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모든 사람의 소망이자 숙명.

그러나 누군가는 더 많이 차지하고 누군가는 평생 차지하지 못하는 불평등한 것.

그것을 위해 그는 절규하고 있었다.


"여친 생기게 해주세요!"

"그 강렬한 소원 내가 이루어주겠다!"


방 안을 가득 채운 갓 성년이 된 남자의 말에 마검이 갑자기 등장했다. 그것이 남자와 마검의 첫만남이었다.


"어 뭐야, 너 대체 뭐야?"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난 검을 보고 남자가 놀라자빠지며 뒷걸음질치다가 침대에 발을 찧었다. 발이 너무 아파 발을 손으로 잡고 콩콩 뛰어다녔으나 이내 중심을 잃고 땅에 코를 박았다.

"아야야..."

"병신ㅋ"

마검이 냉담하게 비웃고 말을 이었다.

"그래, 나는 마검이다. 소원 뭐든지 들어주는 전지전능한 마검이지."

듣는 사람을 깔보는 듯한 자뻑스러운 어조에 남자의 가오가 상했다.


"그래서 너의 소원이 무엇이냐?"

"아까 들었을 거 아니야."

남자가 똑같이 냉소적인 태도로 답했다. 너도 당해보라는 심보였다.

"아, 그거 내가 나타나기 전이라 못 들었는데."

"전지전능하다매."

"아니, 소원에 대해서만 전지전능하다고."

"전지전능한 게 아니네?"

"전지전능하다니까?"

"그럼 맞춰보든가. 전지전능하다매."

"그걸 내가 어떻게 맞추냐 새꺄?"

"뭐야, 사기꾼이네."

마검의 삔또가 적잖이 상했다.


"그럼 소원 말해보던가! 네가 말하기 전엔 나도 안 들어줘."

"그럼 내가 아까 말했던 소원을 들어줘."

"ㅈ까. 내가 모른댔지."

"사기꾼 맞네."

"ㅈ까."

"사실 너 굉장히 싸구련데 사기치는 거 아니지?"

"아니라고 ㅅㅂ련아."

"아니 근데 왜 욕 계속 섞어쓰냐?"

"내 맴이다 ㅂㅅ아 "


"그럼 소원 말한다?"

"어, 그래 말해봐."

"1을 0으로 나눠봐."

마검이 잠깐 생각하더니 손사래치며 거부반응을 보였다.

"야이 ㅅㅂ 그건 좀 아니지!"

남자가 그걸 보고 시니컬한 미소를 지었다.

"전지전능하다매 ㅋㅋㅋ"

"ㅈ까."

"그럼 전자의 위치랑 속도를 동시에 측정해봐."

마검이 그럴싸하다고 생각해 일단 측정해보았다. 그런데 배스킨라빈스에서 처음보는 메뉴가 있다며 민트초코를 괜히 먹어본 초등학생처럼 격한 거부반응을 보였다.

"야 이건 좀 아니지 ㅅㅂ."

"에이, 역시 못 하잖아 ㅋㅋㅋ 전지전능하다더니 사기네 사기."

마검이 분을 삭이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그래봤자 남자에게는 쇠붙이로 보일 뿐이었다.


"근데, 뭐 소원 들어주면 영혼 뺏어간다거나 그러냐?"

"난 영혼 안 뺏어가. 그건 장담할 수 있어."

"진짜지?"

"응 진짜야."

"그럼 예전엔 무슨 소원 들어줬는데?"

"처음엔 몽골 고등학생한테 가서 중국 멸망시켜줬지."

"어? 설마 테메린?"

"아네? 걔 이름 어떻게 알아?"

"당연히 알지. 7일만에 중국 정복했다고 세계가 경악해서 뉴스에서 맨날 떠들어대는데 누가 몰라?"

마검의 기가 살았다. 뭔가 자부심이 느껴져서 마검이 생색을 내기 시작했다.

"그치, 그거 다 내가 해준 거야. 나때는 말이야, 그 테메린이라는 애 처음 만났을 때..."

입이라고 할 건 없지만 마검의 입에서 라떼라는 소리가 나오자 본능적으로 남자가 말을 끊었다.


조금 생각해보다가 남자가 말을 이었다.

"그래도 테메린이면 킹정이지. 그럼 소원 빈다?"

"오케이 다 받아줄 준비 됐어. 말해봐."

"여친 만들어줘."

"오케ㅇ... 잠깐, ㅁ, 뭐? 여친? ㅅㅂ 겨우 그거?"

마검이 당황해서 말문이 막혔다. 소원이 사소해도 너무 사소했다.

"ㅇㅇ 여친 만들어줘."

"아 자, 잠깐만 생각할 시간 좀... 아니, 그니까 내 말은 나라도 정복할 수 있고 절대권력도 줄 수 있도 돈도 많이 줄수 있고 뭐 다 할 수 있어!"

"됐고 여친."

"다른 거 많아! 뭐 너한테 초능력도 줄 수 있고..."

"여친."

"나라 정복같은 거 안 할래? 대통령은?"

"어차피 너 사라지면 나 정치감각 없다고 정치인들한테 이리저리 씹히고 결국 이용당하다 버려질텐데 필요없어. 돈도 갑자기 많이 나오면 어디서 났냐고 경찰에서 찾아와서 귀찮고."

"아니, 난 너 자질 보고 온 거라고. 넌 충분히 그런 대통령이 될 자격이 있다고. 테메린처럼!"

"여친."

"아 ㅅㅂ 이 ㅅㄲ 말이 안 통하네! 오케이, 알았어! 여친 만들어줄게! 그럼 됐지!"

"당연하지!"

"대신에 후회하기 없기다!"


남자가 신나하면서 입꼬리가 하늘로 승천하는게 보였다. 아주 그냥 행복해서 죽을 것 같은 지경이었다.

시간도 별로 안 지났는데 남자의 볼이 빨개지고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사람이 설렌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실감했다. 얼굴이 화끈해 두 손이 자동으로 올라가 얼굴을 덮었다. 그리고 발을 동동 구르며 방 안을 이리저리 왔다갔다했다.

"븅신. 그리도 좋냐?"

"응!"

"나 참. 어디보자, 지금쯤이면... 어, 왔네. 네 여친 왔다."

"어디, 어디?"


띵동. 초인종이 울렸다. 택배가 아닌 목적으로 울린 첫번째 초인종 소리였다.

가슴이 설레었다. 머릿속이 꽃으로 가득 찼다. 눈이 초롱초롱해지고 생기가 돌았다. 발은 머리가 지시하기도 전에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남자가 문을 열자 바로 여자가 보였다. 새하얀 고운 피부에 또렷한 이목구비. 잘 빠진 턱선에 크고 초롱초롱한 쌍꺼풀 있는 눈. 앙증맞은 입술과 보조개. 윤기 돌고 찰랑거리는 머릿결. 보기좋게 부푼 가슴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매끈하게 이어지는 몸매와 굉장히 잘 어우러져있었다. 남자의 이상형 그 자체였다.


"자기야, 많이 기다렸지? 놀러 가자."

청순한 말투와 고운 목소리까지 완전 남자의 취향 그 자체였다. 마검이 진짜 마검이구나 하고 괜히 모욕했던 과거에 미안해졌다.


부끄럼을 타 어쩔 줄 몰라하자 여자가 생긋하게 웃어보이며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아 밖으로 끌었다. 나와서 같이 놀자는 뜻이었다.


그런데 그 때였다.


남자는 문 앞에 결계라도 있는 듯 밖으로 나오지 못 했다. 발이 현관이 붙어서 얼어붙었다. 아무리 칼로 긁어서 떼낸다 한들 한 발짝 나가는 것은 인류가 화성에 진출하는 것보다 더 큰 도전이었다.

말로는 반갑다고 인사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입도 본드로 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입이 살짝 열린 채 경련했다.

머릿속에 무언가 스쳐지나갔다. 무언가 머릿속을 강제로 헤집어놓았다. 싫은 기억이었다.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다리가 풀렸다. 현관에서 그 자리에 쪼그려앉아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 눈에 초점이 사라졌고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숨은 가빠졌고 머릿속은 새하얘졌다.


"이 ㅅ끼는 왜 떠먹여줘도 못 먹냐."

남자의 이해 안 되는 행동에 마검이 답답하고 빡쳐서 여자에게 명령했다.

"야, 너 나중에 와라."

"네."

여자가 떠나자 마검이 문을 초능력으로 닫으려 했다. 그러나 쪼그려 앉아있는 남자가 걸리적거려서 닫지 못했다.

"야, 비켜."

"..."

"비키라니까!"

강제로 남자를 초능력으로 밀쳐내고 문을 닫았다. 철컥 소리와 함께 문이 완전히 닫히자 남자의 거친 숨소리가 점점 편안해졌다. 


"여친 사귀고 싶대서 네 이상형 하나 만들어줬더니 ㅈ랄하고 자빠졌네. 그래서 소원권 날린 소감은 어때?"

남자가 아직도 숨을 고르고 있자 마검이 다시 빡쳐서 소리쳤다.

"아니 너 대체 왜 그러는데?"

남자는 별 말이 없었다. 아직도 눈에 초점이 돌아오지 않았다.

"아, 그거구나? 히키코모리."

마검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말했다. 잘 정돈되지 않은 방. 별로 청소하지도 않은 듯 냄새나는 방. 돌아가는 것은 오직 컴퓨터. 생각해보니 지금 이 나이에 이 시간쯤이면 다들 대학교에서 강의를 듣고 있을 시간이었다.


남자는 별 말 없이 침대로 가 누웠다. 머리를 베개에 박고 한껏 우울해져있었다.

"근데 나랑은 어떻게 그렇게 대화를 잘 한거냐?"

"닥쳐."

"왜 나랑은 그렇게 잘 대화했던 건데?"

"닌 쇠붙이잖아. 쟨 사람이고."

"모르겠다. 난 너같은 병신은 이해 못 하겠다."


그 때 마검에게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다른 주인들에게 하도 시달려서 소원 한 개만 써야한다는 조항까지 만들 정도였기에 이 정도로 한가한 적은 없었다. 그렇기에 이런 생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근데 나 남은 1주일동안 뭐하지?"

1주일동안 이 남자랑 같이 지내야했다. 이런 괴상한 놈이랑 같이 산다니 지옥이 따로 없었다. 그리고 딱히 할 것도 너무 없었다. 그래서 일단 빌붙기로 했다.


"야, 네 이름 뭐냐?"

"김차혁."

"그래서 차혁아, 내가 ㅈ같지만 내가 너를 선택한 이상 너랑 1주일을 같이 지내야하는데 내가 뭐 어떻게 지내야 될 지 논의 좀 해봐라."

"이제 다 필요없어. 네 소원권으로 알아서 해."

"너 소원 이미 빌어서 못 쓰잖아. 여친 만들어달라는 소원."

"아 몰라. 그럼 네가 여친이 되던가."

"아 잠깐, 뭐?"

"잘 생각해보면 아까 걔가 여친 되려다 깨졌으니까 아직 안 이뤄진 거 아니야?"

"그건 그러네. 근데 아무리 그래도 여친은 좀."

"왜, 소원 안 들어줄거야?"

"아, 그게 그러니까 내가 여친 된다해도 1주일 뒤에 어차피 나 떠나는데."

"됐어. 1주일동안 할 거 없대매. 1주일동안 열심히 살아. 어차피 너 소원 들어줘야되잖아."

마검이 어떻게든 피하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에휴, 알겠다. 내가 여자가 되고 만다."


마검이 빙그르르 회전하면서 밝은 빛을 뿜었다. 그리고 마법소녀가 변신하는 장면마냥 무언가 뿅뿅하고 샤라랑하며 변하면서 여자의 형태가 나왔다.

이번에도 외모는 천상미인이었다. 아까 실패한 여친처럼 이 외모도 김차혁의 이상형 그 자체였다. 누가봐도 연령대는 파릇파릇한 20대 한국인 대학생 새내기 정도로 보였고 대학 여신으로 바로 칭송받아도 모자람이 없었다.


마검이 여자로 변해 바닥에 착지했다. 그리고 바로 균형을 잃고 쓰러져 굉음을 냈다.

"아악, 아야야... 아프다는 게 이런 거였냐."

걷는 법을 모르는 마검에겐 아장아장 걷는 것조차 처음하는 일이었다.


마검, 아니, 지금은 여자가 되었으니 마검녀라고 해야될 것 같은 여자는 침대에서 차혁이 우울해져서 무슨 말을 혼자서 중얼거리든 계속 걷기 연습을 하고 있었다. 이리저리 넘어져 소음이 심했고 주변 기물들을 부술 뻔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김차혁이 하도 시끄러워 뭔 짓을 하고 있나 싶어 옆을 보았다. 그러자 차혁의 눈에 들어온 것은 알몸으로 자꾸 넘어지는 미녀였다.

"아 잠깐만 왜 벗고있어!"

차혁이 놀라서 후딱 일어나서 옷장에서 아무 옷이나 꺼내 입혔다.

"빨리 입어!"

"어? 굳이 입어야돼?"

"빨리 좀 입어!"

"소원권 이미 사라졌어."

"아니, 원래 옷을 입어야 된다고! 나체로 그러고 있지 말라고!"

마검녀가 옷을 꾸역꾸역 입었다. 입는다는 것도 처음 하는거라 일일이 다 가르쳐줘야했다.

"따뜻해."

"닥치고 팬티나 입어."


그 후로 일주일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팬티에 바지까지 입히고 나서 마검녀가 뭔가 배가 이상하다고 징징대서 원인을 뜯어 진상규명을 해봤더니 알고보니 배고픈 거였다. 너무 허무해서 차혁이 가만히 있었더니 배고프면 뭐 해야되냐고 징징거리길래 차혁이 컵라면을 하나 끓여줬다. 근데 젓가락질도 못해서 자꾸 초능력으로 먹으려 하다 국물 계속 흘리길래 포크 하나 챙겨줘서 겨우 먹었다. 인간의 몸으로 초능력을 쓰는 것도 익숙하지 않아서 초능력이 잘 안 나간다는 이유였다.


또 아래에서 이상한 게 나온다 하자 알고보니 오줌이었다던가, 똥 싸는 것도 다 하나하나 알려줘야 했고, 정신이 이상하대서 이제 죽는 거냐고 설레발쳐서 봤다니 사실 졸린 거였다. 어디서 자야되냐고 해서 협상 끝에 마검녀를 바닥에 눕히고 나는 침대에거 자는 걸로 했다.


그렇게 6일 동안 우당탕탕 이런저런 사고들이 많이 생겨서 둘이 계속 투닥투닥 싸웠다. 다행히 마검녀가 이 몸으로 마력을 잘 제어하지 못하겠다고 해서 둘이 체력이 비등비등하게 싸웠다는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래도 체력도 마검녀가 살짝 더 우세라 차혁이 조금 밀렸다.



*


"어우 ㅅㅂ, 드디어 오늘이 7일차네."

잠에서 눈을 뜨자마자 마검녀가 말했다.

"오늘 드디어 네가 내 방에서 나가는구나!"

김차혁이 여친을 기다리고 있을 때만큼이나 신나하면서 벌떡 일어났다. 마검녀가 떠난다는 사실만으로도 활력이 만땅으로 충전되었다.

"나도 드디어 이 인간 몸뚱아리에서 해방이구나!"


오늘도 마검녀는 화장실에 갔다가 세수하고 다시 돌아왔다. 그래도 명색이 마검이라 어느새 빨리 적응이 됐는지 이제 평범한 사람과도 다르지 않았다.


"근데 마지막 날인데 궁금한 것 좀 몇 개 물어보자. 너 진짜 나보고 안 꼴려?"

"내가 말했잖아. 넌 쇠붙이라고. 넌 쇠붙이라니까? 애초에 안 돼. 얼굴보고 좀 마음이 드나 싶다가도 쇠붙이 생각나서 안 선다고."

"뭐 마음이라도 좀 안 드냐? 사랑이라도 안 해?"

"내가 너한테 마음이 생기면 난 쇠붙이에 흥분하는 변태다. 근데 넌 왜 날 자꾸 꼬시려 들어?"

"네가 자꾸 그러면 여친이 아니게 되잖아. 네가 싫다고 내가 여친 아니라고 해버리면 가오가 안 살지. 소원 빌었는데 안 들어준 거니까."

이건 또 무슨 논리인가 싶었다.


상관 없고 게임이나 하려고 컴퓨터를 켰다. 부팅이 끝나자 바탕화면이 나왔다. 처음 나온 창은 주식거래창이었다.

"근데 니새끼는 히키코모리만 아니었어도 진짜 잘 살았을텐데, 왜 이러고 사냐?"

마검녀의 눈에 마검녀의 아무런 도움 없이 붉은 색 숫자와 우상향 그래프로 가득 찬 주식 창이 들어왔다. 이번해 수익률이 두자릿수를 넘으려 하고 있었다.

"봐, 주식하는 거 봐봐. 자질이 보이잖아. 내가 널 괜히 선택한 게 아니라니까? 넌 진짜 정치판 들어가잖아? 그럼 딱 신드롬 일으켜서 저 위까지 해먹을 수 있는 타입이야. 뭘 해도 성공해버릴 거라고. 근데 왜 여기서 처박혀서 주식이나 처하고 있냐고."

마검녀가 불평불만 가득하게 말했다. 인간의 몸은 처음이라 표정이 그대로 묻어나왔다.

"아씨 괜히 이 새끼 골랐어. 이렇게 방에만 처박혀있을 줄 내가 어떻게 알겠냐고."


그러더니 마검이 말을 이었다.

"아, 그래. 내가 어떻게든 너새끼를 여기서 빼내본다. 그래서 왜 여기 처박혀있는 거냐?"

김차혁이 침묵했다. 갑자기 표정이 어두워졌다.

"왜 처박혀있냐니까 새꺄?"


"그래, 그래. 내가 알아서 알아본다."

마검녀가 팔을 휘저으며 몸을 풀었다. 이제 이 몸에도 거의 익숙해져서 초능력도 제대로 나오는 참이었다.

마검녀가 컴퓨터 본체에 손을 대고 뭐라뭐라 주문을 외웠다. 파지직하는 전기 돋는 소리와 함께 컴퓨터 본체가 해킹되어 그대로 마검녀에게 정보가 들어왔다.

마검녀가 정보를 얻고 그 안에서 또 정보를 추려냈다. 그러자 마검녀는 남자에게 있었던 일을 알 수 있었다.



컴퓨터 C드라이브에 있던 어떤 폴더에 고소장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같은 폴더에 CCTV 영상과 변호사 전화번호 등 이런저런 파일들이 가득했다.

마검녀는 뭔가 큰 사건이 있었음을 짐작하고 인터넷 기사까지 들어가 관련 정보들을 캐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떤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대도심 오피스텔 화재사건. 지하주차장에 원인불명의 화재가 발생해 경비원이 초기에 진압. 그러나 천장 내부에 남아있던 보이지 않는 불이 사방으로 번졌고, 자동차들이 달궈지며 연쇄폭발. 그리고 불에 잘 타는 건축물 외장재인 드라이비트를 타고 오피스텔이 화염에 휩싸임.

화재의 규모가 크고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불이 옆 건물들까지 번지며 구조가 늦어짐. 사망자 9명. 부상자 150여명. 

김차혁의 부모는 지하주차장 사람들을 대피시키다가 정작 자신의 대피가 늦어져 연기 흡입으로 사망. 지하1층과 1층 사이 비상계단에서 발견. 외동아들이던 김차혁만 살아남음.



대충 이런 사건이었다.

마검녀는 정보를 얻고 잠깐 고민했다. 이런 참혹한 사건이라니 그럴만 하다고 계산으로 공감하려 해봤지만 원래 인간이 아닌지라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감정은 그냥 넘기기로 했다.

"오피스텔 화재... 그것 때문에 이러냐?"

"... 어."

"근데 보통 다른 사람들은 이 정도로 방에 처박혀있진 않은데 니새낀 왜 이 모양이냐?"

"됐어."

김차혁이 우울해지는 게 느껴졌다. 마검녀가 일단 알아내야겠다며 김차혁의 머리에 손을 댔다. 김차혁이 뿌리쳤으나 다시 억지로 손을 갖다대었다.

마검녀가 그의 기억을 읽었다. 그러고나니 의문이 풀렸다. 인간이 아닌 쇠붙이 출신인 마검녀 입장에선 뭔 병신인가 싶은 고통이었다.

"븅신."

"아 왜."

"닌 왜 네가 엄마아빠를 죽였다고 생각하냐?"

"뭐?"

김차혁이 정곡을 찔린 느낌을 받았다.

"네가 죽이긴 왜 죽여ㅋㅋㅋ"

철저히 제3자의 쇠붙이의 눈으로 본 차혁의 사고회로는 그저 비웃음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야 거기서 내가..."

"두고 먼저 나갔다고?"

"어? 어떻게 알았어?"

"난 전지전능하다니까? 기억 읽었지."

"아 그럼 아까 머리에 손 올린 게?"

"응 그거임."

김차혁이 놀라며 자기 머리에 손을 올렸다.


"근데 내가 기억 읽었는데 너 뭔 ㅂㅅ같은 걸로 처박혀있더라?ㅋㅋ. 니네 부모님은 그냥 사람 살리려다 죽은 거고 너랑은 상관 없어."

"아니 그..."

"네가 먼저 나간 것도 니 부모님이 보낸 거고. 보니까 있는 기억도 네 맘대로 바꿔서 해석해버리더만."

"그게 그..."

"지는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뭐 그딴 고민을 다 쳐하고 있냐?"


그때 차혁의 눈에서 눈물이 터졌다. 눈시울이 붉어져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차혁이 옷소매로 눈을 닦았다.

"아니 왜 울어 미친ㄴ아."

차혁이 그저 우는 소리를 내며 울었다. 마검녀가 이건 또 뭐하는 븅신인가 싶어 차혁의 머리에 다시 손을 댔다.

내가 부모를 죽였다. 나는 죄인이다.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 이런 자신이 만든 벽이 깨지자 자신을 사방으로 가두던 무형의 벽에 갇혀 있었다. 그런데 그 벽이 쇠붙이의 작은 말에 무너지면서 지금까지 쌓여있던 응어리와 감정이 한순간에 쏟아져나온 것이었다.

여친을 만들어달라는 소원도 그랬다. 외롭다.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다. 이런 내적인 갈증이 여친 생기게 해달라는 표현으로 뒤틀려 형상화된 것이었다. 물론 이것도 자신조차 몰랐던 진실과 많이 어긋나있었다.

"으헝헝..."

"그만 울어 새꺄."

차혁은 한동안 그렇게 울었다. 그렇게 몇분이 지났을까, 차혁이 겨우 진정했다. 옷소매는 이미 흥건해서 얼굴을 닦으면 오히려 물이 묻어나왔다.


"있잖아 마검아. 여친 만들어달라는 소원 실현됐어?"

"엄밀하게 말하면 아직이긴 하지. 네가 연심을 안 품는데 실현되겠냐 새꺄?"

"그럼 소원 바꾸자. 부모님 만나게 해줘."

마검녀가 순간 당황했다.

"아, 안 돼. 그분들 지금 천계에 가있을텐데..."

"왜? 전지전능하대매?"

"내가 천계에 접근하면 천계가 내가 여깄다는 걸 알아낼 거란 말이야. 천계는 아직 내가 지상에 있다는 걸 모른다고."

"전지전능하다매. 제발 "

"응 ㅈ까."

차혁이 불평조로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낯빛이 어두웠다.


마검녀가 그걸 보고 그래도 마지막 가는 길인데 소원 하나 정도는 제대로 들어줘야겠다는 생각에 갈등했다. 그리고 번뜩 하나의 아이디어가 떠올라 실행이 옮겼다.

컴퓨터 본체로 가서 정보를 빼냈다. 그리고 차혁의 핸드폰도 손에 쥐어 파지직하는 소리와 함께 핸드폰도 해킹해서 정보를 빼냈다.

문자 내역. 통화 녹음. 사진에 동영상. 그리고 기타등등 모든 것.

이 모든 것을 조합하여 두 개의 형상을 만들어내었다.


"야, 아까 그 소원 제대로 안 이뤄졌으니까 이번만 특별히 내가 소원 바꿔준다 새꺄."

"뭐라고?"

마검녀가 뭐라뭐라 주문을 외우자 홀로그램 형식으로 두 사람의 형체가 떴다. 두 사람은 여기가 어디지 하고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차혁이 그걸 보고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제는 느낄 수 없는 아늑하고 그리운 기분. 그 기분에 아까 그쳐서 다시는 나지 않을 것 같았던 눈물이 다시 터졌다.

"엄마, 아빠!"

차혁이 부모님의 품에 안겼다. 품에 안겨 눈물을 삼키며 말했다.

"보고싶었어.... 혼자 가서 미안해..."

"괜찮아. 이제 다 괜찮아. 네 탓하지마."

"엄마, 아빠..."

한동안 꼭 껴안고 참았던 말들을 모두 꺼냈다. 미안하다, 보고싶었다, 그리웠다, 어디갔다 이제 오냐... 한마디 할 때마다 깊은 감정을 참아야 했다.


그런데 그러고 몇 초도 지나지 않아 부모의 형상이 점점 지직거리면서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아, 안 돼. 겨우 만났는데!"

차혁이 절망하면서 마검녀를 바라보았다. 마검녀는 그저 무미건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야, 드디어 시간 끝이네. 이제 1분 남았어."

"아니, 잠깐만!"

마검녀가 서서히 인간의 모습을 잃고 다시 검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벌써부터 칼날의 색채가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이 ㅈ같은 인간 육체에서 해방이다!"

"아, 안 돼. 가지마!"

"아, 맞다. 내가 저번에 만들어준 네 여친 있잖아. 걔 육체는 일단 놔두긴 할 거야. 예전에 누가 지어달래서 지어준 동사무소가 7일 지났는데 아직도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어디가!"

"대신에 걔 너한테 좋아하는 마음이나 이런 건 다 지울 거야. 근데 네 이상형이 베이스라 네 취향에 맞게 변하거든?"

"벌써... 안 돼..."

"근데 네 이상형 그새 변했더라? 보기좋게. ㅋㅋ"

마검녀가 시선을 깔고 차혁을 보며 비웃었다. 차혁은 그 뜻을 생각할 시간도 없이 갑작스럽게 이별해야 한다는 것에 크게 절규하고 있었다.

"이렇게 벌써..."

"그럼 10초 남았다. 10, 9, 8..."

"자, 잠깐만!"

차혁이 급하게 카메라를 켜서 동영상으로 바꾸고 재회의 현장을 남기려 했다. 그리고 다시 부모님의 품을 와락 껴안았다. 다행이었다. 아직 따뜻했다.

"차혁아, 잘 살아야해."

"부모님도ㅇ..."

차혁의 팔이 허공을 가로지르며 그대로 차혁이 균형을 잃고 고꾸라졌다. 


차혁이 바로 뒤를 돌아다봤다. 정돈되지 않은 방. 켜진 채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컴퓨터. 모든 것이 마검이 오기 전의 풍경과 다름없었다.

부모님의 따뜻한 감각이 아직 살아있었지만 이제 만날 수 없다는 생각에 부모님이 있던 자리에 허우적거리며 가능성 없는 희망을 만지려 했다. 그러나 만져지는 것은 역시 허사였다.


차혁이 다시 쪼그려 울었다. 이제 울어도 뭐라 해줄 쇠붙이도 사람도 없었다. 검이 있던 자리도 이젠 그저 무언가 비어있다는 공허함만이 추가되었을 뿐이다.

없는 힘을 다 짜내어 핸드폰으로 손을 가져다댔다. 이미 촬영시간이 두자릿수를 넘어가고 있었다. 여기서 버튼 하나 잘못 누르면 더 불행해진다는 생각에 신중하게 버튼을 눌렀다. 다행히 제대로 버튼을 눌렀다며 띠롱거리는 효과음이 났다.


차혁이 다리를 뻗고 침대에 기대 허공을 바라보았다.

이제 뭐하면 좋지. 이제 뭐하고 살까.

그 강렬한 7일의 시간은 그를 가장 안쪽에서부터 바꿔놓았다. 이제 마음에 무거운 것도 꼬인 것도 다 떠나가고 없었다.



그때 문을 쾅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차혁이 택배인가 하고 기운없이 문을 열었다.

눈앞이 보이는 것은 비에 흠뻑 젖어 꾀죄죄한 여자였다. 청초했던 원피스는 흙탕물로 엉망이었고 종잇장처럼 구겨졌으며, 입가에는 먹다 남은 듯 잔디가 묻어있었다.

"재워줘 새꺄."

청순한 얼굴에 그렇지 못한 싸가지 없는 행동거지. 성격은 아니지만 얼굴은 예전에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한동안 멍하니 서있었다. 지금까지 마검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줄만 알았다. 그런데 그 흔적이 집 앞에 서있었다.

"뭘 멍하니 서있어? 나 만들었면 책임을 져야지."

여자가 차혁의 팔을 당겨 밖으로 끌어냈다.

"아, 뭐하는 거야?"

"너도 당해봐야지. 날 어떻게 그렇게 내다버릴 수가 있어."

여자의 입가에 장난기가 서렸다. 차혁이 현관문을 놓쳐 문이 잠겨버렸다.

"근데 너 이상형 바뀌었다매."

"뭐?"

"마검한테 다 전해들었어. 쇠붙이에 흥분하는 변태라매?"

잠깐 머뭇했다. 부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래, 나 쇠붙이에 흥분하는 변태다."

"그럼 나 좀 들여보내주라."

"그래야지. 환영이다."


차혁이 안으로 들여보내려 했으나 철문이 언제 닫혔는 지 모르게 굳게 닫혀있었다.

여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뭔가 뿌듯해보이는 미소였다.

"너 밖으로 나와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