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 됐다. 대충 이런 느낌이란거지?"


옆에 있던 사람에게, 아니 검에게 물었다. 요 며칠전 갑자기 나타나서는 나의 문단생활을 도와주고 있는 친구다. 처음에야 놀랐지만, 이 친구는 내게 많은 소재거리를 주었기에, 나름대로 고마워하고 있다. 안 팔리는 작가에게 하늘에서 뚝 떨어진 소재거리만큼 신나는 건 달리 없거든.


잠시동안 내 원고를 넘겨보던 검이 말했다.


"음... 그렇지. 근데 분량 좀 많은 거 아니야?"

"그런가? 그럼 이부분을 좀 줄일까?"

"이 부분도 지우는 게 낫겠는데? 좀 뜬끔없는 거 같아."

"그럼 이상한 부분 몇개 체크 좀 해줘."


검이 원고를 보며 검토하는 동안, 나 또한 재검토를 시작했다.


"보자...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너무 중2병 스럽나?"

"뭐 어떡해, 걔 성격이 원래 그랬는데."

"그 정도로 중2였다고?"

"그러니까 걔네 후손이 [어둠의 다크]색으로 입고 다니지."

"그런 비하인드가 있었구나.."


... ...

... ...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즉음이란 무엇일까.

...라고 떠드는 애들이 가끔 있었다. 그런 애들의 대부분은 한쪽 팔에 붕대를 감거나 눈에 안대를 차거나 하던데, 난 그런 아이들을 보면 항상 폭력본능이 일어나곤 했다. 너희들이 생사에 관해 뭘 안다고. 뭘 안다고 잘난척이냔 말이다. 나는 상시 죽음의 문턱을 엿본단 말이다. 너희처럼 안전지대에서 손가락이나 빠는 것들이 폼 잡으면서 얘기할 정도로 목숨의 무게는 가볍지 않단 말이다!


흉기에 의해 곤죽이 되서 죽고, 엄청난 무게로 짓눌려가면서 온몸에 가해지는 고통을 곱씹으며 죽고, 약물에 의해 피가 들끓으며 죽고, 강산에 의해 살이 녹아내리면서 그 녹는 팔다리로 어떻게든 탈출을 하려다가 죽고, 불에 타들어가면서 자신의 살이 익는 냄새를 맡으며 죽고. 나는 그런 각양각색의 죽음의 형태를 봐왔다. 지금도 보고 있고, 아마 앞으로도 볼 것이다. 죽어가는 그 순간에 구원을 바라며 나를 보는 동족들의 눈은 잊을래야 잊혀질 수 없는 트라우마이다. 그래서 나는, 죽음이란 것이, 진절머리나게도 싫다.


'쿵 쿵 쿵'


땅이 울렸다. 이 소름끼치는 진동은 그들의 출현을 의미하였다. 또 그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오늘도 분명히 누군가 죽어나갈 것이었다. 하지만 그게 나여서는 안된다. 난 살고 싶었다. 빨리 숨어야 했다. 그들의 눈이 닿지 않는 곳으로 숨어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우리 종족은 태생적으로 생존에 불리한 종족이다. 숨는다고 쉽게 숨을 수가 없다.


'사라락'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나의 동족이 살기 위해 구석진 곳으로 이동하려 했다. 여기서 우리 종족의 단점이 하나 나온다. 소리. 우리 종족은 어떻게 해도 움직일 때마다 이 '사라락'하는, 오래된 책을 넘기는 듯한 소리가 나버린다. 당연히 발각이 안될 리가 없었다.


"?%)@*$!"


알지도 못할 괴성을 내지르며, 거구의 괴생명체가 나의 종족을 또 하나 짓눌렸다. 물론 그또한, 자신이 죽기 직전, 그 괴물에게 자신이 노려졌다는 것을 눈치챘다. 우리 종족은 눈치만은 빠르니까.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였다. 눈치가 백날 빨라도 몸이 안 따라줘서야 의미가 없는 것이다. 우리 종족의 약점 두 번째는 속도이다. 달팽이보다도 이동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우리는 그 빠른 눈치를 써먹을 길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얌전히 생을 마감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것도 가장 고통스러운 사망방법이라는 압사로.


사실 나도 태평하게 이야기하곤 있지만, 안전한 상황은 아니다. 방금 죽은 동족은 내게서 그닥 먼 거리에 있지 않았다. 괴물이 이번에는 나를 쳐다본다. 지금까지 괴물에게서, 죽음에게서 있는힘껏 발악해왔는데, 그것도 이젠 끝인 것 같다. 내 생도 여기까지 인가. 죽기전에 떠오르는 것이 겨우 어제 먹다못한 아이스크림이라는 웃픈 사실이 그나마 내 기분을 달래게 해주는 것이었다...


"아아... 살아 돌아가면 고백을 하고 싶었는데"

"이의있소"

"?"


체념하던 나에게 길쭉한 막대기가 나타났다. 괴물들이 부르던 그.. 그래, 꼭 '칼'이라는 것들과 비슷했다.


"안녕하세요? 먼저 축하드린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고객님께서는 무려 마검의 1000번째 주인으로 당첨되셨습니다."

"뭐... 라고?"

"그러니까, 네가 내 주인이라고. 지금부터 일주일간 날 마음대로 쓸 수 있고..."

"주인이고 나발이고 난 이제 죽는 데 그게 다 무슨 의미야."


죽음을 앞에 둬서인지 별로 놀라움을 느낄 수 없다. 마치 감정이 쓸려나간 것 같다. 칼이 말을 한다고? 게다가 내가 그 주인으로 당첨되었다고?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람, 곧 있으면 난 죽을텐데.


"네가 긴급한 상황에 처했다는 건 잘 알아. 하지만 내가 너를 살려준다면 어떨까?"

"무슨 말이야?"

"난 주인이 원하는 바를 이루어줄 수 있거든. 그래, 주인의 소원을 말이야."

"소원을?"

"네가 원하는 건 무엇이던 들어줄 수 있지."

"못 믿겠는데."

"뒤 좀 봐볼래?"


방금전의 괴물이 멈춰있었다. 나를 밟으려던 자세 그대로.


"어떻게 된 거야?"

"시간을 멈췄어. 내가 신통력을 좀 부리거든. 이건 서비스지. 주인이 되자마자 죽어서야 재미가 없잖아?"

"그럼 소원이라는 게 진짜였구나.."

"그래 그러니까 얼른 소원을~ 말해봐~."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눈에 생기가 돌아오는 게 느껴진다. 상황판단을 시작한다. 소원이라는 것은 진짜다. 이 마검이라는 것은 물건이다. 여기서 이걸 이용한다면 난 살아 돌아갈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아니, 살아돌아갈 수 있다, 확실하게. 하지만 기왕이면 여기서만 살아나가기보단 향후의 위험도 피하고 싶다. 그렇다면...!


"빨리 움직일 수 있게 해줘. 향후 저 괴물에게 잡혀 죽는 일이 없게."


뭐, 실망했나? 하지만 난 살고 싶다. 살고 싶다는 생존욕구보다 우선시되는 욕망 따위 생물에게는 없다. 하루가 멀다하고 동족들의 몸이 찌부러져 피투성이가 되는 것을 보면 이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으리라 믿는다. 불로불사 같은 것도 있겠지만, 그럼 아픔은 그대로일 거 같다. 그렇다면 차라리 아플 일에게서 도망칠 수 있는 게 낫지.


"발을 빠르게, 이루어지리라"

"...? 뭐야 시간정지도 풀면 어떡해!"

"뭐 어때~. 빨라진 발을 한번 시험해보라고!"


괴물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날보고 소리까지 질러대면서.


"아아악! 죽어라 죽어!"

"히이익"


어라? 지금까지와 뭔가 달랐다. 발이 빠르게 움직여진다. 믿기지 않는 속도다. 그 빠르다던 치타도 부럽지 않을 것 같다. 이것이 마검이 준 힘인가? 좀 더.. 시험해볼까?


"여기다 괴물아!"


힘을 시험하기로 한 나는 과감하게 괴물의 발 앞으로 가서 원을 그리며 도발했다. 물론 내 말은 괴물에게 닿지 않았겠지만, 눈앞에서 원운동을 하는 내 행동은 충분히 약오를 것이다.


"!"


괴물이 분노해 있는 힘껏 날 죽이려 덤벼들었지만 그뿐. 나는 빨라진 발로 유유히 괴물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이 발이라면 앞으로 괴물에게 맞아죽을 일은 없을 것 같다!


잠시 후, 괴물의 시야에서 벗어나, 안전지대로 들어와 한숨을 돌리던 도중 마검이 물었다.


"어때? 맘에 들어?"

"죽여주는데?"

"그렇지? 아, 참고로 유전자 단위로 새긴 힘이니까 아마 네 자손대대로 전해질 거다. 너무 욕심없는 소원같길래 덤으로 넣어줬다."


마검이 얼굴도 없는 주제에 씨익하고, 웃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나도 웃어보였다. 이 힘이라면 앞으로 나는 손쉽게 죽음의 공포를 맛보지 않아도 될 것이다. 심지어 내 자손들까지 나와 같은 빠름을 나눌 수 있다하니, 자식들 걱정도 할 일 없을테고 말이다. 정말 이 마검이란 녀석은 나에게 내려온 구세주이다.

헌데 잘 생각해보니 이상한 점이 있다. 왜 하필 '나한테' 내려온 구세주인 거지? 당첨이란 말그대로 운빨인건가? 아니면...


"근데 넌 왜 나를 주인으로 고른거야?"

"아 ,그거?"


마검이 대수롭지 않은 질문이라는 듯이 대답했다.


"널 고르면 많은 생명체가 고통받게 되는 미래가 보였거든."

"어째 기분 나빠지는데?"

"뭐 어때, 너한텐 좋은 일이잖아, 그 발은."

"그렇기야 하지만.."

"고통받는 것도 너희 종족은 아니니 걱정 마셔."

"아, 그래?"


다시금 침묵. 내가 원체 말주변이 없던 것도 많지만, 이 발을 얻어서 기쁜 마음에 도무지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어진 게 컸다.


내일부턴 목숨의 위협이 가해지지 않는다. 더는 괴물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어쩌면 이 힘으로 고통받는 동족들을 도울 수도 있다.


기쁘다. 안도감이 든다. 행복하다. 행복이란 게 이런 감정이구나 하는 것을 처음 알았다. 푸근하고 가슴이 따뜻해지며 온몸의 긴장이 풀어지는 느낌이다. 다시는 이 감정을 잃고 싶지 않다. 우리는, 나는, 너무도 오래 고통받았기에. 다행히 다시는 잃을 것 같지도 않지만.


"후우"

"왠 한숨이야?"

"아니, 안도의 한숨이야. 이 힘만 있으면 죽을 일은 없겠다 싶어서."

"뭐? 당연하지! 바로 전번 주인이었던 엘은! ..."


마검이 발끈하다가 말을 끊었다. 뭐지?


"뭐야 왜 말을 하다 말아?"

"아니, 그러고 보니까 너 이름을 아직 못들어서. 이름을 알아두어야 나중에 회차정리할 때 쓰기가 편하다고 했거든."

"뭐야 그건"


피식 웃었다. 내 이름이라...


"난 이름 없어. 괴물이 날 부르던 거라면 모를까."

"그게 뭔데?"


괴물이 부르던 나의 이름.

그것은 이름이라기보단, 멸칭에 가까운 것. 나와 우리 종족에 대한 멸칭에 가까운 것. 분노를 듬뿍 담아 부른, 멸칭에 가까운 것.

그것은 이름이라기보단, 선고에 가까운 것. 괴물이 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내 동족들은 죽음을 맞이했으니, 죽음의 선고 같은 것.

그것은 이름이라기보단, 상징에 가까운 것. 그 이름과 함께 학살이 자행되었으니, 학살의 상징에 한없이 가까운 것.


그러나 생명의 은인에게 이름조차 말하지 않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무엇보다 지금은 이 날랜 다리가 있다. 이 두 다리로, 나는 우리의 이 이름을, 괴물들로부터의 공포의 상징에서, 괴물들에게의 공포의 심볼로 바꿀 것이다.

그러니 말하자. 당당히 말하자. 괴물들이 나의 피붙이를 으깰 때 쓰던 그 이름을, 괴물들이 나의 벗들을 짓뭉개던 그 이름을.

그 이름은...


"바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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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과거 배경으로 하나 써보고 싶어져서 쓴 글. 바선생은 존재해선 안될 생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