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다. 햇살이 쨍쨍.

 

매미가 맴맴 울어대는 이 날씨에 한 사람이 큰 바위에 손가락을 문댄다.

문대고 문대르면 무어라도 된다는듯이 끊임없이 문댄다.

 

나, 호기심에 그에게로 한달음에 달려가 무어를 위해 그리도 문대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가 말하기를,

언젠가 자기가 죽고 나서 남는 건 집과 옷과 땅 뿐이라고 한다. 

자식도 자식의 자식, 자식의 자식의 자식, 이렇게 가다 보면 언젠가 자기는 잊혀지고야 말 것이라고 한다.

집도 집을 볼 때마다 집에 대해 생각하지, 자기에 대해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그림을 그려놓아도, 보는 사람들은 다 그림이 아름답고, 그 그림에 담긴 사람이 잘생겼다고 하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고 한다.

만일 이 돌에 그 어떤 구멍이 남아, 이 기이한 이야기에 자기의 이름이 붙는다면 그게 가장 오래 존재되는 것이 않느냐고 한다.

 

내가 반문하기를, 

그렇게 구멍이 뚫려 기억되는 건 구멍을 뚫으려 노력하며 변화된 당신이지, 변화되기 전의 본래의 당신이 아니라고 한다.

결국, 그렇게 변화되는 것에 연연하지 않는다면, 이름 석자, 한자 세 개의 조합에 불과한 것이 오래토록 남는 것 또한 목표를 이루는 것이 아니냐고 한다.

 

그가 대답하기를,

모두는 모두에게 있어서 서로가 서로의 마음 속에 억제된 일면의 증식에 불과하다고 한다.

어떤 이의 한 행동은 다른 이의 억제된 행동이고, 어떤 이의 억제된 행동은 다른 이의 평범한 행동이라고 한다.

 

그는 나 또한 그런 일면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내가 말하기를,

모두에게 있어서 일면이 있다면 어째서 모두에게 존재하는 그 일면을 남기려 하냐고 한다.

 

그는 답했다.

삶이란 그 일면을 실험해보는 한 시도일 뿐이라고, 이 일면이 이랬다고 알리려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