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1

보름달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덜 찬 달이 까만 하늘을 밝히려고 하는 밤이었다. 겨울을 보내고 봄을 데려오기에는 아직 아쉬운 감이 있는지, 차가운 바람은 목련나무의 봉오리들을 스치며 우수수 소리를 냈다. 더더욱, 새벽 1시의 밤은 차갑고 고요한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바람소리만이 그 침묵을 깰 뿐.

바람은 복도식 아파트의 난간을 손쉽게 넘어 들어왔다. 어떻게는 이 아파트를 지나치리라. 열린 창문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기 바빴다. 바람이 13층의 조금 열린 창문을 발견했다. 그것은 그 틈으로 재빠르게 들어갔다. 반투명 창문이 흔들렸다. 덜컹 덜컹...

그 창문은 유독 밝았다. 다들 잠자리에 들었을 법도 하지만, 그 집은 여전히 불이 꺼지지 않았다. 마치 저 하늘에 걸린, 덜 찬 달처럼, 고요하게 빛만을 내뿜는 집이었다.

 

이나야, 안 자니?”

 

침묵이 깨졌다. 방 안으로 엄마가 들어왔다. 방 안의 소녀는 누가 들어왔는지도 관심이 없는지, 연신 마우스를 탈칵거리며 컴퓨터 화면만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작은 편인 책상 위에는 노트북 하나, 다 식어버린 믹스커피가 든 머그잔, 풀다 만 국어문제집, 노트 등이 어지럽게 나뒹굴고 있었다. 소녀의 뒤 옷걸이에는 교복이 걸려 있었다. 서랍장 위에 가지런히 접어놓은 체육복에는 노란 이름표가 달려 있었다. ‘신이나’.

 

이것만 하고요.”

 

이나는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가득 찬 화면을 쳐다보며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각종 백신과 바이러스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나야, 엄마가 늘 말하잖니. 컴퓨터는 네 진로에 방해만 될 뿐이라고.”

 엄마는 아직 문고리를 잡은 채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신종 바이러스가 감지되었는지, 컴퓨터가 알림을 보냈다.

 

컴퓨터를 진로로 삼다가 언니처럼 되면 어쩌려고 그러는 거니?”

 

엄마는 결정적인 말을 하고 말았다. 이나는 그제서야 고개를 돌렸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다시 쓸어 넘겼다. 그리고, 매우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엄마, 난 언니와 달라. 언니처럼 멍청하게 컴퓨터 때문에 죽는 짓은 안 할 거라니까?”

 

이나와 엄마의 시선이 잠시 맞았다. 이나는 잠시 엄마의 표정을 살폈다. 약간 뜻밖이라는 표정, 그리고 슬픔으로 바뀌는 듯한 표정. 이나는 그걸 기대했었다. 그리고 그것을 성공시킨 것이다.

 

이나는 말없이 의자를 돌려 식어버린 커피를 마셨다. 단맛밖에 나지 않았다. 머그잔을 쾅 하고 책상에 강하게 내려놓았다. 제발, 이런 실랑이 할 거면 내 방에서 나가달라는 신호였다. 엄마는 잠시, 그런 딸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나는 그런 엄마의 얼굴을 더 이상 보고 있기 싫었다. 말없이 바이러스를 끄고, 백신도 껐다. 컴퓨터 전원을 껐다. 컴퓨터 화면이 검게 변했다.

 

잘 자렴.”

 

기운없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조용히 닫는 소리도 들렸다. 이나는 한참, 문을 노려보았다.

문에는 마침 가족사진 하나가 붙어 있었다. 몇 년 전부터 붙어 있던 가족사진이었다. 이나는 그 사진을 찍었던 순간을 기억할 수 있었다. 아빠, 엄마, 언니와 함께 언니가 일하는 곳에 가서 찍었던 사진. 무려 미국이었고, 비록 이나가 8살이었으나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컴퓨터로 가득한 연구실, 온갖 정보들... 어린 이나에겐 천국이나 다름없었던 곳이었다.

 

언니.”

 

이나는 사진에다 대고 무심코 언니를 불러보았다. 그 말은 허공에서 맴돌다가 사라졌다. 가족사진을 보니, 언니는 참 엄마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야 보이는 건가. 이나는 언니가 그립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보고싶지 않았다. 언니라는 존재는 결국 필요없었던 것일까?

 

한숨을 내쉬며, 불을 껐다. 침대에 쓰러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핸드폰을 하다가 잠들었지만, 오늘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130분인 것만 확인하고, 메시지가 몇 개 왔다는 사실만 확인하고, 잠을 청했다. 졸렸다. 눈을 감았다.

제발, 오늘만은 꿈에 언니가 나오지 않기를 간절히 빌었다.

 

 

 

 -Orchid Kim-

2050년의 컴퓨터테러를 다루는 추리 스릴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