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레이/마검) 14화


여태까지 나는 내가 들어줄 수 없는 소원의 범주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추상적인 무언가를 바라는 주인은 여태까지 없었으니까.


하루하루 물욕에. 혹은 다른 욕구에 찌들어 살아가는 이들에게 향했으니까.


그래서 좋았다. 명확하게 무언가를 바라는 사람은 이루어주기도 쉬우니까.


전능(全能)의 편린을 엿보는 나로써, 이뤄주지 못할 일은 없을 줄 알았다.


그래, 나도 그럴 줄 알았다.


* * *


나는 무인(武人)이다.


강호무림 수많은 무인들 중. 최고를 칭하는 검제(劍帝)가 바로 나다.


그리고, 내 앞에는 급작스럽게 하늘에서 떨어진 검이 있었다.


"...이게 무엇인고?"

아무도 대답해줄 수 없단걸 알면서도. 내가 읊조렸다.


수없이 많은 검들을 보아왔지만.

이만큼 이해하기 힘든 검은 드물었다. 수없는 사람을 죽인듯 혈향이 진동하는거 같았지만. 겉모습은 정말 깨끗했다. 방금 막 나온 검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 거, 안녕하쇼? ]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음인가?


[ 에헤이, 어디봐 어디. 앞에 봐. 앞에. ]

내가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허나 주변엔 아무 존재도 느껴지지 않았다.


[ 아니, 얘는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안들려? 안들려요? 선생님? ]

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검을 쳐다보자. 이제야 목소리가 만족한듯 말을 이었다.


[ 그래. 이제야 봤네. 그럼 자기소개부터 하지. 난 마검이야. ]

마검? 내가 아는 마검이라면. 의지를 갖고, 주인을 파멸시키는 그러한 검들을 말했다.

관련되면 분명히 불행해지는 그런 검.


[ 내 능력은 소원을 한 개 들어주는거야. 단 7일뿐이지만! ]

검이 낄낄거리며 말했다.


관련되고 싶지 않았다.

분명 이루어준다고 말만 하는. 그러한 것들이었을테니까.


또한, 바라는 것 따위 이미 없다.


[ 글쎄, 진짜 없을까? ]

검을 버리고 뒤돌아서려는 와중. 검이 내게 말했다.


[ 미련 없는 사람은 없어. 그러한 존재가 바로 신(神)이지. 스스로에 대한 확증으로 가득찬. 질리는 놈들. ]

염증으로 가득한, 이미 지친듯한 목소리가 내게 들려왔다.


사실. 당연한 말이다.

그 누가 단 한번도 후회하지 않고 살아가겠는가.


후회를 고칠 수 있는 기회를 바랄수도. 혹은 미래를 더욱 나은 방향으로 바꿀 무언가를 바랄 수도 있으니까.


"...사람은 후회하기에 발전하는 법이다."

내가 부정하듯 말했다.


검은 이미 알고있다는 듯, 내게 달콤한 말들을 쏟아낸다.


[ 당연한 말이지, 그럼에도... 발전한 상태에서 그 후회를 돌릴 수 있다면? ]

...좋은 일이다. 당연하다. 하고 싶지 않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하겠다고 대답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바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 최고의 후회는. 그들이 원하는 걸 들어준 것이니까."


* * *


이렇게 완고한 주인은 처음이다. 이런 유형은 절대 나를 잡지 않는다.

나를 계속해서 보면서도. 계속해서 부정할 수 있는 그런 유형이다.


그럼에도 어째서일까, 저 주인의 내면에는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해 강렬한 소망이 있다는 것을.

그걸 말해주게 된다면... 나에게 매달릴지도 모른다.


* * *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그 다음날이 되었다.


[ 그래서. 이번엔 왜 나오셨지? ]

검이 이죽거렸다. 


"너를 누군가가 잡아가면 분명 혈겁이 벌어질 것이다. 난 무림에 해를 끼치는 일을 알면서도 방관할 순 없다."

이 주변에 아무도 오지 않은지 2년이 족히 흘렀다.


그럼에도. 핑계를 대면서까지 저 검을 보고 싶은 이유는 어째서일까.

분명 바라는게 없을텐데도. 저 검을 지켜보며 생각을 이어간다.


[ 소망이란것도, 어떻게 보면 욕망이지. 후회하는 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축복이기도 하다. ]

검이 조용히 중얼거렸으나. 그때서야 난 스스로 무엇을 바라는지 알아챘다.


난, 벽에 닿아있다.

분명 이 너머는 새로운 진경(眞境)일 것이다. 그럼에도.

'넘어설 수 없다.'는 듯, 벽에 닿아서 그 너머를 볼 수가 없다.


과연. 무(武)에는 끝이 있는가?


* * *


'무(武)에 끝이 있느냐고?'


난 스스로에게 물었다. 과연 저런 추상적인 것에는 끝이라는 게 있을까?

끝(極)이라는게 존재한다면. 그것은 무패(無敗)하는 것인가. 무전(無戰)하는 것인가. 혹은 그 너머 무언가인가?


저런 질문에 대한 정답은 쉽지 않았다.

계속해서 전능의 일부분을 엿보았으나. 여전히 정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서로 아무말도 하지 않은 채로, 또 하루가 지나갔다.


* * *


[ 꾸준하시군. ]

나오자마자 검이 또 한번 이죽거렸다.

그러나, 어제와는 달리 그리 도발하려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난, 오늘도 검이 보이는 위치에 앉아 생각을 이어나갔다.


'무극(武極)이란 건 실존하는가? 실존한다면. 어떠한 것인가?'


저 검에게 바란다면. 질문에 대한 정답을 알려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은 나 스스로 찾는 것이니까.


[ 그런 추상적인 것에 대한 정답을 찾는건 미련한 짓이라 생각하지 않나? ]


그런 것에 정답을 찾는 게 무인이니까.

무(武)에 대한 탐구자들이. 바로 우리니까.


* * *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아무리 찾아봐도 나오지 않는 거라고?


중간의 경지. 우주(宇宙)에 대해 이해시키는 경지까지는 찾을 수 있었다.

분명 이것이 무극(武極)이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맨 마지막을 장식하는 한마디는 나를 절망시키기엔 충분했다.


'이 다음 경지의 편린이 계속해서 보이나. 나는 그 경지에 닿을 수 없었다.'


과연, 그 다음 경지는 무엇인가?

그 글에 적힌 경지에 닿을 수 있었으나. 나 역시도 그 너머에 닿을 순 없었다.

그 편린또한. 느낄 수 없었다.


* * *


검의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느 순간 갑자기 벌어진 일이었다.


늦은 밤이었지만. 난 급작스럽게 검이 있던 위치로 돌아왔다.


검은 여전히 꽂혀있었다.


[ 무슨 일이라도? ]

검이 능글맞게 웃으며 물었다.


[ 혹시, 나한테 뭐라도 바라러 온거야? 그렇게 급하게 안 와도 되는데? ]

검은 내 눈앞에 있었다, 허나 눈 앞에 있는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존재감은 희미했고. 누가 본다면 마검이 아니라 그냥 검이 꽂혀있는 줄 알 수준으로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달빛에 비친 검은 무척이나 요사스러웠다. 허나. 그 검 자체가 뿜어내는 무언가는 굉장히 숭고했다.

마치, 어릴 때 보았던 스승님과 같이 아득한 경지를 뛰어넘어 느껴지는 무언가였다.


그때. 그 검에 검자루에 꽂혀있는 보석에 눈이 갔다.

그 보석 너머에 비치는 하늘은 분명 달이 떠있어야 하는 밤하늘이었으나.


그 안에 비치는 하늘은 마치 그 너머를 그린것과 같았다.


달도 없고. 그 무엇도 없는 검은 세상에. 뿌려진 숭고한 빛만이 느껴지는 작은 세계가.


[ 아쉽지만. 끝은 아니야. ]

검이 내 마음을 읽은듯 말했다.


저것조차 무극이 아니면. 도대체 어디가 끝이란 말인가.

저 너머를 보아야 하는 것이라면. 도대체 어디로 눈을 향하란 말인가.


[ 아마, 세계(世界). 혹은 그 너머... 차원(次元)이겠지. ]

검이 천천히 중얼거렸다.


처음 보았을때의 그 도발적이고. 능글맞았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혹은 공간(空間)... 시간(時間)... 그 모든걸 뛰어넘은 무언가던지. ]

어째서인지. 검이 내면에서 하는 말이 내게도 전해져왔다.


너무 많은 걸 아는 사람은 닿을 수 없다고.

네가 아는 모든 끝을 초월해야 닿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는데.


나와 같이 너무 많이 알면. 그 끝을 뛰어넘을 수 있는 용기가 생기지 않는다고.


그렇게. 하루가. 또 하루가 지나갔다.


* * *

벌써 1주일이 넘었다.

그럼에도 난 떠나지 못했다. 아니, 떠나가지 않았다.


규칙을 어기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너무 많이 규칙에 반하지 않도록. 소원을 들을 때까진 떠나가지 않는다는 억지를 피웠다.

원한다면 떠나갈 수 있겠지. 그럼 저 남자도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살아가겠지.


규칙은. 그냥 넘어가 주었다. 이유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다.

이유는 그냥 궁금해서였다. 저 인간이 과연 스스로 바라는 것에 닿을 수 있을지 없을지.


나를 잡지 않고도. 스스로 바라는 무언가를 이룰 수 있을지.


* * *


꽤나 긴 세월이 지나갔다.


그때 보여주었던 그 아득한 광경의 이름이 우주(宇宙)라는걸 알게 되었다.


검은 여전히 떠나가지 않았다.

소원을 말하고서 1주일이겠지.


여전히 나는 검에게 바라지 않고 있었다.


스스로 탐구하고 싶었다.


* * *


모든 걸 막아내는게 무극인가?

모든 걸 다가오지 못하게 하는게 무극인가?

모든 걸 파괴하는게 무극인가?

원하는 모든 걸 이루는게 무극인가?


그 어느것이 무극인지조차 알지 못하고.


나는 오늘도 그 남자를 관찰하고 있었다.


남자의 눈은 하루가 가면 갈수록 심연에 가까워져가고 있었다.

나락으로 향하는 자의 눈빛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욱 어두워지고. 진중해져가며. 그 너머를 들여다보기 위해 스스로를 그 주변으로 향하는것에 가까웠다.


단언하자면. 스스로를 초월(超越)로 이끄는, 구도자의 눈빛이었다.


* * *


몇년이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순간, 환골탈태를 하다 못해. 20대 초반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몇백, 몇천. 몇만번이고. 막힐때마다 검을 휘둘렀다.


내가 생각하는 그 어느것도 무극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것을 알 수 있게 된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는 끝은.


신(神)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세계(世界)로부터 태어난 피조물이. 세계를 뛰어넘어 오롯이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 너머를 위해.


난, 오늘도 수행을 거듭한다.


검을 그었다.

생각했다.


검을 다시 한번 그었다.


다시 생각했다.


세계를 뛰어넘으려면. 무엇을 해야하는가?


그 너머에 존재하는 것. 


그 너머에 어떻게 가는가?


세계를 베어가른다. 그 너머의 광경을 보기 위해서.


벽을. 세계를. 그 너머를 응시한다.


마검을 잡는다.


한가지 소원을 빈다.


"세계. 그 너머를 인식하게 해다오."


[ 소원은 받아들여졌다. ]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공간.

그 너머가 느껴진다.

수없이 많은 구슬들이 모여있는 듯한 이 감각에 몸서리친다.


떨리는 손을 억지로 멈추고는. 전력을 끌어모은다.


마음을 하나로 이어서.

세계를 느껴서.


그는, 그 순간부로 진정한 검(劍)이 되었다.


그를 창조한 세계를 찌를. 한자루 검이.

스르륵. 뻗는 손길 하나하나에 전심이 느껴진다.


완벽하게 그가 검을 그어냈을 때.


세계가ㅡ

"열렸...다..."


홀린듯. 그 사이로 걸어들어간다.

그는. 사이로 향하는 그 짧은 순간동안 수없이 많은 길을 보았다.


그럼에도. 가시와 함정으로 가득한. 그 누구도 개척하지 않은 길을 향했다.

그 누구도 쳐다보지 않은 길이었다.

너무나도 힘든 길이었다.


그러나. 내 뒤에 따라올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나는 그 길을 걸었다.


그때, 내 정신을 차리게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빨리 들어가라. 억지로 버티는것도 한계다. 사라지기 직전이란 말이다. ]

검이 힘겨운듯 말했다.


"고맙다..."

그러고는. 그의 몸이 완전히 그 너머로 사라졌다.


그 이전의 세계에서는 그 어느것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작은 초막과. 무언가가 꽂혀있던 작은 공간만이 보였을 뿐이었다.


* * *

나는 결국 무극이 무엇인지 몰랐다.


소원을 들어주었고. 다른 세계로 향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ㅡ기분이 좋았다.


* * *

그날은 신화 그 자체였다.


한낱 인간이.

피조물로써 창조된 한낱 인간이.


스스로의 창조주를 떠나. 초월의 별이 된 날이.


그날부로. 인간에게도 초월의 길이 열렸다.

한 남자로부터.


저자 미상의 한 서책 중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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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이 병맛이기도 하고, 이번 편은 진지하게 끌고 나가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적어야지? 라고 생각한 부분하고는 꽤 많이 달라진 거 같지만. 그래도 어떻게 잘 끝마친거 같아서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이렇게 적어야 소설사이트 기준 한 편이네요. 소설작가님들 존경합니다 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