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날 하루는 평범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씻고, 식은 햇반을 억지로 입 속에 구겨 넣고, 다림질을 언제 했는지 모를 구겨진 후드티를 몸에 걸치고 대문을 나선다.

날씨도 평범했다. 봄철치고는 햇살이 약간 따가웠지만, 선크림을 애써 바를 정도는 아니다. 외려 늘어선 플라타니아 가로수들 사이로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이 피부에 서늘하게 느껴질 정도. 하지만 딱 좋았다. 나는 여름보다는 겨울이, 더운 것보다는 추운 게 좋았다. 한겨울에 편의점에서 사온 아이스크림을 퍼먹는 건 나만의 소소한 낙이다.

서론이 길었지만, 어쨌건, 그 날 하루는 그랬다. 반 쯤 억지로 떠맡은 과대표 업무를 어거지로 처리하고 본관을 나오던 그 순간까지, 그 날은 여타 다른 날과 비슷하게 흘러갔다. 떨어지는 물을 따라 돌아가는 물레방아처럼, 12로 나뉘어진 숫자를 따라 언제까지고 회전하는 시계 분침처럼, 그렇게. 너무나도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다 보니 그렇게 산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흐르는 물결에 떠다니는 나무토막처럼 사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나무토막조차도 때때로는 돌부리에 걸리기도 하고,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개울 기슭에 멈추기도 하는 등, 소소한 변수가 있는 법이다. 언제까지고 변치 않는 건 시시각각 변화하는 세상에서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니.

그 날 그녀를 만난 건, 내게는 잔잔한 호수에서 풍랑을 만난 것과 진배없는 일이었다.

 

화요일 네 시 삼십분 사십 오초. 

본관 앞 풀밭 위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그녀를 본 순간, 나는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확인했다. 의도적으로 한 행동은 아니었다. 어쩌면 과대표 일로 굶주린 위장을 달랠 무언가를 사려 매점에 다녀올 시간을 확인했을지도 몰랐다.

아무래도 좋다. 이유가 어찌되었건, 나는 시계를 확인했고, 그녀를 처음 본 그 순간이 언제였는지 똑똑히 기억했으니까.

 

어깨 위에서 살짝 친 단발,

약간 가녀린 듯한 인상,

무거워 보이는 전공책을 단단히 껴안은 팔,

역광을 배경으로 곧게 뻗은 다리,

질끈 묶은 스니커즈 주위에서 흔들리는 잔디까지.

검은색 눈동자,

뿔테 안경,

목에 걸고 있는 은빛 체인까지.

 

나는 그녀를 처음 본 순간, 그녀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을 머릿속에 기억하려 노력했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 이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모습은 내게 너무나도 익숙했다. 내게 조금이라도 미술적인 재능이 있고, 누군가가 내게 흰 도화지와 연필을 준다면 당장에라도 그 날 그녀의 모습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너무나도 익숙한 모습이었고, 그래서 기억하기도 쉬웠다. 

어쩌면 전생에 우린 인연이 있던 거 아닐까? 그래서 이리도 쉽게 알아볼 수 있던 거 아닐까, 라는 멍청한 생각이 들 정도로. 고등학교 시절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겠지. 이성이고, 사랑이고, 아무것도 믿지 않고, 아무것도 관심주지 않고 오로지 책 속에만 빠져 살던 꼴통. 그런 꼴통이 이런 멍청한 생각까지 해 가면서 이유를 찾다니, 나답지 않다. 

그래, 그 말대로다. 나는 꼴통이다. 되도 않는 미래를 지껄이며 공부에 매달리고, 영원토록 쓰지 않을 것 같은 단어와 수식들을 억지로 머리에 쑤셔박았다. 

그런 내게 사랑이라니. 갑자기 현기증이 온 나는 본관 문기둥에 몸을 기댔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금방이라도 그 자리에 쓰러질 것 같고, 눈 앞이 빙글빙글 돌았지만, 그래도,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한 발 한 발, 무거운 추라도 얹은 마냥 무거운 발걸음을 조심스레 뗐다. 언제 이렇게 긴장한 적이 있었나? 불수능이라는 수능 시험장에 들어갈 때도, 장학금이 결정되는 마지막 내신 점수를 확인할 때도 이렇게 떨린 적은 없었다. 

나는 그래도 앞으로 걸었다. 걸어나갔다. 잔디밭을 밟고, 마음에 이는 동요를 최대한 가라앉히며, 그녀에게로 걸어갔다. 

그녀의 얼굴이 천천히 돌아간다. 뿔테 안경 너머로 비치는 커다란 눈동자에는 의문이 가득 차 있었다. 

서로 시선이 마주친 순간, 얼음물을 한 바가지 뒤집어쓴 듯 정신이 말짱해졌다. 가까이 보니 못 생겨서? 아니다. 이 만남에 외모 따위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외모는 첫 인상의 아주 일부분이다. 

말로 표현하긴 힘들지만 그건 일종의 반작용이었다. 내가, 나라는 꼴통이 지금까지 수많은 관계를 망쳤지만, 지금 이 순간마저 망치기는 절대로 싫다는 발악에 가까운 반작용. 

방금 전 까지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던 불안감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날씨 참 좋죠?”

 

그 멋대가리 하나 없이 틀에 박힌 듯한 인사는, 봄철의 맑은 하늘 아래서 내가 그녀와 엮이게 된 인연의 나날들, 그 대망의 첫 번째였다. 

 

 

 

 

 

 

 

 

 

두 번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