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얼을 다 건져 먹고 나니, 우유가 남았다. 그릇을 들어 우유를 마셨다. 마시면서 한쪽 눈으로 시계를 확인했다. 734. 그녀만 그러는지 모르지만, 그녀에겐 아침 시간이 말도 안되게 빠르게 가게 느껴졌다.

위에 흑색 파카를 걸치고, 가방을 메고, 현관문을 나섰다. 누가 3월을 봄이라고 정해놓았는지, 여전히 어둑어둑한 기운을 풍기는 하늘에서는 매서운 바람이 불었다. 6층 복도 바로 옆에 있는 목련 나무는 여전히 겨울 새 떨어뜨리지 못한 갈색 나뭇잎을 죽어라 흔들며, 이나를 배웅해주고 있었다.

735, 그녀는 횡단보도 앞에 섰다. 하늘은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다. 머리카락을 동여맨 리본이 바람에 흩날렸다. 이제 곧 저편에서 다경이가 보이리라.

치마 주머니에 넣어 놓았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따뜻한 파카 주머니에 넣고 있었던 손을 빼기가 너무나 귀찮았다. 그러나 그 핸드폰은 멈추지 않고 계속 진동을 했다. 틀림없는 전화였다. 이나는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꺼냈다.여보세요?”

으응, 이나야. 컴퓨터 선생님이야.”

 

컴퓨터 선생님? 등교 시간에? 정말 뜻밖이었다.

 

, , 안녕하세요.”

 

이나가 공손하게 인사했다.

 

그래, 이나야. 네가 프로그래밍에 소질이 아주 많다고들 하더구나. 친구들 사이에서 아주 유명하던데? 내가 애용하던 백신 프로그램이 네가 개발한 것일 줄은 몰랐어. 정말 대단해.”

 

이나는 혼자서 얼굴이 붉어졌다. 예상 밖의 칭찬.

 

, 감사합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전화 주시는지...”

 

이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컴퓨터 담당 선생님도 정보통신고등학교 출신이었고, 그 과목에 대해서는 매우 철저했다. 50대 초반의 나이에, 활기차면서 진지함이 공존했다. 이나가 속으로 존경하다시피 하는 선생님이기도 했다.

 

, 지금 너, 등교 중이지?”

.”

혹시, 반 들리지 말고, 바로 컴퓨터실로 와줄 수 있니? 뭐 쓸 게 있는데, 필통이 필요할 것 같거든.”

, ! 바로 갈게요.”

 

이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로 혼내시려는 줄 알았는데, 칭찬과 더불어 그냥 잠깐 들리라는 의도였다.

738. 다경이가 약속 시간에 지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사실, 그 애가 시간약속을 지킨 적이 없긴 했다. 아니, 이나가 그것을 너무 철저하게 여기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740. 건너편 횡단보도에서 다경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171cm의 훤칠한 키에 다소 마른 체구, 작은 눈, 어깨를 겨우 넘는 단발을 한 김다경은 남색 롱패딩을 흩날리며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었다. 롱패딩이라고 했으나, 워낙 다리가 길어서인지 롱패딩 같지가 않았다. 다경이는 이나를 보더니, 손을 마구 흔들어댔다.

 

손 흔들지 말고 빨리 오기나 해.’

 

이나가 속으로 생각하며, 손으로 손짓을 했다.

신호등 불빛이 바뀌고, 다경이가 뛰어왔다.

 

늦어서 미안! 오랜만이야, 이나!”

 

그새 김다경은 키가 큰 것 같았다. 155cm에 불과한 이나에 비해서, 다경이는 너무나도 컸다.

 

일찍 좀 다녀. 그러다가 지각하겠어! 우리 50분까지 교실 입실이잖아.”

 

이나가 타박을 주었다. 다경이는 그래도 히히 웃으며, 낮디낮은 이나의 팔에 팔짱을 꼈다.

 

반 배정 잘 됐으면 좋겠다. 이번에는 목표대학 별로 반 나눈다며?”

 

다경이가 말했다.

 

그래? 글쎄, 우리 학교 애들은 대부분 정보통신대학교 가려고 온 거 아니야? 그곳이 컴퓨터 계열의 성지잖아, 탑 클래스.”

 

이나가 말했다.

 

그렇긴 해. 그래도, 백지연 같은 애들은 거기 안 갈걸? 아마 인문계 고등학교들의 탑 클래스 대학교도 목표로 할 수 있을 정도잖아.”

 

다경이가 말했다. 이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정통고(정보통신고등학교)같은 명문 고등학교에서 한 과목 빼고전 과목에서 늘 전교 1등을 하는 학생은 아마도 전국에 몇 없을 것이다. ‘백지연은 소문에 의하면,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전교 1등이 아닌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 친구가 이제는 의외의 정통고에 와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하겠다고 떡하니 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