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족해.'

 천상에 끌려갔을 때 벌어졌던 일은 아직도 충격적이었지만, 그 천상이란 곳은 아무래도 마검을 그리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기야, 핵무기 같은 것도 널려있는 세상에 마검 같은 게 뭐가 그리도 위협적이었을까.


 사실상 마검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 상태였다.

 마치 사람 한 명 분량의 양기만 흡수하면 사람이 될 수 있는 구미호가 임자를 제대로 만나서 여태껏 모아둔 양기를 쪽쪽 빨린 건 물론이고 퇴치까지 당한단 얘기의 주인공 같았지만, 그나마 마검은 퇴치까진 당하지 않았다. 그저 마검이 차마 상대 못할 존재를 앞에 두고서 공포와 마주하고서, 간신히 살아남았을 뿐이지.


 '그 때가 좋았지.'

 그나마 처음엔. 처음엔 그래도 마검을 마검답게 휘둘러준 덕택에 억에 가까운 영혼을 잔뜩 취했다지만, 그런 이후에도 마검은 고전을 면치 못 하더니, 여태까지 쌓았던 힘을 몽땅 토해내야 됐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건 억수로 운이 좋았던 경우였다.


 비교적 최근에 마검이 피를 잔뜩 머금은 일이 있었다지만, 그 때처럼 철없는 소년의 손에 쥐어져 억이 넘어가는 이들의 피를 머금은 것이며 순진한 이의 소망으로 그걸 펌핑할 수 있었던 그 스타팅에 비하면 지금은 저 밑바닥에 처박힌 느낌이었다.


 "어머."

 그래서일까? 지금도 마검은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게 분명해보이는 이 앞에서 엑스칼리버마냥 땅바닥에 꽂혀 있었다.

 주위 풍경은 아주 화사하고 따스한 것이며, 저 여자는 또 세상사 근심 하나 없어 보이는 얼굴이며 복장도 실용성이라곤 전혀 없어보이는 치렁치렁한 복장이 아주 눈에 띄었다.


 마검은 깊게 절망하려다 한줄기 희망을 갖고서 음성을 전했다.


 "네 소원이 무엇이지?"

 그나마 최근에 힘을 회복했기에 음성을 전한 것인데, 그러면서도 그는 자기가 전하는 바가 무시당하는 게 아닌가 두려웠다. 그도 그럴 게 지금 이 건너편에 있는 놈이 대체로 마검의 신세를 망가뜨리는 걸 즐기는 아주 못된 놈인 까닭이었다. 아, 이런 것까지 발언하면 안 되는 건가.


 "뭔가 이질적이더라니, 손님이군요?"

 아니나 다를까 소원이 뭐냐고 물으니 손님이 왔다고 하는 광경에 마검은 뭐라 말을 찾다가 포기하고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리고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마검을 땅바닥에서 뽑은 다음에 그 복장에도 불구하고 제법 성큼성큼 움직이면서 그 화사한 공간에서도 따로 근사하게 차려놓은 정원으로 향했다.


 그 정원의 중간에 놓인 간이 건물의 테이블에 여신은 앉았다. 그리고 마검을 가볍게, 그러면서도 제법 멀찍이 던지는데 그러다 마검이 허공에 멈춰서더니 그대로 그 형체가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추락하기 시작한다.


 '휘잉!'

 '꽈당!'


 추락은 한순간이었지만, 그렇게 아프단 느낌은 없었다. 애초에 쇳덩이에게 고통이란 게 있을 리 없었지만, 그래도 꼴 사나운 모습을 보인 까닭에 마검은 기분이 좋지 않은 표정을 대놓고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가 말했다.


 "안녕? 여기 의자 있어. 앉아."

 "됐고, 당신은 누구지? 그리고 여긴 또 어디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마검은 그녀가 안내한 자리에 앉았다. 이내 허공에 찻잔과 찻주전자가 움직이더니, 그의 앞에 차를 따라놓았다.


 "내가 누구냐고? 그건 좀 곤란하네. 내가 적어도 두 사람으로 이뤄져서 말이야. 그리고 여긴 내가 만든 공간이야. 천국 비슷하게 꾸며보려고 했는데, 어때?"

 "천국? 음, 그 구름으로 떡칠해놓는 곳에 비하면 꽃밭이긴 하네."

 "응, 천국은 사람 한 명마다 하나씩 있는 거니까. 구름으로 뒤덮인 곳도 천국일 거야."


 "당신 눈엔 내가 사람으로 보여?"

 마검의 퉁명스런, 그럼에도 어느 정돈 진심을 담아 질문한 것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려다 말고 그를 노려봤다. 그런 다음에 이렇게 입을 연다.

 "그거 참 고민되는 질문이네. 다만 사람들 가운데에서 너와 같은 부류들이 많은 건 아주 잘 알아. 한때 나도 그거 비슷했거든."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가 뭔가를 펼쳐서 그대로 마검에게 씌우는데, 그에 마검의 눈에 보인 풍경은 뭐라고 할까.



 '여성'이라고 하는 것만큼 논란이 분분한 것도 그리 많진 않을 터였다. 최근엔 '남성'조차도 전쟁터에 끌려가 죽어나가는 것이며 위험한 데 끌려가서 죽는 것이 과연 타당하냔 질문이 이어지고 있다지만, 여성에 대한 말은 그보다도 역사가 오래 된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마검에게 특히 잘 보이는 건 '경국지색'과 관련된 얘기였다. 예쁜 여자가 나라를 망친다는 얘기들이 마검에게 집중적으로 투사됐다. 그리고 마검은 그 이야기들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마검의 행적과 경국지색의 사이에 대체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헉, 헉..."

 "좀 지쳤나보네? 차라도 좀 들고 그러지."

 그러면서 차를 홀짝이는 여자를 마검은 노려봤다.


 "소원이 없으면 날 그냥 보내주지 않겠어?"

 마검의 말에 그녀가 눈을 홉뜨더니, 마검을 노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내 소원은 나와 같은, 그리고 지금 너와 같은 경우가 없는 세상이야. 하지만 세상이라고 하는 건 얄궂게도 그렇지가 않지. 그렇다면야 적어도 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걸 할 생각이야. 넌 과연 네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있는 것일까? 아냐, 남들이 원하는 대로 휘둘리는 걸 애써 네가 한 짓이라며 달래고 있을 뿐이지. 난, 네가 네 스스로 서기를 바라는 거야."


 "이런 거, 필요 없어. 애초에 누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거야? 그 쪽 같이 머리에 꽃밭으로 가득 찬 경우들이나 그러겠지!"

 마검은 그렇게 외친 다음에, 자기 앞에 놓인 차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에 여신은 이렇게 답했고.


 "차 마시는 모습, 시원시원하네."

 "무슨 말이지?"

 "아까 말했지? 네가 사람처럼 보이냐고 말이야. 그래, 지금 네가 하는 걸 보니까 조금은 사람 같아 보여. 마검이잖아? 마검이 차는 왜 마신담? 근데 난 차를 홀짝이고 있으니, 아무래도 넌 마검이라기보단 사람이겠지."


 그러면서 차를 홀짝이는데, 그에 마검이 뭐라 말하려는 무렵에 다시 마검을 의식이 여자가 쏘아보낸 뭔가에 뒤덮여 잠식당했다.



 "여신이시여, 괜찮으십니까?"

 마검이 의자 등받이에 기대져 침을 질질 흘리며 자신의 의식에 침식될 무렵, 여신의 앞에 여신의 첫 번째 대천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걱정마세요, 코리오. 이 아이는 그저 태어난 것조차도 남에게 이끌려 태어난 존재니까- 마치 제 옛날 모습을 보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 정도론 걱정할 필요 없어요."

 그녀는 다시 차를 홀짝였다. 찻잔이 비자, 찻주전자가 다시 차를 한 잔 따랐다. 이번엔 간식도 생겼는데, 스콘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말을 이었다.


 "코리오, 이렇게 오신 김에 차라도 같이 들죠?"

 "실례가 안 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습니다."

 코리오의 자리도 하나 생겼고, 그의 앞에 찻잔이 놓여졌다.



 "이런 것, 집어 치워."

 마검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여자의 앞엔 대놓고 천사처럼 행세를 하고 있는 놈이 나타나서 다과회에 어울리고 있었다. 그에 마검은 지금 이 상황을 조금은 납득하고 말았다. 마검이 계속 말을 이었다.

 "지금 넌, 나를 이용하려는 거야. 안 그래?"

 마검의 말에 그녀는 조금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네가 내가 보여준 걸 본 것만큼이나, 나도 네가 거쳤던 것들을 봤단다. 실로 안타까워. 자신이 원해서 파멸한 걸 그 사람 탓을 하지 않고, 네 탓을 하고 있잖아?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일단은 마검이 공감할 만한 것부터 언급하는데, 마검은 그 말에 누그러지고 말았다.

 "그야 그건. 그렇지만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난 마검이니까."

 "미움받는 데 익숙해져버렸구나."


 사슴 하나가 사냥꾼으로부터 도망치다가 나무꾼의 도움을 받아서 겨우 살아난 이야기가 있다. 사슴은 나무꾼에게 보답하기 위하여 자기 뿔을 잘라주는 대신에 선녀가 목욕하는 곳을 가르쳐주고, 선녀를 데리고 살기 위해 그 날개옷을 빼았는 법에 대해서 얘기했다.

 그런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야기에서 사슴을 욕하는 이들은 아무래도 없으니, 이게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눈 앞에 있는 존재가 더 사람처럼 보였다.


 얼마나 더 지났을까.


 "난 여길 벗어나겠어. 이 따위 일들은 집어치워!"

 마검은, 여신이 제안한 바를 부정했다. 이조차도 사람 같았다. 사람들이 늘 올바른 말만 따르고 살진 않지 않은가.

 아마 저에겐 저가 살던 방식이야말로 옳았던 걸 테지.


 "도망쳤군요."

 코리오의 말에 여신은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

 "아무래도 저 마검은 제 소원은 못 들어준 것 같군요."

 "……."

 코리오는 뭔가 말하려다 말았다. 자신의 삶에서도 결국 남에게 자신을 강요할 순 없단 것만 주구장창 알았기에, 여신이 하려던 일이 이런 결말에 치달을 것이란 것도 알았지만 그럼에도 일단은 지켜보기로 했었다. 근데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코리오, 조금은 변덕스럽지만 요것만 드시고 가주실 수 있을까요? 갑자기 술이 땡기네요."

 "네, 얼마든지."


 누군가와 함께 하는 시간이 혼자만의 시간으로-

 찻잔이 술잔으로 변하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