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바쁘게

 

2학년 27번 신이나.

기숙사 호실; 204

기숙사 룸메이트: 성유진(2학년 26)

월요일 임시 시간표: 문학-한문-화학-영어-수학-세계사

야자는 319일부터. 컴퓨터실 사용은 36일부터.

 

이나는 한숨을 쉬었다. 새학기 첫 날, 모든 것이 바쁘게 흘러갔다. 다들 영어실이 어디인지 몰라 헤맸고, 화학 시간에는 선생님이 너무 지루한 군대 이야기만 줄줄이 늘어놓으셨고, 수학 시간에는 다들 자느라 바빴다. 그리고 가지고 온 엄청난 무게의 짐을 기숙사에 옮기느라 난리법석이 났다. 기숙사가 2층이라 다행이긴 했지만, 모든 짐을 다 옮기고 있으려니 힘이 축 빠졌다.

성유진이라는 룸메이트는 아직 안 온 모양이었다. 기숙사의 하얀 벽에 걸린 시계는 5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녀의 보랏빛 여행가방 지퍼를 열자, 잠옷이며, 세안도구며, 칫솔이며, 속옷이며 가지가지 그득그득 쌓인 것이 보였다.

언제 다 정리하고 있지? 오늘 첫 점호인데. 1학년 때는 기숙사 시스템이 없었으니, 모든 것이 그냥 새롭기만 했다. 핸드폰도 아까 걷은지 오래다. 이나는 오랫동안, 그 허연 벽을 응시했다. 한숨 돌리니, 벽에 걸린 그 시계만이 애속하게 적걱적걱, 초침 소리를 요란하게 냈다.

오늘 하루는 참 말도 못하게 힘든 시간의 지속이었다. 그냥 침대에 누워 잘까.

열려있는 문에서 인기척이 났다. 이나는 혼자 화들짝 놀라 절로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가느다란 다리였다. 그리고 낡은 스니커즈, 말끔한 차림의 교복. 마지막으로 얼굴이 보였다. 거무잡잡한 색의 얼굴, 쳐진 눈에 다크서클이 두드러졌다. 머리카락은 허리까지 길렀으나, 다 헝클어져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힘이 더욱 빠지는 듯한 외모였다. 표정은 무표정인 데다가, 졸려 보이기까지 했다.

유독 마른 체구를 이끌고 그녀는 이나의 옆 침대에 풀썩 앉았다. 아무 말 없이 끌고 온 검은색 여행가방을 펼쳤다. 안에 든 것이라곤, 이나와 완전히 다르게, 체육복 바지 1, 연두색 티 1, 칫솔 뿐이었다.

이나는 멍하니,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었다.

갑자기 그 애가 고개를 드는 바람에 두 시선이 마주쳤다. 이나는 또 혼자 화들짝 놀라며, 얼른 시선을 거두었다. 이 애가 내 1년 룸메이트라고? 나쁠 것은 없겠지만, 평생 친해질 기회는 있을까? 나 자신의 솔직한 심정조차 불분명했다.

아냐, 차라리 이럴 바에는, 친해지는 것이 마음 편할 것 같았다. 이나는 평소 다른 친구와 친해질 때와 다르게, 굳게 마음의 준비를 했다. 검은 여행가방을 구석으로 밀어넣는 그 애에게, 말을 걸기로 했다.

이나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안녕, 유진아.”

괜찮아, 자연스러운 인사였어. 성유진은 쭈그려 앉은 것을 다시 일어서다가 고개를 다시 휙 이나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안녕이라는 말 대신 고개를 두 번 끄덕여 보였다.

그것만으로도 정말 좋다.

이나는 첫 번째 관문은 통과했어.’라는 생각에 들떴다. 이제, 일상적 말을 자연스럽게 걸게 되면 친해지게 되는 것이다!

“1학년 때 몇 반이었어?”

이나가 다시 용기있게 물었다.

“9.”

짧은 대답이 들렸다. 목소리조차 모기만 한 데다가 허스키했다.

, 4층이었겠네. 나는 1반 이어서 3층 이었거든.”

다시 정적이 흘렀다. 이건 불길했다. 이나는 사교성이 아주 좋은 편이라, 친구를 잘 사귀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늘 성공했었다. 이나는 지금, 난해함을 넘어서 불가능에 도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놀랍게도, 유진이 입을 열었다.

네가 그 이나 백신을 만든 그 신이나야?”

이나는 눈이 동그래져서 유진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생기 없던 눈동자에 약간의 빛이 감돌고 있었다.

, 맞아.”

이나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이의 눈이 도리어 커졌다.

사실, 이나 백신을 쓰니까 굉장히 좋다고 느꼈거든. 그걸 만든 사람이 진짜 내 룸메이트인가, 그게 조금 믿기지가 않아서.”

말투는 여전히 생기없는 작고 허스키했지만, 이나는 유진이가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고 있음이 느껴졌다. 안도감이 느껴졌다.

고마워...”

이나는 얼굴이 빨개졌다. 처음 만난 사이인데 직접적으로 칭찬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잠시 후, 점호가 시작되었다. 성공적으로 검사를 맡고, 소등 시간이었다.

불이 다 꺼졌다. 체크무늬 이불 속에 파고든 이나는, 옆 침대의 거동을 가만히 귀로 살폈다. 잠깐 그 쪽에서 고요함이 흐르더니, 이내 뒤적뒤적 소리와 함께 유진이도 이불 속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잘 자.”

이나가 먼저 조용히 말했다.

너도.”

유진이도 말했다. 이나는 어둠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