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뒤집힌다.

땅은 이미 형체를 잃었다.

시공의 폭풍이 시체 더미를 휩쓸고 있었다.


눈을 감았다 떠도, 폭풍이었다.

감귤은 혼돈을 낳고 이야기의 스케일은 이미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고 말았다.


[감귤포장학과].


이 단순한 한 단어가 이렇게나 많은 죽음을 몰고 온 것이다.

폭풍의 눈 속에서 담담히 상황을 관조하던 환월을 향해 내가 말했다.


"감귤을 포장한다는 의미는 배웠나?"

"제 부모를 욕보이는 걸로는 부족했습니까?"

"그래."


폭풍이 더욱 거세어졌다.

그녀와 나 사이의 공기가 요동치고 있었다.


"헛소리를 할 생각이라면 그냥 닥치십시오."

"황제라는 게 그렇게 속이 좁으면 쓰나."


내가 아무리 주인공이라도, 사천왕을 쉽게 쓰러뜨리고 해피 엔딩을 맞을 가능성은 없었다.

그만큼, 감귤은 중대 사항이었다.

이때까지의 과몰입은 지금을 위해 준비된 것이다.


-[과몰입]감귤포장학과 김창문


"귤의 역사는 삼국 시대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원래는 한반도에서 기르기 힘든 품종이라 옛 탐라 땅에서나 받을 수 있는 과일이었지. 그렇기에 귤은 삼국시대부터 제 3공화국까지 쌀보다 귀한 대접을 받아왔다."


다 아는 이야기다.

환월의 얼굴이 벌레 씹은 듯 변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났다. 토종 귤은 당도와 크기가 충분치 않아 밀려났고, 지금의 우리가 포장하고 유통하는 귤은 중국에서 유래된 온주밀감이다."


의미없는 짓이다.

무심결에 그렇게 느껴질 만한 말을 골랐다.

환월의 입장에선 그저 시간 끌기에 불과하다 느껴져야만 했다.


"그렇기에, 학과의 이름에 '감귤'이라는 단어가 붙는 거다."


하지만 환월은 생각 한구석에 의심을 품는다.


수백만의 그를 몰살한 직후다.

인간이라면 지금쯤 공황 상태에 빠지는 것이 정상이다.

단순히 살아남는 것이 목적이라면 이렇게 시간을 보낼 이유가 없다......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김창문의 언동은 한참 전에 선을 넘었다.


뇌가 있어야 할 자리에 우동사리라도 들어간 것처럼 과몰입을 남발한다.

단순히 투쟁을 위해 초면인 인간에게 부모 욕을 하는 남자다.

첫인상은 완전히, 상종할 가치가 없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왜?


"환월,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고 있나? 방금 너는 수백만의 '나'를 죽이지 않았나. 살육을 즐겼잖나. 그럼 피해자랑 필로토크 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

"......."

"머저리 장단에 맞추려니 힘든가? 개강 소식에 개강해졌다며 개지랄을 떨던 놈이 개나발을 불어대니까 개같나?"


입가에 자연히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느끼기에도 참 사람 좋은 미소였다.

단지, 지금 상황에서 이런 표정은 딱 미친놈 취급 받기 좋을 것이다.


"20년간 한국 교육계에서 사육당했다. 그리고 4년동안 대학교에서 썩었다. 그런데 8년동안 정지당하고 말았다. 내 청춘이란 혹사와 억압의 역사다."

"그래서요?"

"감귤을 포장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감귤은 스스로 습기를 내뿜으며, 내상을 입으면 금세 곰팡이가 핀다. 상하차당하며 상처입는 감귤을 지키는 것이 내 사명이었다."


마침내 이야기는 절정을 지나 대단원에 이르렀다.

이야기의 무대는 환국. 역사적 증거라고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화려한 전장이다.

사천왕 중 셋은 시체가 되었고, 나 역시 수백만의 시체를 뒤에 도열한 채 혼자 서 있다.


들고 있는 무기는 맨주먹.

입고 있는 방어구는 넝마 한 장.

전쟁의 훈장은 늙어버린 얼굴 단 하나.


이길 수 밖에 없는 싸움이다.


환월, 너는 도발임을 알면서도 내게 달려들었다.

게다가 과몰입한 대상은 시공의 폭풍이라니, 우습지 않은가?

감귤을 포장하는 이유에는 악천후를 극복한다는 것도 있음을 망각했는가?


"참으로 우습지. 안 그런가?"


양 다리를 어깨 너비만큼 벌린다.

심호흡으로 호흡을 고른다.

자세는 대지처럼, 호흡은 산들바람처럼.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천하일색의 꽃을 피우며 열매로는 만백성을 먹일 수 있음이라.

깊은 샘의 물은 가뭄에도 그치지 않고 솟아나, 냇물이 되어 대양에 이르니.

이곳은 이미 나의 영역이었다.


"환월, 죽을 준비는 됐나?"


지금부로, 감귤포장학과 사천왕의 장례를 지낸다.


김깡깡에게는 술 한 잔을.

대학원생에게는 숭늉 한 그릇으로.

김하르방에게는 간장 한 종지로 애도를 표하리라.


"제가 할 말입니다."


그리고 환월 너에게는, 내가 특별히 이배를 올린다.

감귤을 포장하는 것은 단순히 미적 감각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천지인을 만족시키는 것이다.


귤껍질을 벗겨내는 자들을 존중하라.

단맛을 위해 귤을 주무르는 자들을 찬양하라.

귤을 선물삼아 보내는 이들에게 감읍하라.


이곳이야말로 감귤포장학과의 실습 현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