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의 세계와 엉겁의 시간을 거쳐온 마검은 이번에는 잿빛 구름을 뚫고 어느 대지로 멋지게 착륙… 아니, 추락했다.


“젠장… 이것도 익숙해질 필요가 있군. 그나저나 여긴 어디지?”


마검은 자신이 꽂힌 잿빛 흙에서 생명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회색의 흙들은 수분이 전혀 없는 모래나 재처럼 전혀 뭉쳐지지 않고 뿔뿔이 흩어졌다. 마검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처음부터 푸른색이 아니었다는 듯이 잿빛의 두꺼운 구름만이 끼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았을 땐,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회색의 요새 같은 건물과 붉은 물이 흐르는 구조물이 보였다. 하지만 그것들 만으로도 불길하고 기분 나쁜 광경이었으나 마검의 시선에 항상 머무르며 불길함을 주는 것은 저 멀리 어렴풋이 보이는 거대한 탑이었다. 위로는 저 하늘 끝까지, 아래로는 보이지 않는 저 깊은 곳까지 뻗어 있는 탑은 이곳이 멀쩡한 곳은 아니라는 것을 마검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게다가, 가끔씩 스산한 바람이 불 때마다 바람을 타고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죽여줘~!”

“우릴 풀어줘!”


대략 이런 식이었다. 자신을 주울 사람조차 없는 이 땅에 마검은 잘못 떨어졌다고 투덜거리던 와중, 인기척이 멀리서부터 느껴졌다. 뒤이어 지축을 흔드는 소리, 금속성 물질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며 저 너머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 긴 백발을 가진 사내는 마검이 어림 잡아도 키가 2m는 되어 보일 정도로 컸다. 그리고, 그 다음 광경에 마검은 경악했다. 그자의 뒤로 기괴하게 생긴 병사들이 추적하고 있었으니까. 분명 금속 갑옷을 입었지만 인간의 그것은 아니었고, 간간히 보이는 피부 역시 무기물로 보였다. 그런 것들이 각각 칼과 창, 지팡이를 들고 사내를 뒤쫓았다. 곧이어 그들의 뒤로 마검이 이젠 더 이상 놀라기도 힘들 정도로 거대한 거수(巨獸)가 뒤를 쫓았다. 금속의 피부로 이루어진 그 거수가 한번 소리를 지를 때마다 몸 속에서 새빨간 불꽃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사내는 죽을 힘을 다해 달리다 마검을 발견하고는 멋지게 그것을 뽑아 간결한 몸놀림으로 몸을 틀어 그들에 맞서려 들었다. 이제 드디어 마검이 나설 차례였다.


“너의 기억을 보았다… 너의 마음도 보았다… 너를 도와주마… 네가 가장 오래 쓴 검의 모습으로…”


마검은 사내의 기억에서 본 검의 형태로 자신을 바꿨다. 남자의 키 절반 정도 오는 검은 코등이(가드)가 칼날로 이루어진 것과 자루와 같은 재질로 이루어진 것 두 개가 있었고, 그 사이에는 염소의 해골이 장식되어 있었다. 칼날은 양 날이 서로 다르게 가시가 튀어나와 있었고 넓은 면에는 룬 문자가 적혀 있었다. -마검이 아는 바로는, ‘여기 힘이 있었노라. 그리고 여기 절망 또한 있었노라.’라고 적혀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검에서 푸른 한기가 돌자 사내는 만족한 듯 미소를 짓더니 자신을 쫓아온 그것들을 향해 달려들어 모조리 베어버렸다. 잠시 후, 모든 적을 물리친 사내는 근처 바위에 기대어 앉아 숨을 돌렸다. 마검이 말했다.


“급한 상황은 넘겼군, 나를 잡은 자여 일주일간 나는 너의 검이며 그동안 네 소원을 하나 들어주마.”


남자는 허탈하게 웃더니 말했다.


“그렇다면 날 이 지옥에서 탈출하게 할 수 있나?”


“아니, 불가능하다. 나는 검에 묶인 존재, 나 외에 다른 존재는 같이 이동할 수 없다.”


남자는 그저 웃었다. 그리고, 다시 마검을 바라본 남자의 눈빛은 분노에 차 있었다.


“그렇다면 이곳의 ‘관리자’를 불러내는 수밖에 없겠지?”


“무슨 소릴 하는 거냐?”


“나에게 힘이 필요하다. 이곳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는 모두 ‘놈’의 하수인이지. 그놈들을 전부 쓸어버린다면 ‘그자’가 이곳에 친히 나타나지 않겠나? 그리고 놈을 쓰러뜨린다면 여기서 나갈 수 있겠지.”


마검은 남자의 생각이 묘하게 감탄했다.


“좋다, 계약 성립이다!”


한차례 빛이 일고, 남자는 이제 일주일간 절대 지치지 않는 체력을 얻었다. 그 다음, 남자가 시작한 것은 이 땅의 모든 존재를 베어버리는 것이었다. 하나, 둘, 수십, 수백, 수천… 6일 째 되는 날, 이젠 세는 것을 포기할 정도로 많은 존재를 쓰러뜨린 사내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마검이 말했다.


“앞으로 18시간 정도 남았다. 하지만 네가 말한 그 ‘관리자’는 나타나지 않는군. 설마 놈이 전혀 모르고 있는 건 아니겠지?”


“이 대지에 있는 한 절대 그럴 리 없다, 마검.”


남자는 말 대신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저 하늘에 떠 있는 초록색 구체가 보이나? 저게 놈의 ‘눈’이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놈은 알고 있지. 내가 어딜 가든, 무슨 짓을 하든 놈은 모두 보고 있다.”


“그 말대로다, 왕자여.”


남자와 마검은 그 소리에 깜짝 놀랐다. 허공에서 기묘한 포탈이 생기더니 그 안에서 거대한 괴인이 나타난 것이다. 회색의 피부의 곳곳에 푸른 균열이 가 있는 몸, 가슴 한복판에 구멍이 뻥 뚫려 그곳을 중심으로 목까지 회색 방어구를 걸친 것 이외에는 헐벗은 상체, 머리카락은 없었지만 그 푸른 빛을 내는 눈은 너무나 위압적이었다. 마검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이 자가… 이 자가 ‘관리자’로군…!”


남자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희열에 찬 미소를 지으며 마검을 고쳐 잡았다.


“드디어 만났군… ‘간수’여. 네가 오길 기다렸다.”


“어리석구나… 너는 날 이길 수 없다.”


“그건 봐야 아는 일이지!”


남자와 간수는 서로 무기를 맞댔다. 한 번 둘의 무기가 부딪힐 때마다 요란한 금속의 소리와 함께 지축이 흔들리고, 겨우 목숨을 부지한 존재들도 그 여파에 휩싸여 부서졌다. 그렇게 싸우길 수 시간, 결국 남자는 마검을 떨어뜨리며 주저앉았다.


“다 끝났다. 너의 힘은… 너의 기억은 쓸모가 있겠어… 그리고 저 ‘검’도.”


“무, 무슨?!”


간수가 손가락을 튕기자 저 멀리 무한히 솟은 탑에서 무언가 날아들었다. 등에 날개가 달린 인간형의 무언가 나타나선 각각 남자와 마검을 붙잡아 탑으로 끌고 갔다. 남자는 탑 내부의 감옥에 묶인 채 자신의 기억을, 영혼을 빼앗기고 있었다. 그리고 마검은… 탑의 수많은 대장장이에게 자신들의 무기로 벼려내려는 노력에 고통받고 있었다. 마검은 버텼다.


‘앞으로 1시간… 조금만…’


하지만 그런 말이 무색하게 간수가 다시 나타나 마검을 붙잡았다.


“너는 쓸모가 없구나…! 네놈은 이곳 ‘토르가스트’에 있을 자격도, 힘도 없다.”


그 말과 함께 간수는 자신의 힘으로 마검에서 무언가를 뽑아내려 들었다. 마검은 고통에 처절하게 비명을 질렀으나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마침내, 간수는 마검에게서 ‘힘’을 뽑았다.


“이 힘은… 괜찮군. 쓸모가 있겠어.”


마검은 다시 원래의 평범한 검으로 돌아왔다. 그제야 마검은 간수가 자신에게서 뽑아간 힘의 정체를 알았다. 마검은 이제 다시는 모습을 바꿀 수 없었다. 간수는 사악하게 미소를 지으며 마검을 들고 토르가스트의 바깥으로 나왔다. 탑의 아래 역시 위처럼 짙은 잿빛 구름에 가려져 있었다.


“네놈은 이제 필요 없다. ‘아서스 메네실’… 그자만 있으면 충분하거든.”


그 말과 함께 간수는 마검을 그 짙은 구름 아래로 던져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7일이 지나버렸다.


-후기-

와우 하던 중에 문뜩 떠올라 만들었습니다. 어차피 결말이 마검의 죽음이라면 힘을 천천히 잃는 것도 나쁘지 않을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