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레이/마검) 6화


내 이름은 판.

다소 이국적인 이름이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한국사람이다. 아버지가 그리스로마 신화 덕후여서 이렇게 지었을 뿐이다.

참고로 성은 진이다.


올해 초, 창문대 감귤포장학과에 들어온 나는, 대학은 처음 입학하는 참이었기에 기대에 부푼 마음을 가라앉히느라 큰 고생을 하였다. 지금와서 생각해보건대, 그 기대중 열에 아홉은 쓰잘데기 없었다. 가히 망상이라 부를 법한, 그런 부류였다.


그래도 나머지 하나는 깨나 생산적이고 실현가능성 높은 것들이었는데, 이를테면 '학교 앞 사거리를 돌다가 찌코쿠찌코쿠하면서 잼을 바른 식빵을 입에 문 여대생을 만난다면 그녀는 과연 내 인생의 서브히로인일까 메인히로인일까' 같은 질문이 그에 속하였다.


그런 나에게, 사건은 내가 입학한 그 해 2월 31일 일요일에 등교하다가 일어났다. 그 날도 어김없이 사거리에서 식빵녀를 기다리던 내 머리 위로 왠 검이 떨어진 것이다. 척 보기에도 불길해보이는 검이었다. 뭔지 모를 오라같은 것도 보였고, 일단 때깔부터 검은색과 붉은색이 뒤섞인 듯한, 그런 중2병 넘치는 색이었다. 무엇보다 커플 전용이라고 써져있는 것이 심히 불길해보였다.


좌우간 그 검은 여러모로 퍽 께름칙한 물건이지만, 나는 [과몰입]능력 사용자이다. 흔히 말하는, 중☆2☆병 환자란 말이다. 그것도 교내 사천왕에 들만큼 강력한! 그런 나의 눈앞에 검이 있으면 뽑아주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암 그렇고 말고. 혹시 또 아는가, 이 검에 흑염룡이 잠들어 있을지.


"안녕하신가, 힘세고 강한 아침. 만일 내게 물어본다면 내 이름은 졸도"


이럴수가, 검이 말을 한다! 게다가 묘하게 귀여운 목소리로! 그렇다, 내가 손을 대자마자 검이 말을 했던 것이다. 이건 그건가? 드디어 흑염룡이 나오는 건가? 기대를 품고 나는 조심스레 검에게 물었다.


"안녕하살법, 나는 판이야. 성은 진. 혹시 너는 뭐하는 검이니? 혹시 안에 흑염룡이라도 들어있는 거니? 내가 말하는 검은 처음 보는..."

"아니 그런 건 없는데?"


실망. 대실망. 안에 흑염룡이 없댄다. 흑염룡도 없는 검이 무엇을 할 수 있지? 팝콘 가져오는 거? 그렇게 내가 실망이 역력한 표정을 보이고 있을때 검이 말하였다.


"야야 주인"


아무래도 나는 얼떨결에 주인이 되어버린 거 같다. 싫은데. 흑염룡없는 검 같은 건 싫은데.


"그리 실망한 표정 짓지 마라. 나 이외로 대단한 몸이야"

"얼씨구 뭐가 그리 대단하슈"

"내가 말이야, 지니 비슷한 거라고."

"지니?"

"그래. 지니는 보면 주인의 소원을 세가지 들어주잖아."

"그건 디즈니고 원본은 다르..."

"나는 하나밖에 못 들어주지만 주인에게 원하는 초능력을 하나 줄 수 있단 말이지."


주인(?) 말이나 끊는 못되먹은 녀석이지만 내용은 맘에 들었다. 능력을 맘대로 준다는거지? 그러면... 그렇고 그런 짓이나 이렇고 이런 짓을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능력도 얻을 수 있다는 거지?


보통 이 대목에선 거짓말일거라고 생각하고 안 믿겠지만 난 다르다. 믿어야지! 비록 흑염룡은 없지만 검이 말을 하잖아! 검이! 말을! 어떻게 안 믿을 수가 있겠어!


...


그후로 녀석과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녀석과 녀석이 말한 능력에는 몇가지 조건이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첫째, 검과 몸이 닿아 있는 동안에만 능력을 쓸 수 있다.

둘째, 정식으로 주인이 되는 계약을 한 후로부터 정확히 일주일후에 검은 사라진다.

셋째, 검을 투명화시키는 것은 기본 옵션이다.

넷째, 계약서를 잃어버리면 계약은 해지된다.

다섯째, 여러 개의 능력을 쓸 수 있게 되는 소원은 쓸 수 없다.

여섯째, 검에게 민트초코를 주지 않는다.

일곱째, 검의 무게와 길이, 크기조절도 기본 옵션이다.


다섯째는 본래는 없던 조항이라는 듯하다. 녀석의 말로는 몽골의 어느 왕에게 된통 시달린 후, 그러고도 만족을 못한 왕이 마지막에 한 괴랄한 동사무소를 만들게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 현자타임이 "씨게" 와서 추가했다고 한다.


여하간 심사숙고 끝에 내가 얻은 능력은...


"자, 나와 계약해서 주인이 되어줘! 너의 소원은 뭐니?"

"더 얼드 를 줘."

"뭐라고?"

"시간정지의 능력을 주라고."


시간정지이다. 시간이 정지되어 있는 동안에 다른 사람들은 그 사실을 인식하지도, 정지된 시간동안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인식할 수 없었다. 이를 이용해서 나는 나의 일생어치의 욕구를 풀었다. 특히, 성욕을 풀었다. 맘에 드는 여성이 있으면, 시간을 멈추고, 이렇고 저런 짓을 실컷 하였다. 그리고는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물론 겉모습만이다- 되돌린 후, 다시 능력을 해제했다. 세어 보지는 않았지만, 얼추 남한땅의 대도시는 거의 다 점령한 것 같다.


성욕을 푸는 행위외에도 나는 여러 유희를 하며 나만의 세상을 즐겼다. 가게에서 무전취식을 해보기도 하고, 도둑질도 몇번 해보고, 내 맘에 안 들던 녀석들은 병원신세도 몇번 지게 해주었다. 정지시킨 시간동안 아파트 옥상으로 몸을 이동시키면 간단한 일이었다. 현실로치면 범죄겠지만, 뭐 어떤가? 누가 나를 감방에 집어 넣을 거라고.


한번은 마검이 화를 내기도 하였다.


"너 정말 쓰레기구나. 너같은 쓰레기는 처음 만나본다. 차라리 이전주인이었던 [일요일에도 사원들을 부려먹을 수 있게 해달라]는 그 녀석이 더 맘에 들 지경이다. 도대체 왜 이 좋은 능력을 그런 데 쓸 생각만 하는 거니?"


그 한마디로에 양심이 뜨끔해진 나는, 그로부터 얼마동안은 정의구현을 하며 살았다. 예전에에 보았던 데스뭐시기 만화 흉내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즉, 척보기에도 나빠보이는 녀석들을 몇명 담갔다..


"수면성폭행했네? 담그자."

"얘는 강도? 담가야겠다."

"특수폭행? 얘도 담글까."

"무전취식이네? 비교적 가볍지만 깔끔하게 담가줄까."


이런 식으로 나는 나만의 세계의 신이 되었고, 그로부터 한동안은 이런 일상이 반복되었다. 은밀했던 욕구부터 비교적 공개적인 욕구까지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하며, 때때로 심판자 흉내를 내며 정의를 구현하는 그런 일상이. 나는 나의 남다른 포부를 썩 훌륭하게 드러냈다. 나의 크고 아름다운 포부를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에 기어이,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그날도 신나게 백화점의 물건을 쓸어담는 중이었다. 분위기 내려고 옷도 닌자풍으로 입고 말이다. 또한, 왠지 모르겠지만, 경찰이 바로 눈앞에 있었는데, 나는 이 들킬 듯 하면서도 절대 들키지 않는다는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나의 세상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던 중, 돌연 마검이 나에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이제 약속한 시간이 됐어."

"무슨 말이야 아직 이틀밖에 안 지났는데?"

"정지된 동안의 시간도 포함해서 계산하는 거거든."

"뭐? 그게 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마검은 사라졌다. 투명하게 모습을 바꾸어 놓은 터라 눈에 보이기로는 별반 다를 바 없지만, 손에 감촉이 없어진 것이다. 지금까지 처럼 마검의 손잡이를 쥐던 감촉이. 나는 그녀석이 사라진 것을 실감했다. 그리고 절망했다. 그 녀석이 사라졌다는 것은 곧, 지금까지처럼 능력을 마음대로 쓰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 시간정지도 곧 풀릴지도 모른다. 그렇다, 곧 풀릴지도... 뭐?


사고가 여기까지 도달하자, 마음이 급해졌다. 어서 이 상황을 수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일 걸리기라도 한다면 위험하다. 왜냐하면 지금 나는 명백한 절도범의 모습이니까. 그러나 내 생각은 틀렸다. 시간정지는 "이미" 풀려있었다. 그로 인해 내가 당황하여 어쩔 몰라하던 동안, 나는 금품절도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


... ...


"... 그렇게 된 겁니다 변호사님. 저 어떻게 좀 안될까요?"

"... 정신분열이라고 하고 정상참작이나 노려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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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당 5천자인 줄 알고 서론 너무 길게 썼네요...

근데 원랜 개그로 쓰려고 했는데 왜 도중부터 진지해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