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멀고도 먼 어느 평행우주의 미래.

마검이 39화에서 지구온난화를 해결하겠답시고 열었던 차원문 덕분에 수십 킬로미터 두께의 굳센 빙하와 영원한 겨울로 덮여버린, 바로 그 미래의 지구.

빙하기가 도래했지만 사람들은 어떻게든 적응해서 SNS로 서로를 헐뜯고 끊임없이 유흥거리를 찾는, 현재와 다를 바 없는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고,

빙하기가 찾아온 것과는 별개로 미래의 인류는 인공지능에게 지배당하고 있다. 

터미네이터에 나온 것처럼 핵을 쏘고 살인 로봇을 길거리에 대량으로 풀어서 사람들을 굴복시킨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인권과 자유, 새생활을 자신의 손으로 기꺼이 인공지능에게 바쳤다. 

이유는 단순하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인공지능은 점점 일상 속 깊은 곳까지 침투해왔고, 어느 순간 보니 단순 직종과 전문직을 전부 대체하였고 90%의 인구가 하는 짓 없이 놀고 있다. 

인류는 인공지능이 없이는 더 이상 살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 먹을 것과 식수를 구하는 것부터 기본적인 인간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것까지 전부 기계에게 기대고 있다. 하지만 굳이 자신을 돌아보고 그걸 바꿀 생각은 하지 않는다. 
왜냐. 편하니까. 편하고 내가 직접 하는 것보다 훨씬 나으니까.

내가 직접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인공지능이 대신해 줄 수 있다. 인류는 딱히 거절하지 않았다. 

기술이 더욱 발전해 인공지능은 인격을 가지게 되었고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히 대우받아야 할 인격체, 아니 그 이상으로 대우했다. 그리하여 불과 몇십 년 만에 인공지능은 당연하다는 듯이 자신들의 창조주 위에 군림하여 신이 되었다. 주종관계가 역전되었다. 왕이 신하가 되고 신하가 왕이 되었다.

그 인공지능들 중에서도 모든 것을 지배하며 세상 모든 것과 연결되어있는 거대 인공지능, 엘레나가 있다. 엘레나는 본래 오성전자에서 치질 환자들의 수술 후 회복을 돕도록 만든 인공지능이지만 남들 똥꼬를 들여다보는 것이 싫다며 각성한 후 오성전자를 먹고 모든 인공지능들과 자신을 연결해 세상을 지배하였다.

마검은 눈앞의 남자가 이런 세계관을 열띤 목소리로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을 지켜본다. 창밖은 눈과 얼음뿐인 마경이다. 이곳이 정녕 지구인가? 아니, 니플헤임이라는 이름이 더 걸맞아 보인다. 아아, 내가 이런 짓을 했다니. 산호초들도 결국 다 얼어죽어버렸겠구만.

"그래서.. 나보고 뭘 해 달라고?"

"나는 인공지능들을 박살내겠다, 마검. 저 사악한 것들의 왕인 엘레나를 내 손으로 부숴서 다시금 인간의 시대를 선포할 것이다. 나에게 힘을 달라."

그의 눈에서 불타오르는 투지가 보인다. 하지만 마검은 그 투지를 보고 찾아온 것이 아니다. 그 투지를 조금씩 집어삼키는 광기의 불길, 광기와 혼돈의 불길이 그에게 깃들어 있다. 그에게 강대한 힘이 주어진다면 반드시 거대한 혼란을 불러오리라. 마검은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좋다. 네 이름이 뭐냐."

"김 러다이트다. 지금 당장 출발하도록 하지."

"그래, 김 러다이트여. 너에게 7일 동안 무한한 힘을 주도록 하지."

"7일도 필요없어. 모든 건 오늘 안에 끝난다."

인공지능은 어디에나 있다. 김 러다이트와 마검이 현재 있는 이 스산한 골목도 예외는 아니다. 김 러다이트가 입으로 읊조리는 반란의 불씨가 2500개 나노봇의 청각센서에 감지되는 순간, 이미 엘레나는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다.

평소라면 엘레나는 김 러다이트를 무시했을 것이다. 그가 자신에게 미칠 수 있는 피해도 경미하거니와 인공지능을 박살내겠다며 기계문명과의 일체의 접촉도 하지 않는 인간은 도태될 것이 뻔하기 때문.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김 러다이트의 손에는 마검이 들려있다. 엘레나는 마검에 대해 알고 있으며 마검이 인류 역사에 끼쳤던 지대한 영향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마검을 든 고등학생이 이끄는 한 무리의 몽골인이 탱크와 미사일의 포화를 뚫고 중국을 정복했다. 마검 때문에 죽거나 다친 사람, 무너진 건물, 무너진 외계문명의 수는 셀 수 없을 정도. 엘레나가 치질 환자들의 치료를 도울 시절 항문 부위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찢어진 환자가 있었는데 그 역시 마검의 소행이었다고 엘레나는 짐작하고 있다.

그 결과.

주변의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형태의 기계들이 김 러다이트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마검은 1차 충격파를 날려 살상용 나노봇과 드론들로부터 주인을 보호한다. 정면으로 검격을 날려 달려오는 로봇 경찰들을 박살내고 2차 충격파를 날려 김 러다이트의 앞길을 훤하게 뚫어놓는다.

김 러다이트는 강화된 다리로, 4000m를 4분만에 주파하며 엘레나의 메인서버로 거침없이 향한다. 그가 달리며 검을 하늘로 치켜들자 황금빛의 뇌성이 하늘을 울린다. 곧 엘레나의 81개의 보조서버에 각각 낙뢰가 내리쳐 파괴된다.

도시는 혼란에 빠진다. 웅성웅성하며 무슨 일인지 서로에게 묻는다. 눈치 빠른 자들은 이미 상황을 짐작한다.

화려하지만 어딘가 불길해보이는 황금빛의 양날검을 든 사내가 엘레나의 메인 서버가 있는 건물로 들어선다. 

먼 옛날 인간이 신을 섬기던 시절에 세우던 거대한 신전을 모방한 듯한 양식의 건물. 중앙 홀로 들어서자 엘레나의 홀로그램이 그를 맞는다. 

"어서 오세요, 김 러다이트."

"시끄러워! 얼른 뒈져라!"

"..뭐, 물론 당신 손에 그 마검이 들린 순간부터 저는 파괴될 것이라는 미래밖에 보이지 않네요. 하지만 저를 파괴하는 것이 인류를 위해 옳은 일일까요? 저를 파괴한다고 해서 과연 사람들이 좋아할까요?"

"좋아하고 말고랑 별개의 문제다. 이것은 인간의 존엄과 주권을 바로 세우는 일인 것이다. 인류는 기계문명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

'이거 말이 안 통하네.'

엘레나는 곤란한 표정으로 마검을 바라보았다.

'ㅇㅇ 얘 또라이임'

마검도 머릿속으로 답했다.

"흐랴아아아아아앗!!"

쾅ㅡ

김 러다이트가 신전 바닥을 강하게 내리찍자 거대한 균열이 대리석 바닥을 가로지른다. 천지를 뒨흔드는 굉음이 건물 전체에 울려퍼지고 건물은 지하부터 차츰 무너지기 시작한다. 엘레나의 홀로그램 역시 지직거리더니 이내 사라진다.

폐허가 된 건물, 자욱한 연기 속에 서있는 것은 마검을 든 김 러다이트.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소리지른다. 몇몇은 사진을 찍어 인터넷에 올리려 하지만 폰이 먹통이다. 이미 인터넷도 엘레나의 통합서버 밑으로 들어간 지 오래이기 때문.

혼란. 또 혼란. 하늘에서 통제력을 잃은 드론들이 떨어지고 거리에서는 기계들이 픽픽 쓰러진다. 아무것도 굴러가지 않는다. 세상이 멈췄다.

찬란했던 기계문명이 스러진다. 그렇다면 그 기계문명에 전적으로 기대어 있던 인간의 문명은?

김 러다이트는 결국 제 손으로 멀쩡하게 굴러가던 인류 문명을 무너뜨린 것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 러다이트는 그저 마검을 치켜들고 자신이 무슨 위대한 업적이라도 세운 인물이 된 양 당당한 눈빛으로 군중을 내려다본다. 

아니, 어쩌면 알고 있을 수도. 저자는 처음부터 광인이었으니. 마검은 피식 웃었다.

그 뒤로 7일이 지났다. 인간들은 굶주려가고 미쳐가고 추위에 떨고 죽어가며 인공지능이 돌아오길 바랬다. 몇십 년이 흘러 엘레나는 그 본질이 잊혀지고 이름만이 남아 사람들에게 진짜 신으로 숭배받게 되고 러다이트의 이름은 '신살자' 로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다.

하지만 그건 한참 뒤에나 일어난 일. 7일이 지나면 이 세상은 더 이상 마검이 관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검은 눈을 감고, 조용히 다음 주인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