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구름이 파란 하늘을 채우던 날, 검은 먹구름이 내 마음을 채웠다.

 

- 이제 슬슬 헤어질 때가 된 것 같아, 윤현아. 너도 내가 얼마나 참아왔는지 알잖아.

 

- 하지만... 이렇게 헤어지는 건..

 

- 이렇게 헤어지는게 뭐?

 

 해영이가 나를 노려보았다. 그 눈에는 원망이 가득했다.

 

- 우리 3년이나 사겼어, 근데도 넌 나를 아직도 알지 못할 뿐더러 진도도 안나가고, 항상 자기가 하고싶은 것만 하고, 그런데도 내가 계속 너랑 사겨야 해?

 

 나는 순간적으로 내 이기적인 행동들이 머리를 스쳐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땅을 바라보았다. 해영이는 계속 내 욕을 했지만,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울분이 담겨있어 계속 나를 괴롭혔다.

 

- 미안... 미안해...

 

- 알면 이제 끝내자. 나도 지긋지긋하니깐.

 

 나는 차마 해영이를 붙잡지 못하고 해영이가 떠나는 모습을 보며 한참이나 서있었다. 나는 쓰레기이다. 나를 바라봐주는 사람에게 오물을 뱉는 쓰레기이다.

 

*

 

 해영이와 헤어지고 3개월이나 흘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의 말이 내 머리를 맴돌아 그녀를 잊을 수 없었다. 마치 긴 생머리의 깊은 갈색 눈동자를 가진 그녀가 내 옆에 누워있을 것 같았다. 

 

- 하아... 또 밥 떨어졌네.

 

 예전엔 해영이가 밥을 사서 해주곤 했는데, 해영이가 없으니 나는 히키코모리가 되어 라면이나 먹곤 했다. 그런데 3주 연속으로 라면을 먹자니 속이 더부룩해서 그냥 쌀을 사러 나가기로 했다.

 

 - 5키로...? 10키로..? 1키로도 있네, 뭘 사야하지...

 

 나는 쌀포대 앞에서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나오기 귀찮을 것을 염려해 20키로 짜리 쌀포대를 들고 계산대로 갔다.

 

- 허억... 허억... 계산이요...

 20키로가 이렇게 무겁다니, 말이 되는가..? 결국 나는 그 커다란 쌀포대를 끙끙대며 혼자 들고 집으로 가기 시작했다.

 

- 으악!

 

 쌀포대가 앞을 가려 누군가와 부딪히고 말았다. 쌀포대가 터져 쌀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앞에는 어떤 여자가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 저기 괜찮으세요? 죄송합니다...

 

 이렇게 말하곤 가려고하는데 그 여자는 일어서지 않고 있었다.

 

- 저기요...?

 

 이러면서 어깨를 툭 쳤더니 갑자기 그 여자가 내 손을 덥썩 잡고 가만히 있었다. 아, 일으켜세워달라는 거구나. 나는 그녀의 손을 당겨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그녀가 손을 휙휙거렸다.

 

- 저기 뭐하시는 건지..?

 

 그녀가 조금 더 휙휙거린 뒤, 알겠다는 듯한 제스쳐를 하고 주머니에서 수첩과 볼펜을 꺼내 뭐라 적었다. 그러고선 나에게 보여주었다. 수첩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 "괜찮으세요? 제가 눈이랑 귀가 안 좋아서.."

 

 라고 적혀있었다. 아무래도 시각과 청각에 장애가 있는 듯 했다. 그러고선 그녀가 다시 뭐라고 수첩에 적어 보여주었다.

 

- "괜찮으시면 손에 ㅇ자를 그려주세요"

 

 나는 그녀의 손에 ㅇ자를 그렸고, 그녀는 빙긋 웃고는 꾸벅 인사를 하고 등을 돌렸다. 긴 생머리에 깊은 갈색 눈동자, 해영이를 닮은 아름다운 모습이 지금 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급하게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 흐앗??! 

 

그녀는 놀란 듯 했다. 나는 그녀의 손을 펴서 "전화번호 주세요" 라고 하나하나 정성스레 적었다.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 하자 나는 몇번이고 그녀의 손에 "전화번호 주세요" 라고 적었다. 그녀는 내 뜻을 이해한 듯 깜짝 놀라고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수첩을 꺼내 전화번호를 적고 찢어서 내게 주었다. 찢어진 종이 아래에는 작게,

"보청기가 있으면 들을 수는 있어요. 전화해주세요" 라고 적혀 있었다. 그러고는 그녀는 기뻐하며 지팡이로 길을 짚으며 천천히 길 어딘가로 사라졌다.

 

 나는 그렇게 지윤이를 만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