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하가 집의 불을 끈 지 대략 7시간이 지났을 무렵, 1층의 괘종시계는 새벽 4시를 알리는 타종음을 내고 있었다.


그 시계는 영국에서 만들어져 타종 이전의 웨스트민스터 차임을 울릴지, 말지를 시간별로 설정할 수 있었으며 그 타종음과 차임의 음량도 조절할 수 있었다.


이전의 주인은 오전 7시, 정오 12시, 오후 10시 이외에는 웨스트민스터 차임을 울리지 않도록 해 놓았고, 오후 10시 이후로는 타종음의 음량을 줄여 둔 뒤 설정을 그대로 유지한 채 떠났기에 시계는 새로운 주인의 의사와는 상관 없이 그 설정을 따라 시각을 알렸다.


땡, 하고 첫 번째 종이 울렸다.


니시카타 5초메 15번지의 정원의 잔디를, 쌀쌀한 봄의 바람이 한 번 가볍게 쓸고 지나갔다.


땡, 하고 두 번째 종이 울렸다.


그 바람은 정원의 호수 위 작은 소나무의 풀을 흔들고, 솔잎 하나를 호수의 수면에 떨어뜨려 작은 파장을 만들어 냈다.


땡, 하고 세 번째 종이 울렸다.


바람은 다시 호숫가 주변에 난 단풍나무와 벚나무 사이의 수풀을 흔들었다. 이제 고양이는 주인을 찾아 떠난 지 오래였기에 그것을 동물에 의한 흔들림으로 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땡, 하고 네 번째 종이 울렸다.


마지막 타종과 함께, 아직 붉게 물들지 않은 단풍나무의 잎을 헤치고 바람은 그것의 개화를 재촉하듯이 벚나무 가지에 아직 피지 않은 벚꽃의 봉오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괘종시계는 그것을 끝으로 새벽 4시의 타종을 종료하였고, 계속해서 금색의 추를 움직이며 시계판에 시침과 분침과 초침으로 정확한 시각을 표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타종 소리도, 바람이 정원의 잔디와 호수와 수풀과 나무를 흔드는 소리에도 이 집의 주인인 유경하는 여전히 깨지 않은 채 잠을 자고 있었다.


경하가 잠에서 깨지 않았던 것은 집 안의 모든 창문과 문이 닫혀 있어 바람이 그 틈으로 새어나올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기도 하지만, 꿈을 꾸는 사람은 모든 집중력과 시각이 그 환상에 집중되어 있어 현실에 전혀 신경을 쓰지 못하기 때문이었기도 했다.


왜냐하면 경하는 지금 조선에서 살았을 때의 옛 기억을 꿈으로 다시 재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머니의 일기를 본 그 날 이후부터 조선을 떠나기 전까지의 기억이었다.


춘몽(春夢)이라는 것은, 봄의 짧은 밤에 꾸는 꿈을 말하는 것이다. 3월 30일은 일본에서도, 조선에서도 봄일 시기였으나 올해의 바람은 유독 쌀쌀한 데다 새벽 4시는 밤이라 하여야 할지, 아침이라 하여야 할지도 애매한 시간대였다.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안 그 날부터, 유경하는 더 이상 부모에게 사랑받으려는 마음도, 사랑하려는 마음도 없어진 채 유경하의 마음은 산산조각난 채로 부서져 있었다. 


경하가 애써 무시하려고, 신경쓰지 않으려고 했던 것은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는 그 사실만이 아니었다. 환상과 환각에 빠져 현실을 직시하지 않았던 대가는 경하가 생각했던 것보다 몇 배는 더 무겁고 고통스러운 것이었으니까.


유경하는 조선인이었고,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조선에서 조선인에 의해 태어나서 자라 온 명백한 조선인이 바로 경하였다. 


어쩌면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큰 사실로 받아들여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경하와 경하의 가족에게는 다른 조선인들에게는 없는, 아주 자랑스럽고 우월한 점인 동시에 치명적인 결점의 성격을 띄는 특징 하나가 존재했다.


경하의 조부는 총독부로부터 조선귀족의 백작 작위를 하사받은 사람이었다. 


그 작위는 경하의 아버지가 승작하였고, 경하의 누나가 태어났을 때는 백작에서 후작으로 직위가 올라갔으며 조선귀족령에 의하여 경하의 가족들은 전부 그에 걸맞는 호칭을 향유하고 있었다.


조선귀족은 아무나 마음대로 하사받는 직위가 아니었다. 그 작위를 하사받은 사람들의 대부분은 이왕가와 조선 왕공족의 후손 및 친인척이거나, 총독부가 조선을 합방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사람들이었다.


그 경하의 조부는 바로 후자에 해당하는 사람이었다. 


개항을 할 때 무역 사업에 뛰어들어 막대한 수익과 돈을 번 고관대작인 경하의 가문에서, 총독부가 조선을 합방할 때 공을 세운 사람이 바로 경하의 조부였다. 


경하의 조부가 일본의 도쿄제국대학에 유학을 다녀와 공부를 한 뒤 일본어를 익혀 통역을 도맡았고, 통감부가 설치되었을 때 재산으로 막대한 넓이의 땅을 사들인 뒤 그것의 절반을 통감부의 관유지로 넘긴 것은 총독부에게 있어 엄청난 공이었다. 


바로 그 ‘업적’ 덕분에 경하의 조부는 합방이 되고 총독부가 설치된 뒤 조선귀족령이 선포된 동시에 왕공족들이 대부분인 조선귀족 백작 이상의 작위를, 겨우 대부호에 불과한 경하의 조부가 하사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을 공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총독부와 다른 조선귀족들에 지나지 않았다. 그 총독부와 조선귀족들보다 더욱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는 조선인들은 그것을 공으로 여기지 않았다.


‘국가에 훈공을 세운’ 것이 아닌, 다른 조선인들은 ‘자신들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자들로 보았다. 저 지나의 상하이에서 조선을 해방시키기 위해 임시 정부를 세운 자들은 말할 것도 없었고, 경하와 같이 풍족한 생활을 누리지 못하는 조선인들 또한 그러하였다.


‘조선인들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것이 일본인들뿐이었다면 그것은 단순한 적개심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었다. 처음부터 믿지도 않았고 적이었던 자들이 자신들을 박해하리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할 사람은 없으니까.


하지만 경하의 가문 사람들 전원은 조선인이었다. 경하의 조부와 부모는 ‘조선인이면서도 조선인들을 배반하고 그들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사람이었다. 


믿었던 사람들이, 적이 아니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어느 날 아침에 자신들을 배신하고 적이 되어 그들을 박해하리라는 것을 예상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따라서 그것은, 단순한 적개심에서 그치지 않고 경멸과 증오로 변하게 되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조선 사람들에게 경멸과 증오를 한 몸에 받는 조선귀족의 자제였던 유경하는 조선인들에게 조금도 환영받지 못했다. 


“저런 조선인인지 일본인인지도 모를 놈이 돌아다니는 게 아주 환멸이 나.”

“확 망해 버리던가, 일본으로 꺼지던가 둘 중에 하나는 해야 할 것 아니야?”

“우리는 이렇게 답 없는 삶을 살고 있는데 왜 저것들만 호의호식을 하는 거냐고. 뭐를 잘못했길래 이러는 거야?”


그런 말은 권력을 가지지 못한 조선인들에게는, 누가 듣기라도 한다면 자신의 심장을 찌르는 비수와도 같은 명백한 실언이 될 터였기에 그들은 대놓고 말하지 않았지만, 확실하게 경하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는 말을 자신들끼리 모르게 소곤대는 일이 많았다. 


아니, 시선만 보아도 그들은 경하의 지위를 부러워하면서도 동시에 경멸하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우리가 그 자리에 오른다면 너처럼은 하지 않는 것인데, 너는 우리를 배신하고 그 자리에 올라 박해를 한다면서.


하지만 조선인들의 말에 무엇 하나 틀린 것은 없었다.


청계천을 기점으로 북쪽에 있는 북촌과, 반대로 남쪽에 있는 남촌만 봐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자신들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사람들과, 나락으로 떨어진 조선인 자신들의 생애는 그 거주지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었으니까.


조선인들이 사는 북촌에 근대화의 상징인 서양의 건물은 그저 조선 총독부 정도만이 있을 뿐이고 조선식 가옥과 좁은 도로와 비탈길이 가득했다. 경성을 방문한 외국인도 ‘밤거리가 어두우며 서양 건물이 적다’ 고 대놓고 말할 정도니 그것을 틀렸다 말할 수는 없었다.


종로의 길가에는 청계천을 공사할 때 파낸 흙을 덮어 두어 여름이면 악취가 났고, 가로등이 설치된 곳은 군데군데 보일 뿐 결코 많은 수가 설치되어 있다고 볼 수 없었다. 거리에는 먼지와 돌 같은 지저분한 것들이 때때로 굴러다녔고, 밤만 되면 가로등이 설치되지 않은 곳은 어둠에 드리워져야 했고 북촌에 사는 조선인들은 혹여나 자신이 범죄에 시달릴까 봐 노심초사를 하였다.



하지만 반대로 일본인들과 경하가 사는 남촌은, 가히 북촌과는 비교하지 못할 정도로 깔끔하고 정돈되어 있었으며 근대화의 산물인 서양 건물들이 가득했다. 마치 저 서양의 런던이나 파리 같은 대도시에도 비견될 수 있을 정도로 화려한 도시가 경성부의 남촌이었다.


경성에서 가장 번화한 곳인 조선은행 앞의 광장 거리 - 일본어로 그곳을 센긴마에 히로바(鮮銀前広場)라고 했다 - 와 혼마치(本町), 메이지마치(明治町), 코가네마치(黄金町) 같은 곳은 말할 것도 없었고, 경성우편국과 미츠코시 백화점 같은 서양식 건물들이 곳곳에 늘어서 있었으며 밤마다 가로등이 켜져 있던 데다 거리는 북촌과 비교하지 못할 정도로 깔끔했다.


이런데도 총독부에 돈이 없어서 북촌을 남촌처럼 밝고 깔끔하게 만들지 못한다고 볼 수는 없었다. 총독부와 조선 총독은 천황의 직속 기관으로서 조선을 관리하는 일이 그들의 업무인 만큼, 이런 차이와 현실을 모를 리는 없었다.


남촌처럼 전부 서양 건물이 깔려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최소한 그들이 사는 곳에 가로등 정도는 설치하고 거리를 정비하는 정도는 할 수 있었을 텐데도,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것은 명백히 고의적으로 조선인들을 차별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밖에 없었다.


총독부는 위선적인 행위를 하고 있던 것이다. 그들이 조선인을 차별하는 것을 잘못인 줄 모르고 했다면 그것은 악이었지만, 메이지 천황은 조선을 합병할 때 ‘조선의 민중들은 짐의 위무 아래에서 그 강복을 증진할 것’ 이라고 말했으니 모를 리가 없었다. 


그들은 천황이 말하였듯이 “일본인과 같은 신민인 조선인” 들을 차별하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 잘못이라고 알고 있으면서도 “같은 신민인 조선인” 들을 차별하는 위선적인 행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위선자들로 가득 찬 총독부의 관리를 받고 조선인들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위선자인 경하의 집안을 증오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같은 신민이라 말하면서도 일본의 헌법은 조선에 적용되지 않았고, 모든 것은 천황의 직속인 총독부가 마음대로 하고 있었으니까.


경하가 태어나기 바로 직전에 조선인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보장하라며 독립을 선언하고 대규모의 시위를 하였을 때도 총독부는 그들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고, 그저 자신들에게 반기를 들었다는 이유로 강경한 진압만을 하였을 뿐이었다. 어째서 조선인들이 자신들에게 반기를 들었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할 리가, 해결할 방법을 모를 리가 없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 ♩,♩,♩,♩.... ♩,♩,♩,♩.... ,  ♩,♩,♩,♩.... ♩,♩,♩,♩.... 



이내 현실의 시간은 아침 7시가 되어, 1층의 괘종시계에는 런던 빅 벤의 타종 직전에 울리는 멜로디인 웨스트민스터 차임을 울리기 시작했다. 간단명료하면서도 귀에 익히는 그 소리를 듣고 경하는 마지막 멜로디가 끝날 때 즈음에 잠에서 깨어났다.


땡, 하는 타종의 소리가 정확히 7번 울리며 2층 방 창문으로 비쳐 들어오는 아침의 햇살은 그 종 소리가 울릴 때마다 밝기와 온도를 더해 가고 있었다.


“...미안해요.”


어딘가 슬픈 듯하면서도 체념을 한 듯한 톤으로 나는 그 소년의 목소리와 함께,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 도쿄의 침묵의 밤과 새벽은 그렇게 끝을 맺었다.







- 각주


센긴마에 히로바(鮮銀前広場) : 당시 조선은행 앞 광장을 지칭했던 말. 현재 한국은행 구 본관 앞.

혼마치(本町) : 현재 충무로와 그 주변.

코가네마치(黄金町) : 현재 을지로와 그 주변.

메이지마치(明治町) : 현재 명동과 그 주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