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비트립이구나! 이런데서 만나니까 반갑다. 근데 무슨 일로?"
"그게, 마왕성을 발견하긴 했는데, 너희의 도움이 좀 필요해서 말이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병단을 무시하더니, 이제 정신 좀 차렸나보네ㅋㅋ. 그런데 방금 그건 뭐야? 뭔가 엄청난 빛줄기가 있었던 것 같은데, 설마 마법?"
"어. 마법사의 힘을 좀 빌렸지. 바닥에 그어진 마법진 보이지? 이걸로 텔레포트 했다."
"오오오오오."
 
그레이엄의 눈이 호기심과 경외심으로 동그래졌다. 마법진에 그려진 문양과 고대어인 룬 문자는 처음 봤나보다. 지금 보니 마법진을 바라보는 그레이엄과 그런 그를 바라보는 코스타의 눈빛이 비슷해보였다. 그 때, 카일라가 앞으로 나가 꾸짖었다.
 
"뭘 그렇기 놀라냐, 이 기사 나부랭이가."
"비트립, 이 여자애는 뭐냐? 그리고 왜 반말하는 거냐?"
"카일라 플뢰르다. 카일라라고 부르면 된다."
"아, 얘는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다 준 마법사야. 마왕에게 불만이 있다는 이유로 우리들이 잠깐 편을 먹었는데, 얘가 기본적으로 전사를 무시하는 기질이 있어서 말이지."
"아, 그렇군. 그러면 다시 본론으로 넘어와서, 너희들을 어떻게 도와주면 되는 건데?"
 
이 이후로 비트립 단장님과 그레이엄과 카일라가 대화를 나누었다. 그래도 나는 그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팬심이 발동해서 자꾸 뛰어들어가려는 코스타를 말리는데만 해도 엄청난 정신력이 소모되었기 때문이다.
 
*
 
건국자 공동묘지. 건국에 참여한 사람들과 그 가문들의 무덤을 모아놓은 공동묘지이다. 그 숭고함 때문에 슬레이어 탑을 제치고 슬레이어 왕국 관광지 순위 1위를 매년 당당히 차지하고 있다. 건국자 공동묘지 중에서도 가장 인기가 많은 무덤은 대예언가 예리우스 하네온과 대학자 베르너 폰 하인리히의 무덤이다.
 
막시투스타가 그 묘소를 찾아간 날은 다행히 사람들이 거의 없어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자신의 형과 비트립의 아버지가 같이 안치된 묘소. 이곳에서 막시투스타는 비트립의 이야기를 꺼내고자 했다.
 
막시투스타가 첫번째로 자신의 형인 예리우스 하네온의 묘비 앞에 무릎을 꿇었다. 묘비에는 고대어 중 하나인 에스페란토식 로마자 28자가 원형으로 그려져있었고 그 밑에는 숫자 220과 284가 적혀있었다.
 
"형... 형이 언변과 지략이 있는 자가 공주를 구한다 했지? 그리고 무쇠를 자를 수 있는 검을 가지고 있고. 그런데 나는 어째서 아직도 그런 검을 만들 수 없는 걸까? 어째서 비트립이 떠나기 전에 내가 먼저 갈 수 없었던 걸까? 형, 나는 비트립이 없으면 살 수 없는데, 어째서 그 이전에 무쇠를 자르는 검이 완성되는 시간이 다가오지 않았던 걸까? 만약에 형이 유품으로 남겨준 영어사전(이때 기준으로는 고대어이다.)을 사용할 방법을 알 수만 있었다면, 비트립을 구할 수 있었을까? 형, 나는 이제 어떻게 하면 좋아?"
 
막시투스타가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옆에 있는 베르너 폰 하인리히의 묘비를 바라보았다. 묘비에는 옛날에 학자를 상징했다는 큰 학이 그려져있었다.
 
"베르너 아저씨, 아저씨의 외동딸이자 저의 오랜 친구인 비트립이, 돌아가신 아저씨처럼 병단을 이끌고 마왕성으로 갔습니다. 아저씨께서 정체를 숨겨오던 그 비트립이 마왕성의 최전선에 가서 싸우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꽃이 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아저씨, 제가 지금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제가 무엇을 하면 좋겠습니까? 제가 사랑하는 비트립을 어떻게 구할 수 있습니까?"
"야, 그만 해라, 좀.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네."
카스트로가 막시투스타의 등 뒤로 걸어오며 질책했다.
"그만 좀 쳐울어라. 비트립이라면 그 정도는 해낼 수 있을 거야. 베르너 아저씨께서도 못하셨던 업적을 비트립은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너는 비트립한테 그 정도 믿음도 없는거냐?"
"그야 내가 공주를 구할 사람이니까!"
막시투스타가 큰 소리를 내며 벌떡 일어났다. 그 목소리는 애절한 슬픔으로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