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인 기사

별의 힘은 야만인에게 허락되지 않은 힘이었고,

그렇기에 야만인은 별을 동경해서는 안 된다.

예전부터 부족에 내려오던 전설 같은 이야기다.


'가지고 싶다. 별의 힘을.'


그러나 촉망받는 부족전사 베르투크는 별을 동경했다.

그는 황야를 넘어 스스로를 밝게 빛내던, 자신을 문명인이라 칭하는 자들의 세계로 향한다.


#1. 황야

전쟁과 피, 그리고 죽음. 내 삶을 몇 단어로 요약하자면 이렇다.

나는 서대륙의 황야와 가까운 부족에서 태어났다. 부족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걸 기억하기에 그때의 나는 너무 어렸다.

야만인이 흔히 그렇듯 부모를 모르는 고아였다. 아버지는 전쟁에서 죽었고 어머니는 납치당했다. 

간신히 살아남은 나는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전쟁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살육이다. 철갑을 두른 전사들이 사람을 무차별적으로 도륙했다.

그 중에서도 특출난 자가 있었다. 수풀에 숨어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단 한 번의 검놀림으로 수십을 베어내는 광경을.

그건 마치 별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별빛과 같은 푸르른 섬광이 번쩍했다. 그 빛과 함께 수많은 검의 궤적이 인간의 살점을 무참히 찢어발겼다.

‘저 힘은… 뭐지?’

나는 그 힘에 매료되었다. 순간 우리 부족을 침략했다는 사실도 잊은 채 가까이 다가갈 뻔했다.

차라리 그 광경을 보지 말았어야 했다. 그때부터였다.

‘별.’

내가 별을 동경하기 시작했던 것이.

‘후우…’

밤하늘에 떠있는 별을 바라본다. 그들은 인간이 닿을 수 없는 높은 곳에서 저마다 자기가 가진 찬란한 빛을 뽐냈다.

‘닿고 싶다.’

제아무리 팔을 뻗어본다 한들 닿을리 없었다. 한낱 야만인의 팔은 별에게 닿기에는 너무 짧았다.

‘한번만 더 볼 수 있다면.’

그 자들은 황야 너머에서 왔을 것이다. 그들의 무장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이었고, 지금까지도 다시 보지 못했다.

으득–

오랜만에 과거를 생각했다. 주먹을 꽉 쥐었다. 나는 전사다. 그때의 일을 잊지 않았다. 별빛을 동경하는 건 그 힘을 얻고 싶어서였다. 전사라면 늘 강한 힘을 추구해야만 했다.

저벅–

뒤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날카롭게 벼려진 본능이 자연스레 검을 잡게 했다.

“워워, 베르투크. 나야. 노예스.”

목소리를 듣고 검을 거뒀다. 부족의 친한 친구 노예스다. 이방인인 나와 유일하게 진심으로 대화를 해 주는 소중한 친구였다.

“넌 항상 별을 바라보더군.”

노예스는 내 옆에 서서 나처럼 고개를 치켜들었다. 손에는 사슴 시체가 들려있다. 밤 사냥을 다녀온 모양이다.

“자제하는 게 좋을 거야. 금기잖아? 게다가 곧 부족장 선별 시합도 있으니. 부족장 해야지.”

금기라는 말에 눈썹이 꿈틀거렸다. 무어라 말하려다가 말았다. 노예스까지 잃고 싶지는 않다.

그가 피식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부족장?”

나는 가슴팍을 벅벅 긁으며 고개를 돌렸다. 부족장의 자리에는 관심이 없다.

“관심 없어. 게다가 내가 부족장이 되도 따르기나 할까. 지금 부족장 아들이 제격이지.”

노예스가 내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내 팔뚝을 툭툭 치며 말했다.

“네가 아니면 누가 하리. 아들놈은 성격이 너무 이상해. 그리고 저번 전쟁 기억 안 나? 나는 네가 괴물인 줄 알았다고. 주변 부족에서도 네 이름이 들릴 정도야. 이렇게 부르더군. 괴물 베르투크! 흐압!”

그는 팔뚝의 근육을 괴상하게 부풀리며 소리쳤다. 노예스는 아무래도 내가 차기 족장감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노예스 뿐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미 나는 부족 내에서도 당해낼 자가 없는 전사였다.

부족의 전투기술을 자유자재로 다룰 뿐만 아니라 그걸 유연하게 응용했다. 그 몸놀림으로 전쟁에서도 여러 번 성과를 올렸다.

마을에 가면 처녀들이 나와 결혼하려고 줄을 선다. 우수한 전사의 씨를 받고 싶은 모양이었다.

‘부족 의회에서 내 이름이 거론된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노예스가 굳이 상기시켜주지 않아도 안다. 나는 부족에서 가장 강한 전사였다. 가장 강한 전사가 부족장이 되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 

‘아마 내가 원하지 않아도 장로들이 나를 부족장으로 추대하겠지.’

그렇게 되면 좋든 싫든 부족장 자리에 올라야만 한다.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전통이다. 전통을 깬 자는 부족에서 추방을 당했다.

“돌아가자. 밤이 깊어.”

생각이 많은 밤이었다. 노예스는 내 손을 잡아끌었다. 별과 달이 대지를 환하게 비추었다. 

‘별빛.’

아직도 어렸을 적 그때의 일을 잊지 못한다. 부족장의 자리에 오르면 평생 그 빛을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몰랐다.

쿵, 쿵.

심장이 뛴다. 죽기 전에 그 빛을 한번 더 보고 싶었다. 늘 그런 생각을 했다.

한창 별을 바라보던 와중, 수풀에서 불꽃이 일렁였다.

“노예스.”

반사적으로 조용히 노예스를 불렀다. 분위기를 읽은 그가 아무런 말도 없이 뒤를 돌아봤다.

“저거.”

나는 수풀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횃불이다. 적의 정찰대일지도 몰랐다. 방향은 황야 쪽이었다.

“정찰대야. 바람칼 부족인가? 길을 우회해서 돌아왔나보군.”

수풀 속에 숨은 채 조용히 말했다. 

“저게 보이는 거냐? 정말 괴물이 따로 없군. 제아무리 가까워도 1시간은 넘게 걸릴 거리야.”

노예스가 내 시력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그들을 노려봤다.

“근데 저기로 더 가면 황야야. 황야에 가면 사람은 불에 타 죽는 거, 몰라? 아마 저것들도 공기가 뜨거워서 죽기 일보 직전일 걸.”

노예스의 말을 들은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조그마한 숲 너머로 먼지 날리는 밤의 황야가 보였다.

“황야에 간다고 사람이 죽진 않아.”

그가 내 눈빛에서 위협을 느꼈다. 전쟁통 속에서 나도 모르게 익힌 눈빛이었다. 이것 때문에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 자들이 많았다.

“그, 그래도 황야로 가는 건 야만인들끼리 금기야.”

노예스는 한 발자국 물러나며 금기를 들먹였다. 

“금기? 나는 금기 따위는 믿지 않아. 금기는 언젠가 깨진다. 난 내 눈으로 본 것만 믿어.”

이번에는 참지 못하고 말이 나갔다.

별을 동경하는 이유도 그 중 하나다. 나는 직접 별을 보았고, 저들은 별을 보지 못했다. 그런 자들이 내게 별을 보지 못하게 할 권한은 없었다.

‘황야.’

내 눈동자가 끝이 보이지 않는 황야의 끝을 바라봤다. 지평선 너머의 세계에서 붉은 모래가 휘날렸다.

야만인들 중 그 누구도 저 지평선 너머의 세계로 간 자는 없다. 저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별.’

저 너머에 가면 그때 보았던 별빛을 볼 수 있을까.

‘아니지.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야.’

나는 고개를 좌우로 가로저었다. 지금은 적 정찰대가 먼저였다. 그리고 무기에 손을 가져다댔다.

“부족에 알리고 오면 늦어. 난 저걸 죽이러 간다. 너는?”

노예스에게 물었다. 그가 말없이 사슴을 버렸다. 친우가 싸우러 간다는데 내버려 둘 전사는 한 명도 없었다.

나는 수풀에 몸을 숨긴 채 천천히 접근했다. 서서히 수풀의 밀집도가 낮아지며 황야가 가까워진다. 공기가 뜨거웠다.

“후욱, 후욱.”

노예스가 가쁜 숨을 헐떡이며 따라왔다. 공기가 뜨거워서 평소보다 체력 소모가 더 심했다. 

그러나 나는 숨을 달싹이지 않았다. 내 체력은 누구에게 비할 바가 못 된다. 열 명과 연달아 달리기 시합을 해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체력은 무시 못할 나의 장점이었다.

으적.

주머니에서 말린 곰 육포를 꺼내 씹었다. 곰 고기는 전사들의 고기다. 곰은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짐승 중 하나였다. 그런 곰의 고기를 먹으면 곰과 비슷한 힘을 낼 수 있다는 미신이 있었다.

“마셔. 곰의 피다.”

나는 곰 고기를 먹고 노예스에게는 곰의 피가 담긴 주머니를 내밀었다.

“장난 아니야, 이거.”

노예스가 숨을 헐떡이며 주머니를 받아들었다. 뚜껑을 따고 피를 벌컥벌컥 마신다. 미처 마시지 못한 피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소리가 들려.’

귀를 쫑긋 세웠다. 자연의 것이 아닌 다른 소리가 들렸다. 적과 가까워졌다는 뜻이었다. 

스륵–

노예스가 도끼 꺼냈다. 소리를 들은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적은 우리보다 숫자가 더 많다. 숫자가 적으면 당연히 싸움에서 불리하다. 제아무리 뛰어난 전사라도 열 명이 붙으면 죽을 수 밖에 없다.

‘기습을 노려야 해.’

불리한 상황을 뒤집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먼저 치는 것이다. 하나라도 숫자를 줄여 놓아야 이길 가능성이 늘어난다.

저벅.

발걸음 소리가 낮다. 나와 노예스는 행여나 나뭇가지를 밟지 않게 조심스레 움직였다.

‘전사.’

아이러니하게도 전사의 가장 어려운 사냥감은 같은 전사다. 이번 싸움에서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놈들을 그대로 두면 부족이 기습 당한다.

게다가 같은 전사의 머리는 최고의 전리품이었다. 이들을 죽이면 장비와 무기도 잔뜩 챙길 수 있다. 부족이 더 강성해지는 것은 분명했다.

‘이길 수 있을까.’

적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생각했다. 어려운 싸움이다. 

놈들은 정찰대인 만큼 대인용 장비를 갖췄을 테고, 우리는 그렇지 못했다. 게다가 숫자도 놈들이 더 많다.

“바로 앞이다. 베르투크.”

노예스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그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여차하면 도망쳐서 부족에 소식을 알리라는 뜻이었다.

그는 현실적인 사내다. 고개를 끄덕이는 노예스를 보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무기를 매만지는 손끝이 떨렸다.

‘후우.’

심호흡을 한다. 감각이 서늘하다. 떨림이 멎음과 동시에 동공이 차갑게 식었다.


나와 노예스는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놈들이 눈앞을 지나친다. 우리를 보지 못했다. 주의 깊지 못한 정찰대다.

‘바람칼 부족.’

제일 뒤에 있는 놈을 바라봤다. 등짝에 바람을 휘감은 칼 문신이 있다. 예상대로 우리 부족과 사이가 안 좋은 부족의 녀석들이다.

‘장비가 좋아. 갑옷도 무시무시하군.’

놈들은 사슬갑옷을 입었다. 바람칼 부족은 이름과 다르게 갑옷을 잘 만들기로 유명했다. 저 갑옷에 도끼를 날렸다가 역으로 죽은 전사가 한 둘이 아니다.

스륵.

검 대신 투창을 꺼냈다. 던지는 창이라고 하기에는 크기가 컸다. 일반 투창보다 창끝이 두 배는 컸고, 장대의 두께도 훨씬 두껍다.

“흡.”

소리없이 수풀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투창을 든 팔뚝의 핏줄이 터질 듯 팽창했다. 얼굴에도 힘이 잔뜩 들어가서 근육이 당겼다. 온 몸의 힘을 모두 써서 투창을 들었다.

후웅!

어마어마한 힘을 머금은 거대한 투창을 던졌다. 공기가 찢어진다. 

푸욱!

행렬 가장 뒤에 일렬로 서 있던 두놈이 갑옷 째 꿰뚫렸다. 거대 투창의 위력은 실로 놀라웠다.

두 녀석은 비명도 질러보지 못하고 죽었다. 몸이 그대로 고꾸라져 털썩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적이다!”

놈들은 그제야 우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눈알을 굴리며 적들의 숫자를 파악했다.

‘도끼를 든 놈이 둘, 창을 든 놈이 셋.’

성가신 궁수는 방금 일격으로 다 죽였다. 숫자가 2배 이상 많지만 해볼 만 했다. 

“노예스! 우회해!”

내 외침에 노예스가 옆으로 빠졌다. 창을 든 녀석이 노예스를 쫓아가려고 고개를 틀었다.

후웅–!

그 녀석에게 작은 투창을 던졌다. 목이 꿰뚫린 놈은 꺽꺽대다가 죽었다.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진 일이다. 놈들은 노예스가 우회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내게 눈을 떼지 못했다.

“네놈들 상대는 나다.”

놈들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한 녀석이 다리를 부들부들 떨며 외쳤다.

“저, 저건… 괴물 베르투크! 젠장! 괴물이 왜 여기 있는 거야! 도망쳐야 해! 다 죽는다고!”

녀석은 공포에 젖은 채 무기를 버리고 도망쳤다. 곧 놈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우회한 노예스다. 무기 없이 도망치는 놈을 죽이는 건 아주 쉬운 일이었다.

키이잉–

허리춤에 있던 검이 살벌한 소리를 냈다. 싸움의 기본은 창이나 도끼다. 그러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무기는 검이다. 검을 양손으로 잡고 베고 찌를 때가 가장 좋았다.

“흡.”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몸이 두 배는 커진 듯했다. 지금부터 숨을 쉴 여유를 부릴 타이밍은 없었다. 

‘가장 앞에 있는 놈부터.’

나는 두 눈을 감지 않았다. 눈을 똑바로 뜨고 정면을 응시했다. 횃불의 빛이 눈부셔도 이를 악물고 앞을 봤다. 

후웅–!

앞에 있던 놈의 도끼가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놈의 무기는 쌍수도끼다. 한 번 더 피해야 했다. 나는 놈의 안쪽을 파고들었다.

‘아래.’

움직임이 뻔했다. 침착하게 움직이니 녀석들의 공격이 보였다. 눈앞에서 공격을 피한다.

‘뻔해.’

공격을 보고 몸을 숙였다. 무서운 도끼가 머리 위를 지나갔다. 가만히 있었으면 가슴을 베였을 공격이다.

“이제 내 차례다!!”

크게 소리치며 아래에서 위로 검을 휘둘렀다. 짜릿한 전율이 인다. 웃음이 절로 나온다. 옆에서는 벌써 공격이 들어오고 있었다. 생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짜릿함에 뇌가 마비된다.

촤악!

검이 사타구니부터 귀를 향해 궤적을 그렸다. 몸무게를 실은 공격에 사슬갑옷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다. 이어서 피가 크게 튀었다.

“아악!”

녀석이 비명을 질렀다. 이제 저 놈은 더 싸우지 못한다. 나는 옆으로 몸을 마구 굴리며 옆구리에 들어온 공격을 피했다. 뜨거운 피와 진흙이 몸을 뒤덮었다.

“으하하!”

나는 여유로운 웃음을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휘릭.

검을 허공에 휘두르며 피와 지방을 털어냈다. 좋은 검이라 그런지 이 정도로는 날이 나가지 않았다.

“미, 미친!”
“죽는 게 두렵지도 않은 건가!”

전사들이 전의를 잃었다. 사대 일로 싸우면서 동시에 사람을 베는 걸 모두가 지켜봤다. 어지간히 숙련된 전사에게도 어처구니 없는 광경이었다.

툭–

놈들은 손을 부들부들 떨며 무기를 버렸다. 그리고 덤덤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투항한다는 뜻이었다.

“잘 생각했다. 최대한 아프지 않게 죽여주지.”

전사의 세계에 자비란 허락되지 않는다. 죽이거나, 죽는다. 둘만 존재했다.

“끙, 좀 재미 없군.”

사대 일로 싸웠는데도 단칼에 승부가 났다. 지루했다.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근육을 잠재웠다. 뜨거운 근육에서 증기가 피어올랐다.

“베르투크라고 했나?”

두명 중 나이 많아 보이는 녀석이 입을 열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의 눈에는 선망이 담겨있다.

“바람칼의 혹스일세.”

녀석이 대뜸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이름을 말하는 건 전사로서 마지막 예우를 해달라는 뜻이다. 나는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 예우를 지키기 위해서.

후웅–!

검을 내리치자 목이 떨어졌다. 녀석을 베며 황야를 바라봤다. 

‘꽤 가까이 왔다고 생각했는데.’

저 지평선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어렸을 적 보았던 철갑 입은 전사들의 세계가 있는 걸까? 별빛을 품은 그 힘이 저 너머에 잠들어 있나?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저 너머의 세계가 궁금했다.

“노예스! 다 끝났다!”

마지막 남은 놈에게 터덜터덜 걸어가며 소리를 질렀다. 노예스가 있던 수풀이 움직였다. 

‘잠깐.’

찰나의 순간이다. 동공이 작아졌다. 나는 조그마한 수풀의 움직임을 읽었다. 무언가 반짝였다. 

“숙여!!”

본능적으로 몸을 숙였다. 노예스는 갑옷을 입지 않았다. 무기도 집어넣었을테니 무언가 반짝일 일은 없다.

푸슛–

바람칼 부족의 전사는 움직이지 않았다. 날아온 화살이 놈의 몸을 꿰뚫었다. 날카롭고 예리한 화살이다.

‘화살촉이 놀라울 정도로 예리하다. 이런 건 본 적 없어.’

바닥에 엎드린 채 생각했다. 이곳에는 갑옷도 꿰뚫을 정도의 화살은 쓰지 못한다. 

“누구냐!”

저 수풀 너머에 있는 건 노예스가 아니다. 너머에 있는 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노예스가 죽었다. 놈들이 죽인 게 분명했다.

‘내가 노예스를 데려왔다. 책임지고 노예스의 복수를 해야 돼.’

눈앞에 있던 시체를 통째로 들어올렸다. 나는 시체를 들고 앞으로 내달렸다. 눈 먼 화살이 날아와 시체의 몸뚱이에 푹푹 박혔다. 저 화살을 맞으면 제아무리 나라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노예스…’

달리던 와중 시체가 된 노예스가 보였다. 노예스는 도끼를 든 채 죽어있었다. 피를 흘리면서도 마지막까지 싸웠다. 과연 전사답다.

‘지금 당장 복수를 해 주마. 노예스.’

나는 노예스의 도끼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도끼를 높이 치켜들어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던졌다.

휘릭–!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둔탁한 타격음이 들렸다. 날아든 도끼에 누군가 맞았다. 적들이 놀랐는지 잠시 사격을 멈추었다.

“후욱.”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들고있던 시체를 던져버리고 우측으로 뛰었다. 화살이 날아온 방향은 앞이다. 우회해서 기습을 할 생각이었다.

‘저기다.’

방금 화살이 날아온 곳을 봐뒀다. 그곳을 향해 빠르게 달렸다. 허벅지가 비명을 지르며 부풀어오른다. 

“후읍!”

마지막 남은 투창을 던졌다. 투창이 수풀을 가르며 적을 향해 날아갔다. 갈라진 수풀 사이로 순간 적을 확인했다.

‘저 옷차림은…’

나는 적들의 생김새를 확인했다. 거의 처음 보는 복장이었다. 끽해봐야 사슬갑옷이나 두르는 부족민들과 달리, 상체를 철갑으로 감싸고 있었다. 그 철갑은 검이 들지 않을 정도로 단단해 보였다.

‘그때 그 놈들이다!’

어렸을 적의 기억이 순간 스쳐지나갔다. 10년이 지난 일인데도 생생했다. 틀림없다. 저놈들은 황야 너머의 세계에서 왔다.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처음 봤지만 낯설지는 않은 적들이 나를 보고 뭐라뭐라 말했다. 언어가 달라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래도 노예스를 죽인 시점에서 살려 보낼 수는 없다.’

검을 뽑았다. 살벌한 소리와 함께 검이 달빛을 받아 빛났다. 

“으라아아아!”

소리를 지르며 놈들에게 달려들었다. 벼려진 검이 놈들을 노린다. 녀석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쳤다. 그러나 철제 갑옷은 무겁다. 안 그래도 빠른 내 손아귀에서 도망칠 수 없다.

뻐억–!

주먹으로 도망치는 녀석의 뒷목을 후렸다. 갑옷과 갑옷의 이음매에 충격에 파고들었다. 놈은 바닥에 쓰러졌다. 아마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것이다.

“도망치지마라! 도망친다고 한들 내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으냐!!”

나는 엄청난 크기로 포효를 내질렀다. 마치 숫사자가 포효를 내지르는 듯했다. 초원이 포식자의 등장에 동요하고 있다. 수풀이 일렁이듯 흔들렸다.

철그럭, 철그럭.

도망친 적들 사이로 무언가가 움직였다. 전신에 철갑을 두른 사내다. 녀석이 홀로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그 녀석을 보고 생각했다.

‘별빛.’
 
눈이 휘둥그레졌다. 틀림없다. 그때 보았던 그 모습과 똑같다. 
별빛을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마구 뛰었다.

텅–

하지만 녀석은 내게 그 힘을 보여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놈은 들고 있던 방패와 검을 바닥에 내던졌다. 그리고 주먹을 들었다. 주먹만으로 검을 든 나를 상대하겠다는 뜻이었다.

놈의 자세와 기세에서 여유가 넘친다. 만만하게 보인 모양이다.

“네놈도 스스로 별빛을 낼 줄 아는 건가?”

검을 치켜들며 물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차피 말이 통하지 않는다. 알아들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뭔지는 몰라도 네 빛을 나한테 보여줘야 할 걸.”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근육이 다시 팽창한다. 뜨거웠던 공기가 어느새 서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