을 제시했다. 무수한 대나무가 단일한 뿌리로 연결되어 있다는 가설이었다. 준모는 외려 그러길 바랐다. 저것들 모두가 각각의 존재라는 생각은 상상만으로 체내의 영양분을 전부 빨아가 버렸다.

    준모는 샤워장에서 빠져나왔다. 일당을 받아들고 돌아가는 현장의 입구에 남주가 서 있었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말없이 걸었다. 준모는 집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 남주의 나들이가 신경 쓰였다. 정류장에서 그들은 버스를 타고 열네 정거장을 탔다. 내리니 공무원이 가족들과 함께 주말마다 휴식을 즐기러 오는 공원이었다. 자전거를 탄 동호회 무리가 강변을 끼고 지나갔다. 아빠와 아이는 네트도 없이 배드민턴을 잘만 쳤다. 한 단락씩만 남은 대나무가 듬성듬성 보였다. 그들은 계속해서 걸었다.


    “그렇게 돈 벌어서 어디에 쓰려고 그러니?”


    준모는 대답하지 않았다. 남주에게 주는 용돈을 제외하면 그는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고 저금했다. 그는 남주가 보내오는 힐난조의 눈길을 무시했다. 그때 그들의 옆으로 검객이 지나갔다. 중국풍 도복도 없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지만 세련된 검집에 담긴 검을 든 검객이었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사람들 틈을 요리조리 피해 달아났다. 뒤따르는 두 경찰은 호루라기를 불면서 검객을 쫓았다. 검객의 품에는 플라스틱 통에 담긴 테니스공이 잔뜩 있었는데, 그는 활짝 웃으면서 자신은 정의를 실현하고 있다고 외쳤다. 세상의 시민 모두에게 일인 일 테니스공을 보급하는 게 협객이 해야 할 마땅한 도리라고 소리쳤다. 곧 아무 브랜드 스포츠클럽에서 훔친 공들이 사방에 흩뿌려졌다. 경찰들은 더욱 열이 받아 삼단봉으로 검객에게 전치 육 주를 선사해주겠다며 게거품을 물었다. 공무원들은 검객을 향해 환호하면서 엄지를 치켜세우고 공을 주웠다. 준모도 하나 주웠다. 내친김에 준모와 남주는 캐치볼을 시작했다.

    처음에 준모는 멀찍이 떨어진 남주가 쉽게 공을 잡을 수 있도록 언더 핸드로 공을 던졌다. 남주는 잘 잡았다. 몇 번 반복한 후 그는 언더에서 어퍼로, 강속구를 날리듯 공을 던졌다. 손이 따갑다며 이마를 찌푸리긴 했지만, 여전히 남주는 잘 잡았다. 아예 한 손으로 준모가 전력으로 날린 공을 잡아낼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반대로 남주가 공을 던질 때는 일곱 살 아이의 공처럼 궤적이 태평했다. 준모가 남주를 향해 가슴 안쪽으로 향하는 직구를, 급격히 떨어지는 커브볼을 날려도 마찬가지였다. 남주는 시종일관 차분히 공을 던졌다. 노을이 땅 밑으로 꺼질 즈음엔 준모가 땀을 더 많이 흘렸다. 둘은 캐치볼에 열중하느라 해가 지는 것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어느 순간 전구가 암전되듯 세상이 꺼졌다. 반구 모양의 천장과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은 대나무의 윤곽 사이에 원근감이 있다는 게 준모는 신기했다. 나무는 끝없이 자라났다. 하늘에선 간혹 대나무 잎사귀가 팔랑거리며 떨어졌다. 좋지 않은 신호였다. 애초에 그는 일찍 남주를 데리고 돌아갔어야 했다. 모호한 말들이 목구멍에서 뒤엉켜 다시 절벽 밑으로 떨어졌다. 준모는 남주의 팔을 붙잡았다. 이미 늦었다. 남주는 성큼 다가온 대나무 군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 준모는 남주가 차라리 숲속으로 사라진 친딸의 이름을, 누나의 옷자락이라도 발견하기를 바랐다. 최소한 신주는 살아있었으니까. 아니었다. 남주의 턱을 잡고 돌린 준모는 그 눈동자에서 똑같이 대나무 숲으로 간 여자의 환영을 보았다. 남주의 어머니였다.

    준모는 미나리가 돌아오기 전까지, 남주와 단둘이 살았던 과거를 떠올렸다. 집에 있는 모든 것들은 그들의 소유물이었고 준모는 그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 남주는 자주 준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동시에 그의 귓속으로 마치 동화책을 읽듯 따뜻한 납덩어리와도 같은 말을 흘려주었다. 준모는 호기심이 충족되어 웃었고 감히 공감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 때문에 울었다. 환자고 차트를 볼 당직 간호사고 곯아떨어진 새벽, 병원의 당직실에 밤새 술을 마신 두 남녀가 숨어들었다. 장차 대학병원의 산부인과 신임 교수로 발령이 날 스물넷의 남주와 남자친구는 간이침대에 누워 함께 미래를 약속하고 밤을 속삭였다. 그 밤의 말 중 대부분은 이루어졌다. 남주는 서른한 살에 신주라는 이름의 딸을 낳았다. 혼자서는 견디기 어려운 일을 그들은 함께 헤쳐나갔다. 너무 행복했단 것만 제외하면 결혼생활은 양호했다. 서른한 살에 교수로의 부임은 빠른 편이었다. 다만 아쉬웠던 것은 필연적으로 찾아올 죽음이 그녀의 어머니에게, 바로 그때 찾아왔다는 것뿐이다. 신주가 일곱 살 때였다. 발견하고 나니까 이미 암이 말기여서 손을 쓸 방도가 없었다. 수술은 실패 확률도 높았을뿐더러 성공한다 한들 사실상 한 차례의 거친 파도를 이겨낸 것에 불과했다. 더 거대한 해일이 몰려오고 있었다. 주변의 모두가, 심지어 남주도 어머니에게 호스피스 병동을 권했다. 고통을 덜고 주변을 정리할 시간을 갖자는 말이었다. 총 다섯 차례에 걸친 설득 끝에 남주는 어머니가 내던진 포크에 맞아 귀에 열상을 입었다. 기어코 수술을, 지옥을 겪겠다는 여장부의 고집에 남주는 그녀 몰래 어머니를 호스피스 병동에 쳐넣었다. 문제는 거기서 일어났다.

    어머니가 실종되었다. 마지막 목격자인 병동 앞 구두장이는 병원복을 입은 그녀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고 진술했다. 절뚝이지만 어딘가 절개 있는 모습으로 걸었다고 했다. 잘못된 방향 어디요? 그는 손가락을 들어 바리케이드가 쳐진 이 차선 도로를 가리켰다. 저긴 아무것도 없는데, 그게 뭐가 문제라고. 남주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그곳엔 대나무 숲이 있었다.

    당일에 잡힌 급한 수술이 있어 남주는 병원으로 가야 했다. 남주가 집도의로서 수술실에 들어가기 직전 경위를 파악한 젊은 경찰이 전화를 걸어왔다. 사인은 압사였다.


    “이, 군락 깊은 곳에는 대나무 간격이 엄청나게 빽빽하거든요. 성인 남자면 팔도 제대로 못 들어가요, 거기. 그리고 이게 단단하기는 또 얼마나 단단한지…. 아무래도 어머님이 착각을 하신 것 같아요. 체중이 삼십 킬로 중반이시던데, 많이 마르셔도 그런 데는…. 그 안에 끼어 계셔서 저희도 꺼내는 데 고생을 좀 했습니다, 이거.”


    수술실 안은 더웠다. 원래도 더웠는데 더 더웠다. 남주는 부풀어 오른 환자의 배를 내려다봤다. 남주는 상태가 좋지 않으면 교체해도 된다는 동료 교수를 뿌리쳤다. 그녀는 정말 괜찮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비교적 일찍 교수가 돼서 그랬다. 환자는 자연분만에 실패한 임산부였고 제왕절개를 마치고 임신 초기부터 인지한 자궁 내부의 근종도 제거해야 했다. 다음 달이면 직접 칼을 들고 보조를 시작하는 인턴들이 옆에 있었다. 따라서 시범을 보여야 하는 건 그녀였다. 마취는 성공적이었다. 마스크들은 남주를 기다렸다. 남주는 메스를 들었다. 라이트의 빛을 받은 칼은 투명하게 빛났다. 정말로 무엇이든 벨 수 있을 것 같았다. 복부를 절개했다. 수술실의 전자음이 남주의 귀에 거슬렸다. 이제 자궁벽을 가를 차례였다. 조심해야 하는 단계였다. 자칫 잘못했다간 메스가 태아를 다치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런 일은 가끔 일어났다. 어머니는 그 사이로 무엇을 보았던 걸까. 남주는 칼을 움직였다. 아니, 사실 정말 보았다면 그녀는 뚫고 지나갈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왜, 스키 선수들도 나무를 보는 게 아니라 자기가 가야 할 길을, 목표물을 본다잖아. 그럼 당신은 그냥 그렇게 무작정. 갈라낸 틈새 사이를 들여다봤다. 무언가 보였다. 작고 가녀린 무언가였다. 전자음이 점점 더 거슬렸다. 남주는 메스를 곡선으로 휘었다. 절개를 진행했다. 베었다. 긴 터널을 빠져나온 것은 전공의가 강제로 남주의 팔을 쳐올렸을 때였다. 전자음이 요란하게 울려댔다. 

    자궁 근종의 영향으로 태아가 지나치게 자궁벽 가까이 붙어있던 것이 화근이었다. 태아는 뒷머리에 생긴 반월 모양의 긴 흉터를 반영구적인 장애와 함께 안고 살아가야 했다. 소송이 걸렸다. 남주는 병원장을 만나 긴 부연설명과 함께 안타깝지만 우리네 사정이 이렇게 되었다, 라는 말을 듣기도 전에 사직서를 냈다. 이상하게도 그녀의 마음엔 약간의 불편함밖에 남지 않았다. 남주는 그게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머리가, 피부가, 온몸의 거죽이 팽팽하게 조여진 듯 당겼을 뿐이었다. 덕분에 남주는 더 젊어 보였다. 그건 정말이지 이상한 감각이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 후 남주는 사회복지사 2급 자격증을 땄다. 퇴직금으로 무작정 보육원을 차리겠다는 그녀를 남편은 이해하지 못하고 떠났다. 새롭게 연 보육원의 첫날, 남주는 자신의 딸 신주를 다리에 올려두고 계단에 걸터앉아 햇빛을 마셨다. 그때는 아직 무엇을 후회해야 하는지, 무엇에 아파해야 했는지 몰랐다고 후에 남주는 준모에게 말했다. 그가 아닌 과거의 그녀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고 준모는 느꼈다. 혹은 그게 그거이거나.


    “신주는, 숲 안에 살아있는 거겠지?”


    어둠 속에서 남주는 준모에게 물었다. 준모는 그녀를 보며 웃었으나 어두워서 표정은 전달되지 않았다. 준모는 말했다.


    “네.”

 

    태평한 날이었다. 거리에 가끔 검객이 보였으나 잘생긴 검객은 없었다. 미나리에게서 데이트하러 나가자는 문자를 받았을 때, 준모는 흔쾌히 수락했다. 딱히 일감도 없었다. 대나무 숲의 확장도 지금은 휴식기였다. 선크림을 바르고 가르마를 타고 스프레이를 뿌렸다. 이러나저러나 미나리도 못 본 지 오 년이 다 되었다. 그녀를 만나지 않으면 휴일에 무얼 하겠는가. 준모는 지금껏 쉬지 않고 일해왔다. 게다가 여정을 떠날 준비가 점차 완료되고 있었다. 여행용 배낭이 하나둘 쌓였다.

    미나리는 전봇대에 기대어 싱긋 웃었다. 햇살에 비친 예쁜 웃음이었다. 준모는 그녀가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손을 흔드는 모습이 제일 좋았다. 맞잡은 손가락 끝의 감촉은 더더욱 말할 것도 없었다. 자신보다 한 살 많아도 그럴 때면 영락없는 소녀였다. 둘은 손을 잡고 예약해둔 수목원을 향해 걸었다. 이따금 대나무 군락의 범람이 과격 환경주의 단체 최종계획 실행의 전 단계라는 소문 때문에 무차별적 테러가 일어나곤 했으나 수목원은 조용했다. 커플들은 오전부터 와 조용히 꽃을 구경하고 사진을 찍었다. 사이 좋은 노부부도 몇몇 있었다. 준모는 부러운 눈치로 그런 노부부를 바라보는 미나리를 보며 피식 웃었다. 미나리는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 그때 식탁에서 나한테 화났어?”


    준모는 시치미를 뗐다.

    

    “설마. 바다 보고 싶으면 보는 거지.”


    준모는 미나리에게 주문했던 부탁을 떠올렸다. 대나무 숲 안쪽의 신주와 연락할 방법을 찾아달라는. 미나리는 많은 일을 시도했다. 안쪽으로 편지를 적어 수십 개의 종이비행기를 날리기도, 진귀한 약초를 찾는 탐험가에게 사람을 찾아달라고 부탁하기도, 어디선가 고성량 마이크를 구해와 온종일 신주의 이름을 외쳐보기도 했다. 별의별 노력이 허사로 돌아갔다. 애초에 객잔의 위치를 특정 지을 수가 없었다. 준모는 조약돌 속으로 발을 넣어 발등 위에 돌을 몇 개 올렸다. 자연스레 모두 떨어졌다. 한때는 간절했었으나 돌이켜보니 아니었다. 사실상 그가 미나리의 얼굴을 한동안 보지 않을 명분에 가까웠던 부탁이었다. 남주에게 둘이 남매로 입양되기 직전, 열여섯 살의 그녀는 준모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다. 당황스러웠고, 준모 자신도 진심을 확인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어떻게 그녀를 혼자 대나무 군락 속으로 들여보낼 생각을 한 걸까. 미나리는 무슨 마음으로 그걸 수락했을까. 준모는 미나리의 손을 꽉 쥐었다. 그는 자책감과 더불어 고마움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녀는 그저 말없이 웃었다.


    “우리, 언제쯤 정식으로 만날 수 있는 거야?”


    진지한 물음이었다. 준모도 웃음기를 지우고 대답했다.


    “남주가 너처럼 바다 앞에 서면.”


    “어려워. 다시 말해줘.”


    “남주가 우리의 조카가 되면.”


    미나리는 작은 튤립 무리 앞에 쪼그려 앉았다. 준모는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지곤 뒤를 돌았다. 화원의 입구에 도복을 입은 검객이 서 있었다. 검객은 화원을 가로질러 곧장 준모와 미나리를 향해 걸어왔다.


    “꽃 구경 안하냐?”


    “전 대나무가 좋습니다.”


    “그런 흉물을 좋아하는 인간은 너희밖에 없을 거야.”


    온실의 공기가 정체되어 따뜻했다. 둘은 서로를 마주한 채 섰다. 누구도 눈빛이 곱지 않았다. 경비원이 검객을 보았으나 하품을 하며 지나갔다. 태평한 낮이었다. 둘은 꽃에 빠져든 미나리를 둔 채 밖으로 나갔다. 폴리우레탄 발판이 깔린 놀이터가 보였다. 둘은 그네에 탔다. 검객이 타는 법을 몰라 준모가 뒤에서 밀어줘야만 했다. 검객은 키가 컸으나 균형감각이 좋아 곧 알아서 잘 탔다. 준모가 앞뒤로 한번 움직일 동안 검객은 하늘 높이 떠올랐다가 내려왔다. 준모는 미나리를 따라 집에 온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저희 어머니께서 많이 아픕니다. 검객들은 모두 남자라 어느 부위가 문제인지 감히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귀하의 어머님께서 과거에 산부인과 의사라고 들었습니다.”


    준모는 심드렁했다. 검은색이 쌩 지나갔다.


    “검객은 남자아이만 받나?”


    “간혹 여자아이가 오면 객잔의 손님으로 응대하죠. 먹이고 재운 후에 숲 밖으로 내보냅니다.”


    “나는 너희를 불쌍하게 여겨. 그렇다고 그게 네가 거짓말을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야.”


    검객은 한순간에 멈췄다. 준모는 그의 복면이 너무 답답해 보여서 확 벗겨버리고 싶었다. 간신히 참았다. 그는 참을성이 좋았다.


    “제가 당신처럼 겉과 속이 다른 인간처럼 보입니까?”


    “별로. 넌 겉밖에 없는걸. 내 말뜻은 이거야. 낮의 검객과 밤의 검객은 다르거든. 검객은 밤에 만나야만 그의 입에서 진실한 언어를 들을 수 있어. 밤에 그를 만났다는 건 둘 중 하나는 죽는다는 거니까. 너, 객잔의 주인이 아픈 건 어떻게 알았지?”


    “그야 어머니께서 직접….”


    “말해준 적 없지? 내색한 적도 없을 거고.”


    검객은 어리둥절해졌다. 준모는 입맛이 썼다. 멀리서 대낮부터 소주병을 들고 다니는 노숙자가 놀이터에 들어왔다. 그는 그네 쪽을 보더니 발라당 드러누웠다. 실제로 폴리우레탄 바닥은 푹신푹신해서 잠들기 좋다. 검객은 준모를 노려봤다.


    “당신은 객잔의 주인과 무슨 관계입니까?”


    “우리? 너희 말로 하면 호적수지, 우린.”


    준모는 낄낄 웃으며 상대방을 곁눈질했다. 검객은 뭔가를 눈치챈 것 같았다. 다음 질문이 중요했다. 준모 역시 그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녀가…그녀가 살아있다는 것을 당신은 어떻게 알았습니까?”


    준모는 다음과 같이 판단했다. 이 자는 대나무 군락 안으로 들어가기 전의 누나와 나의 관계를 일면식이 있는 사이로 특정 지었다. 친구, 연인, 혹은 가족으로. 준모는 노숙자가 마시는 술을 뺏어 마시고 싶어졌다.


    “소문이 돌았잖아.”


    “무슨 소문?”


    “검객이라는 놈들이 사람을 죽이지 못한다는 소문이.”


    바람이 불었다. 태평한 한낮이었다. 요구르트 아주머니는 출근도 등교도 하지 않는 두 젊은이를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준모는 조금 억울했다. 여자친구와 함께 데이트를 즐기러 나왔다가 웬 검을 든 괴한에게 끌려 나왔을 뿐인데. 검객은 미동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준모는 이참에 조금 더 말해주기로 했다.


    “분명히 사람 여럿 잡아먹은 대나무 숲에서 검객이랍시고 나왔는데, 검으로 폼만 잡고 있어. 처음에야 호들갑이지, 곧 다들 저게 무슨 얼간이들인가 했지. 그런데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났어. 너도 알려나?”


     검객은 고개를 저었다.


    “첫 번째는 검객 두 명이 길거리에서 시비가 붙은 거야. 기억하기론 사시미와 스테이크 중 어떤 요리에 더 높은 가치가 담겨있는가, 하는 주제였대. 재료의 신선함을 갓 잡았을 때의 상태 그대로 유지하는 일의 어려움과 타지 않을 만큼의 절묘한 굽기 솜씨 중 무엇이 더 우위냐는 거였지. 행인들은 그것도 구경거리라고 둥글게 에워쌌어. 대화도 빙글빙글 돌았지. 열기는 더해지는데, 갈수록 어느 한쪽도 타협이 안 되니까, 잔뜩 흥분한 둘은 서로를 향해 검을 꺼내 들었어. 일반인들이 평소에 진검을 볼 일이 얼마나 되겠어. 경찰을 부르고 난리가 났지. 근데 검객들이 그걸로 그만둘 리가 있나. 말려도 말려도 결투는 시작했어. 그리고 거기 있던 모두는 지켜봤지. 검으로 이뤄지는 예술을. 금속과 금속이 부딪쳐 튀는 불꽃을, 맑고 청아하면서도 청중 가슴 깊숙이 때려 박혀 그들이 금과옥조처럼 지켜야 할 일상의 세계가 부서지는 소리를, 서로를 해치지 않고 상대방의 실력을 가늠해볼 수 있는 순수한 형태의 기술을. 그들은 서로를 뛰어넘고 거리를 달리며 검을 겨눴어. 그건 우리가 한 번씩 품어봤을 무와 협 그 자체였지. 둘은 탈진할 때까지 검을 겨루고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어. 곧 객잔에서 나온 모든 검객에게 그런 실력이 있음이 밝혀졌지.”


    검객은 여전히 조용했다. 준모는 노숙자에게 다가가 한 모금을 요청하고 소주를 받아먹었다. 돌아와 말을 이었다.


    “두 번째는 검객이 당한 일이었어. 두 검객의 결투가 동영상 사이트에 업로드되고 난 이후, 그들의 팬임을 자처하는 이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어. 허리춤엔 기다란 막대기를 들고 도복을 사 입었지. 그런데 얘네가 행패를 좀 부렸어야지. 검객이 대나무 숲에서 왔다는 것도 마이너스 요소로 작용했을지 몰라. 곧 검객들을 곱지 못한 눈초리로 보는 사람들이 늘어갔어. 그런 사람들이 모여 린치 집단을 만든 거야. 어쩌면 검객은 사회적 약자였을지도 몰라. 주민등록번호도 없는 주제에 관공서의 요구에는 콧방귀를 뀌었거든. 법의 테두리 바깥이었단 소리지. 곧 집단이 떼거지로 모여들어 검객을 때려눕히는데, 희한하게 그 어떤 검객도 진검을 뽑아 들지 않았어. 맞아서 정신을 잃는 순간까지 검집 속의 검은 그대로였지. 어중이떠중이들이야 반항했지. 그래서 따라쟁이들은 얼마 못 갔어. 그들의 미래는 사람들에게 죽도록 얻어맞거나, 막대기를 휘둘러 정체성을 잃거나 둘 중 하나였으니까.”


    “궁금증을 못 참겠더라고. 아무 검객이나 붙잡고 데려와 지금 너처럼 얘기를 나눴어. 객잔의 주인에게서 뭘 배운 거냐고. 그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지. ‘검은 마땅히 검끼리만 부딪쳐야 한다.’고.”


    “그게 제 어머니의 과거와 무슨 상관입니까?”


    “넌 알 것 없지, 가족사인데.”


    “아하, 가족이었군.”


    이런 시발. 준모는 중얼거렸다.

 

    어둠에 잠긴 집은 조용했다. 미나리와 남주는 자고 있었다. 준모는 혼자 식탁에서 밥을 먹었다. 밥그릇을 달그락거리며 숟가락을 놀렸다. 몸에선 기름 냄새가 났다. 요즘 들어 그의 작업은 진척 속도가 느렸다. 자연스레 일당도 줄어들었다. 작업이 끝나고, 그는 작업반장에게서 그렇게 해이해지면 언제든 저 대나무처럼 잘려나갈 수 있다는 걱정 섞인 꾸중을 들었다. 고마웠다. 한편으로 준모는 사람의 솜씨란 언제 고갈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올지 모를 거대한 석유 공동 같은 것이라고 느꼈다. 자신의 적수인 대나무 군락도 훌륭하게 가지를 확장해나가고 있지만, 단일한 정신에 좌지우지 받는 불안정함에 아마 자신과 같은 고충을 가지고 있을 터였다. 준모는 젓가락을 든 채 덜덜 떨리는 오른손을 내려다봤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돈을 벌려다가 목표 그 자체가 된 군락을 씻어낼 수 없어졌다. 자다가도 전기톱이 나무를 갈아버리는 감각에 몸서리가 쳐졌다. 모든 게 가물가물했다. 신주도, 남주도, 미나리도. 다만 오래도록 남을 자신의 뼈다귀를 감히 짐작해보라고 한다면, 그건 자신할 수 있었다. 그는 밥을 크게 떠 반찬 국물에 묻혀 입에 넣었다. 숙주나물과 조기구이 위로 대나무 파편이 떨어졌다. 그는 조각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잠시 후 일어서서 식물의 잔해와 기름을 물로 흘려보냈다. 

    준모는 방에 누워 이불을 정수리까지 올렸다. 낮은 천장 아래에서 꿈을 꾸었다. 그는 걸어서 막 객잔에 도착한 참이었다. 정말이지 너무나 힘든 여정이었다. 강산이 마구마구 바뀌었을 시간이 흘렀다. 대나무 군락에선 잎사귀 대신 육십 년에 한 번 핀다는 꽃잎이 떨어져 내렸다. 머저리 검객들은 제가 제 검에 베인 상처를 들며 이 정도 상처는 괜찮죠? 라고 울먹였다. 미나리는 자기보다 먼저 도착해서 신주와 수다를 떨고 있었다. 준모야, 여기야 여기. 좌석을 두들기는 미나리의 성화에 못 이겨 준모는 쑥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오 년 만에 보는 신주는 준모를 째려보곤 흥, 하며 고개를 돌렸다. 다섯 손가락이 떨렸다. 드드드드 너무 세게 떨려서 그는 언제 손가락이 여섯 개가 되었지, 하고 의아해했다. 다시 보니까 다행히 다섯 개였다. 준모는 양손의 손가락을 포갰다. 팔을 내리고 신주를 향해 상체를 숙였다.


    “정말 미안해, 누나. 미안해.”


    “내가 왜 네 누나야? 넌 보육원에서 자랐잖아.”


    준모는 숫제 우는 걸로 보일 만큼 얼굴을 울먹였다. 미나리는 그조차도 귀엽다고 좋아했다.


    “그렇지만, 그 논리면 저 얼치기들도 누나를 엄마라고 부를 자격이 없어. 쟤네 다 고아잖아. 난 결국 남주에게 입양됐는걸.”


    어떻게 그렇게 심한 말을. 검객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벌어지다 못해 턱이 빠져버린 이들도 꽤 있었다. 준모는 그들에게 크게 사과했다. 다행히 대부분 입이 커져서 큰 사과도 잘 들어갔다. 아닌 사람도 있는 모양이었다. 어디선가 비명이 들려왔다. 신주는 샐쭉이며 물었다.


    “뭐가 미안한지 직접 말해.”


    준모는 신이 나서 말했다.


    “그야 물론 누나를 대나무 숲으로 밀어넣은 짓 말이야.”


    비명이 커졌다. 섬뜩한 음성이 꿈 속 그의 머리채를 잡고 들어올렸다.

 

    낯선 형체가 어둠 속에서 윤곽을 드러냈다. 대나무처럼 길고 호리호리했다. 달빛을 받은 검은 나신을 드러냈다. 겁에 질린 미나리의 목에 가까이 놓인 건 익숙한 검이었다. 검객은 방에서 급하게 뛰쳐나온 준모와 남주를 바라봤다. 그들 사이에는 폭이 넓은 강이 놓여있었다. 검객의 두 눈이 불타올랐다. 동시에 검을 쥔 손이 덜덜 떨렸다.


    “엄마가 죽어가. 그리고 그건 당신들 때문이야.”


    준모는 다급해졌다. 미나리의 하얀 목에 놓인 검을 보자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이성적인 사고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나는 검객으로서 어머니 앞에서 선서했어. 약자를 보호하고, 은인에겐 두 배로 은혜를 갚고, 원수에겐 받은 만큼만 돌려주고, 비겁하게 공격하지 말고, 올바르다 믿는 대의를 추구하고, 가족을 소중히 하겠다고. 가족을 지키겠다고.”


    “알겠으니까 칼은 내려놓고….”


    “전부 너 때문이었어.”


    검객은 인쇄된 사진을 바닥에 내던졌다. 그가 버려진 보육원 건물을 다녀온 게 틀림없었다. 여전히 밤이었기에 잘 보이지 않았다. 준모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신주와 남주와 그 사이 준모가 찍힌 사진일 터였다. 제공된 것 이상을 넘보던 욕심쟁이의.

 검객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자신의 것과 다른 검을 바닥에 내려놓곤 숲으로 가 있겠다고 말했다. 준비를 마쳤다면 내려오라는 말과 함께. 검객이 미나리를 챙겨 나가고, 거실에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준모의 몸이 흔들렸다. 균형을 유지하지 못했다. 온몸의 혈관을 꽉 쥐었다가 일시에 놓아버린 해방감이 뒤늦게 밀려들었다. 그는 화장실로 달려가 머리에 물을 부었다. 몇 번이고 들이부었다. 나중엔 물을 받아 거기에 얼굴을 담갔다. 자신이 똑똑하다 생각했다. 맞을지도 몰랐으나 모두 부질없었다. 그는 격정 속에서 마비된 몸을 저주했다. 밖으로 나오자 남주가 보였다.

    남주는 검을 주워들었다. 검은 무척 길어서 검집에서 다 뽑는 데에만 꽤 시간이 흘렀다. 준모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녀는 천천히 검을 움직였다. 마치 아주 오래전 긴장을 놓지 않고 팽팽하게 조였던 매듭을 조금씩 풀어내듯이. 상단 베기 자세로 들어 올린 후 공을 들여 굴곡 없는 직선을 그었다. 거실을 배경으로 한 그림이었다. 검무는 점차 가속도가 붙었다. 여러 번 고쳐 잡아야 했던 예비 자세도 하나로 수렴했다. 검은 벨 수 없는 것들을 갈라냈다. 칼날이 공기를 베었다. 누가 검객을 상대하게 될지는 정해져 있었다. 준모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는 남주의 검술과 자신의 전기톱질을 비교해봤다. 대나무를 자르는 투박한 동작은 모욕으로 여길 만큼 검술은 아름다웠다. 입이 열렸다. 준모는 울었다. 뺨을 타고 눈물이 발을 질질 끌며 떨어졌다. 문득 그게 그 자신의 첫 눈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기억나지 않는 친부모에게 버려졌을 때도, 첫 친구가 생겼을 때도,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을 때도, 미나리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확인했을 때도 그는 울지 않았다. 지금도 딱히 이유는 없었다. 검의 단면에 반사된 달빛에 매혹되었을 뿐이었다.


    먼저 다가온 건 신주였다. 준모와 미나리가 열셋, 열네 살에 막 보육원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열여섯이었다. 남주는 원장인 주제에 항상 대나무 숲에 가 있었기에 아이들은 방치되었으나 그들은 괜찮다고 느꼈다. 원장님 딸인 신주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준모는 공감하진 못했지만 아이들은 그녀의 눈웃음을 참 좋아했다. 심각한 분쟁이 일어나도 신주가 나타나면 순식간에 타협점을 찾았다. 그녀는 인기쟁이였다. 그는 처음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준모가 주목한 것은 개개인이 아닌 남주와 신주 사이의 틈새였다. 연결고리라 해도 좋았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머니라는 남주는 밥 먹고 싸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하루를 끝없는 대나무 군락을 바라보는 데에 쏟아부었다. 딸인 신주는 의무적으로 아이들과 노는 시간을 제외하면 방에 틀어박혀 무협지를 읽거나 벽을 보며 공놀이를 했다. 둘은 보육원 아이들과의 관계보다 몇 광년은 떨어진 별도의 존재였다. 정말 실낱같은 실선만이 그들의 유무를 나타내는 것 같았다. 그건 그들 모두가 느꼈으리라. 그렇다고 둘은 자신들을 버린 이들처럼 무도하지도 않았다. 신주와 남주 둘 중 하나라도 몸을 가눌 수 없는 날엔 한쪽이 상대방을 챙겼다. 아픈 신주를 먹이기 위해 차린 밥상을 보는 남주의 눈길이. 토한 남주를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씻기는 신주의 손길이 그걸 증명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당연했다. 준모는 그저 그게 궁금했다.

    호기심은 호감이 되고, 호감은 곧 갈망으로 변했다. 그는 날을 잡고 의천도룡기와 신조협려를 쌓아두고 읽고 있던 신주의 방을 찾아갔다. 그녀에게 왜 무협지를 읽느냐고 물었다. 신주는 당황했지만 차분하게 대답했다. 등장인물이 믿는 정의를 실현하는 데 있어 단 한 번뿐인 선택으로 보여주는 모습에 이끌렸다고 했다. 가만히 앉아 궁상떠는 창작물은 많지만 의외로 과감히 앞으로 나아가 후회하면서도 다시 일어서는 이야기는, 특히나 장르는 오직 무협뿐이라고 했다. 사실 그런 것보단 재밌는게 최우선이지만. 준모는 그럼 장래희망이 무협지 속의 검사가 되고 싶은 거냐고 물었다. 신주는 고민하더니, 가능하다면 직접 되기보단 검객을 길러내고 싶다고 말했다. 다만 사람의 살결을 베기보다, 검과 검이 얽혀드는 무예에 충실한. 남주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봤던 걸까. 그녀는 아이들과 놀며 무언가를 나누는 일이 보람찼다고 말했다. 최소한 지금의 자기 엄마보단 낫지 않겠느냐며 웃었다. 준모도 웃으며 동의했다. 가끔은 엄마한테도 내가 뭔갈 알려주고 싶다니깐. 둘은 이후로 빠르게 친해졌다. 신주는 자주 벽에 야구공을 던졌다. 자신이 얼마나 세게 던지든 벽이 차분히 되돌려준 공에선 배려가 느껴져서 좋았더랬다. 준모는 상냥한 누나에게 그냥 캐치볼을 할 친구가 없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으나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남주와의 대면은 그리 알차지 못했다. 원장님, 하고 부른 준모는 거의 매번 무시당했다. 가끔은 무슨 말이라도 해줄 때가 있었다. 그가 겨우 알아낸 예측은 하나뿐이었다. 남주에게 몹시 복합적인 의미로 다가오는 무언가가 대나무 숲에 있으리란 것. 준모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봄바람이 막 불어오기 시작한 어느 꼭두새벽에, 눈을 비비며 나온 신주는 열심히 도시락을 만드는 준모를 보며 깜짝 놀랐다. 미나리도 불러 데코까지 완성했다. 그녀가 남주까지 불러서 나왔을 때, 두 사람 몫의 도시락이 준비돼 있었다.


    “마침 휴일이기도 하고, 두 사람 다 그간 고생했잖아요.”


    어린 보육원생의 정성 앞에 남주도 마음을 열었다. 그게 중요했다. 그 상황은 준모라는 분자가 일시적으로 끼어들어 생긴 불안정한 화합물에 지나지 않았다. 다만 그가 있었던 자리에 생긴 공백을 체감한다면 두 사람은 분명 서로를 마주 볼 수밖에 없을 터였다. 준모는 그렇게 믿었고, 그럼으로써 자신이 한 역할을 맡을 수 있음에 감사했다. 장소와 뭘 하며 소풍을 즐길지가 관건이었다. 준모는 각각 신주에게는 대나무 숲을, 남주에게는 캐치볼을 추천했다. 정말 그게 문제였을까? 성인이 되고도 준모는 되돌아보며 자문해보곤 했다. 물론 이제 그런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신주가 돌아오지 않고 사흘이 지났다. 예상외로 남주는 준모에게 전말을 순순히 털어놓았다. 두 사람은 대낮의 대나무 군락 내부를 향해 깊숙이 들어갔다.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나무가 자라난 땅은 미개발지역으로 남았다. 남주는 자신이 견딜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신주와 같이 있으니 정말로 괜찮았다. 다만 비좁은 나무와 나무 사이 빈 곳을 들여다보는 일은 구역질이 났다. 알고 있는 실루엣이 어른거렸으니까. 그럴 때면 신주가 손을 꼭 잡아주었다. 모녀는 말없이 걸었다. 잎사귀가 바스락거리며 밟혔다.

    길을 잘못 들어도, 넓은 간격의 대나무 사이를 지나가야 해도 괜찮았다. 충분히 걸으니 꽤 널찍한 공터가 튀어나왔다. 캐치볼을 하기에 알맞은 크기였다. 둘은 그곳에서 남은 시간을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돗자리가 깔리고 신주는 핸드폰으로 잔잔한 음악을 틀었다. 즐거운 한때가 지나갔다. 모녀는 준모가 싸준 도시락을 먹고 형편없는 그의 요리실력 때문에 깔깔 웃었다. 신주는 돌아가면 남주와 준모에게 편지를 쓰겠다고 말했다. 남주는 행복했다. 생각해 보면 그 모든 게 저 준모라는 아이의 덕분이었다. 돌아가면 다시 좋은 가족을 꾸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남주의 가슴 속에 피어오를 때 즈음, 신주는 소화도 시킬 겸 캐치볼을 하자며 글러브와 야구공을 잡았다. 남주도 반가웠다. 의예과 시절 멋진 선배가 있는 야구부 동아리에 가입하기 위해 열심히 연습한 기억이 그녀의 몸에 남아 있었다. 옛날 생각이 나는 것 같아 남주는 문득 즐거워졌다. 둘은 곧 공을 던지기 시작했다.

    발단은 사소했다. 남주가 신을 내서 던진 야구공이 글러브 안 접혀있던 신주의 새끼손가락을 구부렸다. 다친 건 아니었지만 예상보다 통증은 길게 이어졌다. 신주는 입술을 깨물고 공을 내려다봤다. 자신보다 월등히 강한 힘이 담겨있었다. 딸은 처음 느껴보는 감정을 느꼈다. 자신의 보호자이자 수십 수백 권의 책보다 많은 역사가 담긴 어머니가 앞에 있었다. 남주는 어른이었다. 딸은 혼란스러워했다. 어머니는 강했다. 방금 공에 담겨있던 힘을 눈대중으로만 측정해도 그건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자신에게 무관심하던 어머니. 할머니의 죽음 이후로 무언가 다른 존재가 되어버린 어머니. 딸은 울음을 이 악물고 참았다. 딸은 죽을힘을 다해 공을 던지기 시작했다. 공의 궤적은 어머니가 잡아내기 힘들 정도로 엉망진창으로 변했다. 야구공이 어머니의 몸을 두드리는 횟수가 늘어났다. 어머니도 난처하긴 마찬가지였다. 원래라면 딸이 어떻게 던지든 어린이의 투정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가는 게 맞았다. 그런데 그게 안 됐다. 처음 저항해오는 딸아이가 짜증스러웠다. 둘은 가족이었으니까. 점차 화가 났다. 딸이 돌 팔매질을 하면 어머니는 대포를 쏘아댔다. 어머니가 던진 야구공이 딸을 맞고 튕겨 나가는 일이 일어나는 건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공은 대나무 군락 사이 벌어진 틈새 속으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주춤거리는 딸에게, 어머니는 말했다.


    “주워와.”


    준모는 다시 한번 자문했다. 요소들을 깔아두고 결과물을 예상해볼 수는 없었나. 틈새를 벌려 안을 확인하기 위해 나는 왜 과욕을 부렸던 걸까, 하고.

 

    대나무 길을 따라가다 보면 기다리던 것이 나온다. 대박을 노리는 약초꾼들 사이에서 퍼진 유명한 말이었다. 둘은 단지를 빠져나와 저 멀리 검객이 기다리는 곳을 향해 걸었다. 기다리는 것이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 끝나리라는 생각은 남주와 준모 모두 공유하고 있었다. 남주는 검을, 준모는 물이 한가득 담긴 냄비를 들었다. 구분이 되지 않던 선이 다가갈수록 뚜렷해졌다. 그들은 검객 앞에 섰다. 미나리는 보이지 않았다.


    “무사히 있다. 내가 진다면 데려가라.”


    검객은 둘을 지켜보더니, 검을 든 쪽을 향해 칼끝을 겨누었다. 검객과 남주는 검을 든 채 대치했다. 잠시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잎사귀가 팔랑거리며 떨어졌다. 둘의 검은 아주 약한 실로 이어져 있어서, 순식간에 결정이 날 터였다. 준모는 승패가 결정나기 전까진 끼어들지 않을 생각이었다. 설령 남주가 죽는다고 해도. 바람이 불어왔다. 따스한 바람과 아주 먼 곳의 바람이 섞여 주변의 대나무에 수증기가 맺혔다. 물방울이 떨어지는 순간, 둘은 동시에 기합과 함께 검을 내질렀다.

    검과 검이 부딪쳤다. 최초의 일 합에서, 둘은 동시에 깨달았다. 실린 힘이 강한 쪽은 검객이었다. 심지어 그는 침착하게 검객들 특유의 섬세한 검법으로 남주의 검을 흘리고 반격했다. 반면에 남주는 아까 보여준 모습들은 어디로 가고 마구잡이로 검을 휘둘렀다. 한 마리의 야수처럼 꺾고 비틀고 풀을 밟고 튀어 올랐다. 그건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힘과 기술에서 밀린다면 자신을 경험해본 적 없는 미지 속으로 밀어 넣어야만 했다. 칼끝에서 불꽃이 튀었다. 수차례 합을 나누는 것만으로 주변의 나무는 맥없이 쓰러졌다. 달빛 속에서 두 그림자는 춤을 추었다. 검객이 다리를 뻗어 남주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남주는 억지로 관절을 비틀어 피한 후 반동을 이용해 손잡이로 그의 팔을 쳐냈다. 검객은 아주 잠깐 균형을 잃었지만 곧 되찾았다.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웠다. 판단이 같았다. 서로 동시에 상대방을 향해 발차기를 날렸다. 둘 다 복부를 맞고 나동그라졌다.

    남주의 호흡은 점점 더 거칠어진 반면 검객은 평온했다. 검을 쥔 남주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같은 타격을 가해도 받는 피해는 둘이 같을 수가 없었다. 검객은 객잔의 주인에게서 훈련받고 검술을 배웠으니까. 바로 그녀의 딸에게서. 남주는 혹시 이게 그때의 복수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정말 그렇다면 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곧장 남주는 고개를 흔들었다. 잡귀신이 달라붙었다. 미나리가 있다는 숲속을 바라보았다. 해야 할 일은 분명했다. 다시 금속음이 울렸다.

    남주에게는 한 가지 유일한 이점이 있었다. 검객의 검이 직접 그녀의 살을 파고드는 일은 없었다. 다만 그녀가 직접 다가간다면 얘기가 달랐다. 지금이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남주는 자신을 믿고 검의 궤적으로 뛰어들었다. 검객의 눈이 커졌다. 세상은 가속을 멈추고 시계추를 정지시키기 시작했다. 초침과 다음 순간 초침의 사이에 놓인 남주는 고민을 마쳤다. 검을 곡선으로 휘었다. 승부의 결과가 최후의 일 초까지 빨아들였다.

    남주는 검객의 가슴팍에 꽂힌 검을 빼냈다. 검객의 몸이 대나무 넘어가듯 허물어졌다. 마지막 순간 검객은 남주와 마찬가지로 검을 휘어 내질렀다. 그녀가 없는 쪽으로 검로를 수정해서. 남주는 멍하니 상대방을 바라보다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사람을 벤 검날에서 핏방울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켜보던 준모가 다가왔다. 냄비에 담긴 물을 검객의 몸에 들이부었다. 곧 물세례를 맞은 그의 살결이 흐물흐물해졌다. 사람의 피부는 아니었다. 남주가 몸을 굽혀 만져보니 종이였다. 익숙한 필체로 적힌, 글자가 빼곡하게 적힌 종이. 신주의 글씨였다. 남주는 새파랗게 질렸다. 도복을 벗기고 확인하려 했으나 물에 젖은 검객은 잘 찢어졌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야 남주는 편지를 읽을 수 있었다. 다 읽고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그러고 나서야 남주는 검을 쥐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준모는 기절한 미나리를 일으켜 세웠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나무 숲 한가운데, 검객이 남긴 도복을 입는 남주가 보였다. 검은 도복은 물에 젖어 색이 조금 빠져 도시의 회색이었다. 남주는 검을 쥐었다. 준모를 향해 다가왔다. 그녀는 한때 자신의 양아들이었던 준모를 껴안았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준모는 아니라고, 고마운 건 나라고 말하고 싶었다. 말하지 않았다. 포옹을 마치고, 그들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헤어졌다. 바람이 불어왔다.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채 그들의 곁에 머물렀다가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바람이.

 

    해안가. 준모는 미나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머니는 도복과 함께 검 한 자루를 들고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물살의 숱한 잡아끔과 방해 속에서 그녀는 검을 휘두를 터였다. 무와 협을 이루기란 그토록 어려웠다. 불꽃도 없고, 소리도 없고, 기술도 없다. 날카롭던 검에 달라붙어 바위보다 무겁게 만드는 물의 세계 속에서, 검날은 녹슬어 무용해질 터였다. 발은 바닥에 닿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럼 남주는 어떡해? 미나리가 묻자, 준모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 어쨌단 말이야? 그건 그녀의 선택일 뿐이잖아. 어쩌면, 그녀는 정말 물결을 베어내는 법을 배워올지도 모르지. 어쩌면, 극한의 흔들림 속에서 자신만의 검로를 찾을지도 모르지. 어쩌면, 어쩌면, 그녀는 살아 돌아올지도 모르지.

    둘은 배낭을 짊어지고 함께 앞으로 나아갔다. 대나무 군락은 하루가 다르게 무성해지고 있었다. 대나무 사이로 이따금 신기한 소문이 들려왔다. 그마저도 더 깊숙이 들어가면 고요했다. 가끔 사람을 만나면 준모와 미나리는 자기들을 약초꾼, 이라고 소개하곤 서로의 종아리를 두 번씩 걷어찼다. 객잔은 멀었다. 그래도 그들은 걸었다. 이 길의 끝에 그들을 기다리던 객잔이 모습을 드러내리라는 기대 속에서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