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암사 돌다리를 건너자마자 삼촌이 말을 걸어오셨다. "왔니? 오는 데 거시거허진 않었고? 밥은 먹었냐잉?"
"밥은 기차에서 도시락 사서 먹었어요. 기차에서 좀 쉬면서 와서 힘들진 않아요. "
"안으로 들어가블자."
삼촌의 손에 이끌려 들어간 선암사 경내는 이루 말할것 없이 아름다웠다. 초록의 정취가 내 마음을 푸르게 물들이는 것만 같았다. 한창 그 정취에 취해 있을때, 법당 안으로 들어오라고 삼촌이 말씀하셨다.
"아늑하고 좋지?"
"네, 참 아늑하고 좋네요. 그래서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셨길래 여기까지 부르신거에요?"
"사실, 내가 요새 몸이 그렇게 좋지가 않은데 너에게 꼭 이걸 전해주고 싶어서 불렀단다."
"무엇이죠?"
내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삼촌이 일어나시더니 무슨 일기장 같은 것을 가져오셨다.
"이게 뭐에요?"
"일기장이란다. 지금 여기서 펴보지는 말고."
"이거 전해주시려고 한거에요? 그냥 배달하시지."
"내가 너의 집 주소를 모르는데 어떻게 배달하니...."
잊고 있었다. 난 이곳과 인연을 끊으려고 상경하자마자 전화번호든 뭐든 바꿔버렸다는 걸. 내 지옥같았던 성장기에 얽혀있었던 이곳, 그리고 부모님한테서 벗어나려고. 그렇지만 내 유년기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었던 사람에게는 피해가 가는 걸 원치는 않았는데. 이렇게 꼬여버렸을 줄이야.. 그때였다. 삼촌이 갑자기 기침을 하시더니 피를 쏟아내셨다.
"삼촌....! 괜찮으세요??" 
"워메..... 질기고 질긴 목숨줄이 여그서 끊어질랑갑다..나가 살면서 죄를 허벌나게 지어부러서 부처님이 벌을 주시는갑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어쨌든 병원에 연락했으니 곧 구급차 올거에요!"
승주에서 의료원까지는 멀다. 30분 동안 버티실 수 있을지가 고민이었다. 다행히 의료원에서 구급차가 제 시간 전에 빨리 도착했고, 난 삼촌과 병원으로 같이 갔다.
"아빠 전화번호 뭐에요?"
"나도 모른단다....15년 전 그날, 헤어질 때 아예 연을 끊는다 하고 나와부렀응께..."
삼촌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던 걸까? "그러면서..왜 저는 찾으시려고 하신거에요? 연 끊으려고 하셨다면서요."
"너는 끊어내고 싶지가 않았단다.. 나중에 크면은 다시 너라도 찾아보려고 했어... 그랬는데 이미 너는 서울로 가부렀더구나..."
"아..."
"일단은 잠시만 혼자 있고 싶구나.. 어디 좀 산책이라도 하고 오려무나.."
"알았어요."
밖으로 나오긴 했지만 할 게 없었다. 그래서 다시 병원 안으로 들어오긴 했지만 다시 병실로 들어가긴 뻘쭘해서 주신 공책에 뭐가 있는지 보기로 했다. 하지만 읽지도 못했다.
"저기요, 윤진태 씨 보호자분 맞으신가요?"
"네, 맞습니다."
"환자분이...사망하셨어요..."
"뭐라고요?"
충격이었다. 얼마나 몸이 안좋으셨길래, 그리고 그걸 말할 사람이 없으셔서 혼자 삭혀두고 계셨었다는게, 아니 이 모든게 다 충격이었다. "하..."
일단은 의료원 장례식장에 안치해 놓기로 했다. 곧 스님들이 우르르 오셔서 계속 우셨다. 알고 보니 삼촌은 이곳 선암사에서 주지스님은 아니지만 그래도 오래 계셨던 분에 속하는 축이었다. 어쨌든,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3일 후 장례식을 불교식으로 치르고 나서 난 삼촌이 주신 책을 꺼내보았다. 그리고 거기에는 학구재라는 단 세글자만이 첫 장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