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층까지 내려왔다. 한순간에 죽음에 이를 수 있다는 생각에 온 신경을 기울였다.
"여기는 크리스 이스트우드, 25층에서 안드로이드와 모퉁이 하나를 두고 대치 중."
패러렐 라인이었다. 곧 정면승부가 임박한다는 뜻이었다.
"하현일, 자네가 선두로 나가게나."
"네?"
단장님이 크리스의 말을 듣고 말했으나 바로 납득이 가지 않았다.
"저들이 노리는 건 나일세."
이것도 무슨 비밀이 있나 싶었다. 잠깐 생각해보았다. 그러고보니 최은준 교수를 맞춘 청산 총도 원래는 천 슈어를 향해있었지.
"일단 그래보겠습니다."

그 말에 일단 앞으로 이동했다.
"크리스, 하현일을 선두로 돌격하세."
"네!"
잠시 뒤 나랑 크리스가 서로 눈치를 보고 피난안전구역으로 들어갔다. 지형을 보니 넓은 공간이었다. 회피력이 인간을 뛰어넘은 안드로이드를 쉽게 맞추기 어려워보였다.
접착총을 열심히 갈겼다. 연사 모드로 안드로이드를 따라 쐈다. 그러나 안드로이드는 벌레마냥 이리저리 피해다녔다. 역시 미래기술이었다.
접착총이 바닥에 붇고 천장에 붙고 벽에 붙어 주변이 마치 거미들의 소굴처럼 되었다. 총알이 안드로이드에게 맞기는 했지만 대부분 안드로이드의 몸체의 옷에 맞아 효과가 없었다.
다행인지 안드로이드가 청산을 쓰는 일은 없었고 계속 총으로 쏘아대는 것이 끝이었다. 슈트의 방탄 기능 덕분에 우리들도 부상을 입지 않았다.

몇 분 가량의 교전이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한 안드로이드의 팔에 접착총을 맞출 수 있었다. 397호였다. 옷의 등 부분에 묻은 접착탄이 벽에 달라붙은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397호는 옷을 벗으려고 하였다. 그리고 그 397호를 보호하기 위해 762호가 더 공격적인 태도로 397호 앞으로 가지 못하게 했다.
"들어가겠네."
천 슈어 단장님이었다. 397호가 일시적으로 행동불능이 되자 바로 들어온 것이었다.

단장님이 이곳으로 들어오는 입구를 밟는 순간이었다. 바닥에서 갑자기 폭발이 일었다. 엄청난 먼지구름이 일었다.
먼지구름이 걷히니 바닥이 사라진 것이 보였다. 25층의 바닥이 뚫려 24층의 사무실로 추락한 것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아직은 괜찮네."
뒤에서 따라오던 히카리가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는 채로 말했다. 그가 일어서려고 몸을 움직이자 균형을 잃고 덩달이 24층으로 추락했다.
397호가 어느새 옷을 다 벗었는 지 빠져나왔다. 옷은 벽에 매달려있었다.
397호를 호위하던 762호가 더 넓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접착탄을 어떻게든 맞추려고 했지만 그럴 때마다 유유하게 피할 뿐이었다.

397호와 762호가 단장님이 있는 24층으로 내려갔다. 이것이 목적이었던 건가?
나와 크리스도 어서 24층으로 내려가기 돕기로 했다. 그래서 부상을 입지 않도록 천천히 내려갔다.
밑에서는 엄청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397호가 청산 총으로 무기를 바꾸어 단장님을 저격하고 있었고 단장님과 히카리는 필사적으로 그 안드로이드들에 저항하고 있었다.
우리도 그 대열에 가세했다. 2:4였지만 힘든 싸움이었다.

397호와 762호가 천 슈어 단장님을 점점 창문 쪽으로 몰아넣었다. 단장님이 아까 추락했을 때 얻은 고통을 참으면서 최선을 다해 도망치고 있었다.
맞는 것 같았다. 397호와 762호는 확실히 단장님을 노리고 있었다. 단장님 말고 다른 사람들은 창문과 반대편으로 밀어붙이려는 것을 보니 말이다.

그 때 또다시 폭발이 일었다. 단장님이 있던 바로 그곳이었다. 그곳이 폭발하자 단장님이 다시 23층으로 추락했다. 2번 연속 추락했으니 엄청 아프실 것이었다.
이런 전술도 있다니 신박하기 그지없었다.
폭발의 여파인지 397호의 청산 총이 밑으로 떨어진 듯 보이지 않았다.
어찌되었든 일단 접착총을 날리고 보았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안드로이드는 상상 이상이었다. 계속 접착총을 피하고 있었다. 아까 비상계단에서 썼던 전략도 먹히지 않았다.

15초 쯤 뒤 762호에 명중했다. 발이 땅에 달라붙은 것이었다. 이에 아까랑 똑같이 397호가 762호를 수호했다. 762호는 열심히 신발을 벗으려 하였다. 397호의 무기는 그냥 총으로 다시 바뀌어있었다.
이번에도 쉽지 않았다. 우리가 우세라지만 절대로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점점 약올랐다.
762호가 마침내 신발을 벗었다. 접착이 풀린 것이었다.

그런데 안드로이드들은 접착이 풀리자 더 공격하지 않았다.
"시뮬레이팅 결과 임무 성공확률 100% 달성. 철수한다."
이 말이 흘러나오고는 갑자기 오히려 사무실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이건 또 무슨 일인가?
갑작스러운 종결 소식에 크리스와 히카리는 처음에는 당황하면서도 끝났다는 것에 좋아했다. 이제 이 지옥같은 전투가 끝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때 나는 한 가지를 떠올렸다. 지금 레볼루시아의 목표는 천 슈어 단장님을 사살하는 것일 터. 청산 총까지 들고 온 걸 보면 사실상 맞다고 봐야했다.

비상구 쪽에서 이제 막 올라온 팡 씬이가 내려가고 있는 안드로이드에게 사격을 갈기며 욕을 시원하게 퍼붓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단 그건 무시하기로 했다.

바로 창문 쪽에 뚫린 구멍으로 갔다. 구멍 밑 23층 사무실을 내려다보니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아시모프와 천 슈어 단장님이 있었다. 무슨 일일까 싶어 점점 더 가까이 가보았다. 둘이 있으니 위험한 일은 없을 것이다 싶어서 대화나 듣기로 했다.

자세히 보기로 했다. 그 때 나는 비로소 무언가 심상치 않은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세르게이가 권총을 들고 천 슈어 단장님을 향해 저격하는 듯한 자세를 했다. 세르게이의 두 손이 잔뜩 떨렸고 호흡이 불안정해보였다. 쏘려는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천 슈어 단장님이 단념한 듯 말했다. 말에는 깊은 탄식과 한숨이 담겨있었다.
단장님이 그 말과 동시에 신속하게 폭탄 하나를 꺼냈다. 접착탄도 화학탄도 아니었다. C4 폭탄이었다.
세르게이가 총의 방아쇠를 두 번 당겼다. 그와 동시에 천 슈어 단장님도 C4를 던졌다.
그런데 세르게이의 총소리가 뭔가 달랐다. 위화감이 들었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었다. 화학총이나 접착총은 아니었다. 자세히 보니 다름아닌 최은준이 맞았던 그 청산 총이었다.

청산총의 한 발은 단장님을 맞추었다. 단장님이 고통에 신음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청산에 중독된 것이었다.
두 번째 발은 창문을 맞추었다. 총알이 창문에 맞아 창문이 산산조각이 나며 박살났다. 밖과 안의 기압차 때문에 엄청난 바람이 불었다.
청산에 중독되어 몸을 가누지 못한 단장님이 세찬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밑으로 떨어질락 말락 휘청거렸다. 이 정도 높이면 아무리 슈트를 입었어도 생명줄이 끊길 확률이 높았다.

이와 동시에 C4가 폭발하였다. 엄청난 폭발이었다. 24층에서 구멍으로 23층을 보고있는 거라 망정이지 하마타면 나도 휘말릴 뻔했다. 23층 사무실 대부분이 날아갈 정도의 폭발력이었다.
그 자리에서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아시모프가 폭사했다. 아무리 방탄에 방열이라지만 폭탄을 버틸 수는 없었던 것 같았다.
또 이와 동시에 폭발의 영향에 휩쓸려 안 그래도 창가에서 휘청이던 천 슈어 단장님이 그대로 파르나스 타워 밑으로 추락했다.

최은준 교수의 말대로였다. 슈트를 입은 이상 압사, 질식사, 추락사, 폭사, 익사밖에 없다는 말.
멘탈이 붕괴했다. 그 5가지 중 3가지가 현실화되었다는 사실에 순간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것도 이런 상상도 못 할 방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