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아직 인간의 기도가 응답받던 시절.


시대에 종지부를 찍는 큰 전쟁이 있었다.


대전쟁의 여파는 전장에서 떨어진 이들에게도 찾아왔다.



"안 돼."


"안 되는데?"


"안 된다고?"


"이럴 리가 없는데."


"왜 안 되는 거지?"



인간계로 출장을 나온 신계의 여전사들은 귀향을 갈구했다.



"헤임달? 헤임달님?"


"다리를 내려주세요. 헤임달님!"


"헤임달! 당장 다리 안 내려?!"



아무리 악을 써도,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은 열리지 않았다.


여전사들은 문지기의 흔치 않은 나태에 불길함을 느꼈다.



"헤임달이 우리 부름을 못 듣는다고?"


"뭔가 이상해. 심상치 않아."


"사정이 생긴 거 아니야?"


"무슨 사정!"



몇몇은 현실을 부정하였다.



"이럴 리가 없어."


"꿈인 거야? 이건 악몽이야?"


"헤임달이 깜빡 잠이 든 거야. 틀림없어."



그러다 때가 되자, 그들은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렸다.


각자 다른 답을 품고 여전사들은 뭉쳤다.


결국에 뭉친 그녀들은 크게 두 부류였다.


두 무리는 서로의 해답을 두고 대립하였다.



"아아. 너희 잔류파 들어라."



한 여전사가 앞으로 나섰다.



"너희와 똑같이, 나도 검으로써 살아왔다.

아스가르드를 지키는 검이자 신왕, 오딘의 명을 수행하는 병기로서 살아왔다."



오딘.


아홉 세계의 왕이자 여전사들의 주인이었다.


목청을 드높이던 여전사는 피식 웃으며 우스갯소리를 던졌다.



"때론, 병기가 아니라 변기가 되기도 했지.

아마도 너희 모두가 그랬듯이."



푸핫-.


대적하는 두 여전사 무리에서 몇몇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행복했다.

갈망하던 싸움을 즐길 수 있었고, 내 능력을 필요로 해주었으니까.

싸움 밖에 모르는 우리 날라리 멍청이들을 발키리라고 부르며 인정해줬으니까."



적대하는 두 여전사 군중은 모두 발키리였다.


종말의 날을 대비해 모은 오딘의 병사들이었다.



"그 모든 것은 왕에 대한 고마움이 동기였다.

왕이 우리를 아끼고, 받아주고, 인정해주는 게 너무나 고마워서, 그래서 설령 목숨이 오가는 상황이라도 우리는 왕을 따르기로 결심했던 거였다.

나와 조금이라도 다른 까닭으로 왕을 섬긴 이가, 너희 중에 있느냐?"



좌중은 침묵하였다.


여전사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느냐!

왕은 변했다.

왕은 우리에게 귀향을 허하지 않았다.

왕이 우리를 버린 것이다!

보아라!"



여전사는 말을 멈추고 손을 뻗었다.


하늘을 향해.


과거 같았다면 부름에 답해주었을 신계의 무지개다리는,

오늘도 그녀의 요청을 무시하였다.



"이게 현실이다.

왕은 우리를 버렸다.

너희가 뭐라 하든, 우리의 힘은, 헌신은 왕에게 더 이상 필요없었던 것이다!

왕은 철두철미한 성격이다!

잔류파 너희 모두 생각해볼 일이다.

과연 우리의 잔혹한 왕은, 쓸모없다고 내친 우리를 살려둘 것 같은지.

잘 고민하여라, 너희 모두 간단히 답을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어떻게든 아스가르드까지 걸어서 가는 것이었다.


무지개다리가 아니더라도 인간계에서 아스가르드로 가는 길이 없는 건 아니었다.


10년을 꼬박 걸어야 하는 길인 게 문제일 뿐.



"우리는 10년의 길을 뚫어, 아스가르드에 향하겠다.

아스가르드로 돌아가 왕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

우리를 사냥하고자 하는 왕은, 우리에게 사냥당할 것이다."



여전사의 일장 연설이 끝나자, 반대쪽에서 또다른 여전사가 목청을 드높였다.



"잘 들었다.

너희, 주인을 물려드는 미친 개들도 들어라."



첫 코멘트부터 다소 자극적이었다.



"묻겠다.

우리 발키리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느냐.

따분한 왕의 한시 오락을 위해 존재하느냐?"



'주인을 물려드는 미친 개'부류는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부정의 뜻이었다.



"아니면 그저 망자의 혼을 거두기 위해 존재하느냐?

아무 망자나 거두기 위해? 그저 의미없이?

그래서야 헬의 심부름꾼과 역할이 겹치는데?"



헬이란 곧 저승의 신이었다.



"그것조차 아니면 무엇이냐!

아스가르드의 얼굴마담 역할이냐?"



아스가르드.


그녀들의 고향이자, 오딘의 고향.


애시르 신들의 땅이었다.



"전부 틀리다.

우리는 전쟁을 위해 존재한다.

다가올 종말의 날에 힘을 보태라고 있는 게, 우리 발키리다.

망자 중 특출나게 강한 영혼을 모으는 이유도, 종말의 날을 대비하는 거잖냐.

이탈파, 너희가 말했듯 신왕 오딘은 철두철미한 성격이다."



이탈파, 아스가르드로 돌아가 왕을 공격하겠다는 일파였다.



"자기 계획이 틀어지면 근심 걱정으로 밤을 새는 정도지!

그런데, 그런 오딘이 전쟁이 오기도 전에 병사들을 내친다고?

오딘이 우릴 버렸단 주장은 한낱 몽니임을 아직도 모르겠느냐?"


"한낱 몽니? 한낱 몽니라고?"



이탈파의 여자는 분노했다.



"네가 감히 몽니라고 일축을 하느냐? 동료들을 그렇게 모욕하느냐?"


"몽니가 아니면 무엇이냐!

나름의 이유가 있으리란 걸 어린애라도 짐작할 수 있을 터인데, 싸그리 무시하는 게 몽니가 아니고 뭐야!"


"네 이놈...!"


'파앙'



누군가 귀한 화살을 쏘았다.


한때는 좋게좋게 휴전의 낌새도 보이던 내전은 그저 전쟁으로 돌아갈 뿐이었다.



'두웅'


'두웅'


'두웅'


"해가 졌다!"


"철수해라. 날이 저물었다!"



노을이 밤에 밀려 땅아래로 달아나면 전투는 다음날로 연기되곤 했다.


아침이 되면 똑같은 수순을 밟았다.


양 진영이 서로 야유를 하고, 화를 내고, 싸움을 벌였다.


단지 그 챗바퀴 위에 추가되는 건 그날 분의 피뿐이었다.


모두가 고집을 꺾지 않고, 모두가 고집에 지쳐가던 어느 날이었다.



"안녕하세요."



전장에 강림한 이는 새로운 얼굴의 여성이었다.


돌연 땅이 갈라졌고, 그 균열에서 용암과 함께 나타난 여자였다.


실로 '강림'이었다.



"여기가 미드가르드, 중간계죠?"



*



"정말로 네가 발키리라고?"


"예."


"그... 갑옷도 조금 밖에 없어서 창을 막기도 힘들 듯한 옷으로?"


"예."


"그... 파티에 나가기도 민망한 스커트 길이로?"


"예."


"그... 남자 꼬실 때나 입을 법한 드레스로?"


"예."



쿠웅.


여전사가 책상을 내리쳤다.



"차라리 동화책에 나오는 마법소녀라고 해라!"



발키리를 자칭하던  은색 드레스의 소녀가 움찔하였다.



"진짜 발키리에요...."


"그 옷은 또 뭔데."


"이거야 설정이...."



소녀가 중얼거렸다.


여전사의 눈에는 그렇잖아도 작은 소녀의 체구가, 더 작게 보였다.


이유야 어쨌거나 아이를 상대로 화를 내는 어른이라서야 폼이 안 나는 법.


여전사는 몸을 뒤로 뺐다.


고개를 내렸다.


흥분을 가라앉히고자 한숨을 무릎에 뱉어냈다.



"그래, 그렇다치자."


"치는 게 아니고 전 정말로-."


"저 여우는 또 뭐야."



붉은 털의 여우가 소녀의 곁에 앉아있었다.


여우는 지루함을 감추지 않고 연신 하품을 해댔다.


소녀를 무척 따르는 건지, 떼어내려 해도 여우는 자꾸만 소녀에게로 돌아갔다.



"오면서 만났어요. 귀엽죠?"



부글부글.


심문하는 여전사는 주먹을 굳게 쥐고 부르르 떨었다.


소녀의 해맑고 답답한 답변을, 거든 이가 있었다.



[나는 중요치 않다. 신경쓰지 마.

지금은 더 중요한 게 있을 텐데?]



웬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육성은 아니었다. 가성도 아니었다.


귀로 들어오는 목소리가 아니라 청자의 머리로 직접 입력되는 소리였다. 


좁은 방의 문을 지키던, 피곤함에 절여져 졸던 다른 여전사가 대번에 각성하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선배님 지금, 여우가 한 겁니까?"


"모르겠어."


[글쎄, 나한테는 신경 꺼달라니까.]



틀림없이 여우가 한 짓이었다.


두 여전사가 경악하였다.



"얘 맞지 않습니까?"


"이 여우 말도 하네!"


[여우가 말해서 미안하게 됐수다.]


"게다가 건방지고!"


"요정의 회화는 몸이 아니라 마음으로 듣고 말한다던데, 그거 아닙니까?"


"쟤가 요정이라고?"



요정이라는 단어에, 여우는 있는 힘껏 얼굴을 구겼다.



[도발하는데 재능이 있네.]


"뭐라고?"


[그래, 요정 그 비슷한 걸로 치자. 열 받지만.

그렇다 치고, 이젠 제발 나한테 관심 꺼.]



압도적인 무례함.

심문하는 측의 두 여전사는 일제히 여우를 백안시하였다. 


아예 자리까지 잡고 드러누운 여우는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한마디를 덧붙였다.



[졸려서 그래. 며칠 전부터 계속 못 잤다고.]



거짓말은 아니었는지, 금새 여우는 코를 골았다.


에이- 하며 여전사가 혀를 찼다.


따져묻던 발키리는 이내 질문을 바꿨다.



"너, 소속은 어디야."


"소속이요?"


"서임식 때 왕한테서 들었을 거 아니야."



그런 게 있던가- 라며 작은 소녀는 작은 머리를 갸웃거렸다.



"애처럼 생긴 게 아니라 진짜 애구나.

아이고 두야."


"얘, 잘 생각해보렴. 서임식 직전에 왕께서 뭐라고 하지 않으셨니?

식이 끝나면 어디에 속하게 될 거라던가."


"아! 하셨어요."


"어딘데."


"레긴레이프랬어요."


"레긴레이프?"



청자의 눈이라곤 하나같이 보름달만 해져 튀어나오기 직전이었다.



"네가? 네가 레긴레이프라고?"


"예 왕께서 분명히."


"이 늙은이가 노망이 났나! 이런 꼬맹이가 레긴레이프라고?"


"늙은이요?"


"왕 말이야. 왕!"


"선배님, 잠깐만요."



방의 문 앞에 서있던 여전사가, 책상에 앉아 심문하는 여전사를 불렀다.


괜한 호출에 선배가 쏘아보자 후배는 가까이 다가가 허리를 숙였다.


후배는 그 수상한 신입 발키리의 눈치를 보고 선배 귓가에 입을 가져다대었다.



"어떻게 보십니까."



후배가 그랬듯, 선배도 언성을 낮추고 입술을 가렸다.



"늙은이가 미쳐버린 걸로 밖에 생각이 안 되는데."


"왕이 늙고 추해도 아직 천치는 아닙니다. 그럴 리는 없다고 봅니다."


"그러면?"


"저게 거짓인 거 아닙니까?"


"아, 그 경우도 있나."



선배란 사람은 지적받고 나서야 깨달은 모양이었다.



"하긴 역사 상에서도 그건 마지막 등장이 벌써 3백년 전이지."


"문제는 만에 하나라도 진짜일 경우입니다.

현시국이 예언에 딱 들어맞는 상황이잖습니까.

그 경우엔 어찌하실 겁니까?"


"전략이나 지휘 실력을 보고 판단함이 맞겠지만 저런 어린애면 대단한 능력은 없을 거야."


"그 경우 말입니다. 어쩌실 겁니까?

진짜 레긴레이프인데 능력이 없는 경우라면?"


"뭘 물어. 이거지."



여전사가 손날로 툭툭 제 목을 쳤다.



"선배 제정신입니까?"


"너무 잔혹하면 내전이 끝날 때까지 묶어서 어디다 가둬두는 것도 좋겠고."


"선배, 상대는 꼬마입니다!"


"조용히 해. 들키겠다.

우리가 언제부터 깨끗한 일만 했다고 유난이야?"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 어린 애를...!"



힐끔.


음모를 모의 중인 두 여전사가 발키리를 자칭하는 꼬마를 쳐다보았다.


아이는 어느 틈에 순백색 원피스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여우를 만지며 놀고 있던 아이에게 언제 갈아입은 거냐 묻자

"방금 상태가 특수한 거에요. 이게 기본이고. 시간 지나면 이렇게 돼요."

라며, 도무지 알아먹기 어려운 설명을 하였다.


선배 발키리는 다시, 후배와 작당 모의를 했다.



"현명히 생각해. 뺏기기라도 하면 어쩔 거야.

저쪽에서 앗아가는 날엔 그야말로 비상이라고."



으으-.


후배 발키리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몸을 뒤로 뺐다.


선배 전사의 말에 틀린 구석은 없었다.


선배는 받아들인 것으로 여기고 꼬마 발키리에게 눈길을 주었다.



"미안하다. 오래 걸렸군. 심심했지?"


"아뇨."



대답이 짧은 것치곤 삐친 듯 보이진 않았다.


아이는 그저 여우의 푹신푹신한 몸을 만지는데 여념이 없어보였다.


여우는 [제발 날 좀 자게 놔둬다오]라며 앓는 소리를 뱉었다.



"좋아 꼬마야, 이렇게 하자."


"저 꼬마 아닌데...."


"레긴레이프라고 했지?"


"네."


"언니가 믿기 어려워서 그래.

레긴레이프면 혹시 증거를 보여줄 수 있니?"


"증거요?"


"레긴레이프는 대대로 남자라고 했어.

한데 지금 눈으로 보니 네가 겉모습은 여자아이나 다름없구나."


"그 말씀은...?"



아이의 얼굴이 돌연, 검게 썩어버렸다.


어른은 잔혹하게, 아이가 걱정하는 미래 위로 나아갔다.



"치마 까.

팬티도 벗고."



그렇잖아도

건강하던 남근이 사라지고 영문도 모른 채 여자가 되어버린 게 고민인

어린 발키리에겐 기쁠 수 없는 고지였다.


*


이번에도 ts 주의는 짤로 갈음함.
역시나 옆동네 대회 출품작의 백업임.
원본 이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