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는 아주 먼 옛날, 아직 정령들이 남아있던 시절의 이야기 입니다.

 

어느 울창한 숲속. 한 정령은 눈을 떳습니다.

이곳은 내가 오랜시간 살아온 장소.

숲의 첫 나무가 새싹을 틔운 그 순간부터 살아온 장소.

나무가 한 그루 열 그루 백 그루가 넘어가고, 토끼와 사슴과 호랑이가 뛰놀기 시작한 그런 숲속...

 

----

 

그러던 어느 날.

본적 없는 동물이 숲에 들어왔습니다.

스물 조금 넘어가는 그 생물들은 스스로를 인간, 사람, 화전민이라 불렀습니다.

정령은 그들을 흥미롭게 바라보았습니다.

이 숲은 어떤 생물이라도 받아들이는 장소.

새롭게 나타난 동물들은 어떤 존재일까?

화전민들은 숲을 한번 둘러보더니 이 곳에 살기로 결정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어떤 생물도 하지 않은 행동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숲 한중간에 불을 놓았습니다.

나무와 풀들이 불에 휩싸이고, 토끼와 사슴들이 도망다니고, 나무에서 나무로 불이 옮겨붙고...

 

숲에 불이 나는건 처음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숲에 생물이 직접 불을 지르는 일은 처음 봅니다.

 

얼마 후 불은 꺼졌고, 매우 넓은 트인 장소가 생겼습니다.

보통 이런 장소는 쑥이나 잔디같은 작은 풀들이 먼저 자리를 잡고, 동물들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자리를 잡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 땅에 바로 자리를 잡는 모양입니다.

잿더미가 된 식물들과 흙을 잘 섞고, 그 자리에 밀이나 가지, 토마토 등 영양가 높은 식물의 씨앗을 뿌립니다.

흙이 단단한 지역에는 나무를 곧게 꽂고, 엮어서 그들만의 집을 만듧니다.

 

그들이 완전히 정착하고 많은 시간이 흘러갑니다.

해가 기울고, 다시 일어서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 시간, 모든 생물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한 주기의 시간동안 정령들은 인간을 관찰했습니다.

그들은 대단히 흥미로웠습니다.

그 어떤 생물들도 이렇게 정돈되면서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이진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땅은 매우 기름지고, 풍요로운 장소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화전으로 떠도는 생활을 접고, 매우 기름진 이 땅에 완전히 정착하기로 하였습니다.

 

----

 

다시 시간이 흘러, 20명이 60명이 되고, 마을 성장하고, 숲의 바깥과 연결되는 길이 생긴 뒤 어느 화창한 봄날.

숲 한중간에서 정령은 한 소년을 발견하였습니다.

 

이곳은 소년이 혼자 들어오기는 너무 깊은 숲속입니다.

하지만 소년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채 그저 노는데 열중하는 모양입니다.

 

그때, 정령은 재미있는 놀이를 떠올렸습니다.

그것은 소년의 몸에 빙의하여 인간으로서 마을에서 생활해 보는 겁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정령은 조용히 소년을 잠들게 했습니다.

그리고 소년의 영혼을 마음 깊은곳에 묻어두고 그 몸을 자신의 것으로 하였습니다.

 

그렇게 정령은 마을의 주민 잭(Jack)이 되었습니다.

 

----

 

잭은 활발한 아이였습니다. 몸을 움직이며 놀기를 좋아하고, 동물들과 친하게 지내고, 부모님 말씀을 잘 듣는 착한 아이였습니다.

또래의 친구와 함께 놀고, 주위 어른들로부터 사랑받으며 잭은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그러면서 점차 정령으로서의 자아를 잃고 인간으로서의 자아를 확립해 나갔습니다.

인간으로서 자신을 자각하면서, 잭은 샐리(Sally)라는 아이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잭과 샐리는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고 세 아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30년이 흘렀습니다.

 

어느 떠돌이 주술사가 이 마을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주민들은 주술사를 잘 대접해 주었지만, 주술사는 어딘가 불편한 기색이었습니다.

한 주민이 주술사에게 어딘가 이상한 점이 있느냐고 묻자 주술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 마을에서는 사람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고, 울창한 숲과도 같은 기운이 느껴진다.

  이는 필시 장난을 좋아하는 숲의 정령이 마을 전체를 홀리고 있음이라.

그러면서 주술사는 사람의 힘이 숲의 힘에 밀리면 마을을 더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될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결국 마을사람들과 주술사는 영적으로 마을을 주위의 숲과 분리시키는 의식을 진행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의식이 진행되면서 잭의 상태가 이상해져 갔습니다.

잭은 점점 정신이 혼미해지더니 이내 기절하였습니다.

주술사는 이 남자가 정령에 완전히 홀려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정령이 마을 전체에서 물러나면서 남자에게 더이상 빙의할 수 없어지면서 그 충격으로 의식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루 푹 자면 잠들었던 본래의 의식이 깨어나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의식이 끝나고 주술사는 마을을 떠났고, 주민들은 그를 잘 배웅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잭이 눈을 떳습니다.

 

하지만, 잭은 어린 아이처럼 행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부인 샐리를 알아보지 못하고, 아버지를 할아버지라 부르면서, 자신의 아이들을 형, 누나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잭은 30년 전 그날 잠든 이후 전혀 성장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0년동안 샐리와 결혼하며 아이들을 가지고 나이를 먹은 것은 정령이 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를 모르는 마을사람들은 정령이 발악하며 잭에게 저주를 걸었다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잭을 해코지 하지는 않고 불쌍히 여겨주었습니다.

 

그러나 진짜 저주는 그때부터 천천히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더이상 정령이 관여할 수 없어진 마을은 점점 생명이 말라가기 시작했습니다.

곡식과 열매는 해가 갈수록 낱알이 줄어갔고, 병에 걸린 이들은 쉽게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지하수에서는 이상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고, 숲속의 생물들은 마을사람들에게 강한 공격성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마을사람들은 잭과 주술사를 탓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 때문에 마을이 이지경이 된 것이다.

 

그로부터 몇 년 가지 않아 마을은 완전히 버려지게 되었습니다.

 

잭의 몸에서 빠져나온 정령은 여전히 정령으로서의 자아를 되찾지 못하고 유령으로서 숲을 떠돌고 있었습니다.

풍요로웠던 숲은 정령을 잃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