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를 봤다. 3시였다. 빗줄기는 내가 잠들기 전보다 더 굵어져선 창문이라도 뚫을 기세로 퍼붓고 있었다. 냉장고로 가서 차가운 물 한잔을 마셨다. 냉기가 뱃속까지 퍼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가만히 냉장고에 기대어서 왜 내가 이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났는지 생각해보았다. 오줌이 마려운 것도 아니었고 배가 고픈 것도 아니었다. 무슨 꿈을 꾼 것 같긴 했는데 기억이 나질 않았다.

 

부엌의 열린 창문 사이로 빗줄기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빗줄기가 떨어지는 곳에 따라서 다르게 들렸는데 철판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은 텅텅거리는 소리를 냈고 비닐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은 퍽퍽 소리를 냈다. 나는 멍하니 서서 비 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왠지 모르게 계속 듣게 되는 이 소리는 나중엔 무슨 드럼 연주처럼 들리기까지 했다.

 

보통 이렇게 일어나면 몇 분 뒤 다시 졸음이 밀려오고 그대로 잠들어 버린다. 다음날 일어났을 때 자신이 새벽에 깬 것도 기억 못 한 채 말이다. 하지만 오늘은 눈을 감고 몇 분을 누워있었는데도 졸음이 몰려오긴커녕 시간이 지날수록 정신이 말똥말똥해지는 것이 아닌가. 정신이 맑아지니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고 먹을 것이 있나 싶어 냉장고를 열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자리에 누워서 TV를 켰다. 웬 서양 여자가 화이트 초콜릿을 먹는 광고가 나왔는데 여잔 금박 포장을 조심스럽게 벗기더니 반짝거리는 인조손톱이 달린 손가락으로 뽀얀 우윳빛 초콜릿을 집어 단숨에 삼켜버렸다.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초콜릿이 먹고 싶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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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어찌나 쏟아지는지 걸을 때마다 슬리퍼 사이로 빗물이 들어와 발을 적셨고 편의점 간판이 보일 때 즈음엔 발은 완전히 불어서 무슨 호두껍데기 같았다. 편의점 앞 횡단보도에선 젊고 마른 여자가 온몸이 젖은 채 우산도 없이 양손에 술병을 들고 초록 불이 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물줄기는 그 여자의 머리칼은 적셨고 물방울들은 여자의 온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때 불현듯이 아까 꾼 꿈들이 기억나기 시작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렀고 초록빛 잔디밭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나비 몇 마리가 그 애 주위를 날아다니다가 사라졌다. 

 

“추억이 왜 소중한 줄 알아?”

 

그 애가 풀밭에 앉아서 말했다.

 

“모르겠는걸.”

 

내가 대답했다.

 

“순간이 영원하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이야.”

 

그 애는 날 보며 대답했다. 피부는 하얗다 못해 투명했고 두 눈은 파란 하늘빛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었다. 갈색빛을 띄는 머리는 뒤로 묶여 있었는데 구레나룻 사이로 삐져나온 가늘고 긴 머리카락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들판을 걸었다. 목적지는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몰랐고 어디로 가고 싶다는 마음도 없었다. 이따금씩 산들바람이 불어왔고 들판의 풀들과 그 애의 얇은 원피스는 바람의 리듬에 맞춰 흔들렸다. 그 애는 허리에 끈을 두르고 있었는데 그 끈도 바람에 맞춰, 그리고 그 애의 걸음걸이에 맞춰서 흔들렸다. 무엇보다 끈은 그 애의 얇은 허리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이 끈 풀고 싶어?”

 

그 애가 허리의 끈을 집으며 말했다.

 

“풀고 싶어.”

 

내가 대답했다.

 

그 애는 내 손을 잡더니 자신의 허리춤에 갖다 댔다. 나는 끈을 잡아당겼다. 끈은 저 멀리 어딘가로 날아가 없어졌다. 나는 끈이 사라진 쪽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이미 사라진 끈이야. 이제 놓아줄 때도 됐잖아.”

 

그 애가 말했다.

 

저만치에서 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갔다. 큰 강이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는데 물이 어찌나 투명하고 깨끗한지 그 경계를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였다. 우리는 강가에 쪼그리고 앉아 강물을 마셨다. 

 

“이렇게 깨끗한 물 본 적 있어?”

 

그 애가 말했다.

 

“아니. 이런 깨끗한 물은 처음 보는걸.”

 

내가 대답했다.

 

“난 물에 들어가고 싶어. 너도 같이 들어갈래?”

 

그 애가 신이 나서 물었다.

 

난 고민했다. 물에 들어가서 헤엄을 치는 것도 싫었고 옷이 물어 젖는 것도 싫었으며 젖은 옷을 말리는 것도 귀찮을 것 같았다. 내가 물에 들어가지 않으면 그 애가 실망할 것이 뻔했지만 나는 물속으로 들어가기 싫었다.

 

“난 여기서 구경이나 할게.”

 

내가 대답했다.

 

“알았어. 그럼 기다려줘.”

 

그 애가 대답했다. 그리곤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 애는 한참을 물속에 있다가 노을이 지고 하늘이 온통 붉은 빛으로 물들 때쯤에서야 밖으로 나왔는데 머리카락은 몽땅 젖어서 서로 엉켜 있었지만 여전히 은은한 갈색빛을 뿜어냈고 피부는 그 붉은 노을빛 아래에서도 뽀얗고 투명하게 빛을 발했다. 그 애의 허벅지에 맺힌 물방울들은 노을빛을 받아 반짝거렸기에 그 애의 다리를 더욱더 아름답게 만들어주었다. 

 

“정말 개으른 태양인가 봐. 안 그래?”

 

그 애가 내 옆에 앉아서 말했다. 가는 물줄기가 그 애의 얼굴과 여린 목을 타고 흘렀다.

 

“그런 것 같네.”

 

내가 대답했다.

 

 

꿈은 언제나 이런 식이다. 생각지도 못한 것들이 튀어나와선 생각지도 못한 조합으로 뒤섞여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이런 꿈이 상기 될 때는 항상 이상야릇한 감정이 온몸에 흐르는데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다. 인생의 몇몇 사건들은 시간이 지나 잊어버렸을 때 더 아름답게 마음 한구석에 남는 경우도 있으니까. 그것들을 굳이 끄집어낼 필요는 없었다.

 

편의점 문을 열면서 인사를 했지만 아무도 받아주지 않았다. 아르바이트생은 자고 있었다. 나는 초콜릿을 집어 포장을 벗긴 다음 돈과 함께 계산대 옆에 놔두고 나왔다. 사방이 빗소리로 울렸다. 그 애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더라? 몇 년? 아니 몇십 년 전일 것이다. 이제는 그 애의 이름도 헷갈리고 얼굴도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그 느낌만은 잊을 수가 없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그 느낌.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을 때 온몸을 타고 흐르는 그 느낌은 이젠 빗줄기가 되어서 이렇게 쏟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