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향 대중물에서 매력적인 캐릭터에 대한 논의는 결국 클리셰론의 일부인 모에속성론으로 귀결되는것같다. 


모에속성론이 맞다면, 어쨌든 기존에 상품성이 검증된 모에속성을 확보하고 모에 캐릭터를 찍어내면 그 캐릭터는 적어도 평타는 칠것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구매층이 좋아할만한 모에속성으로 떡칠을 해놓고도 정작 그 구매층에게 캐릭터의 매력이 없다고 외면받는 만화, 애니메이션, 소설, 게임이 넘친다.


여기서 한가지 생각해볼건 "왜 모에속성을 그렇게 많이 확보해두고도 그 캐릭터는 매력이 없느냐"다. 모에속성을 너무 남발해서?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에속성 과잉의 끝판을 달린 히트작(데이트 어 라이브 등)도 있음을 기억해야한다. 게다가 일본풍 이세계물은 모든 캐릭터가 클리셰적인 모에속성의 과잉집합체이나, 이세계물 붐은 여전하다. 한마디로 모에속성이 너무 많다고 대상독자가 거부감을 느끼진 않는다는 얘기다. 


그럼 왜 모에속성을 많이 넣고도, 최상급 퀄리티의 일러와 작화를 뽑고도 "캐릭터가 매력이 없다"는 소리를 듣는 작품이 생기는걸까?


모에속성을 쓸 때 절대 잊어버리지 말아야하는 원칙은 이것이다. 


[모에속성은 클리셰다]


클리셰란 무엇인가? 그건 서술자와 독자 사이에 맺어진 비밀스러운 약속이다. 고전적인 예를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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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발을 트윈테일로 모아 묶은 그녀는 아래에 쓰러진 나를 노려보며 치마 아래를 급히 손으로 가렸다.

"어딜보는거야! 죽어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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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발 트윈테일 여캐]라는 클리셰가 사용된 서술이다. 서술자가 이 클리셰를 흔들며 독자에게 전달하는 내용은 뭘까?


서술자 : 얘 츤데레라서 사실은 주인공에게 마음있고, 결국은 둘이 잘될거임. 여주 말심한거 이해해주셈.

독자 : ㅇㅋㅇㅋ


클리셰가 사용된 단락에선 서술자와 독자 사이에 이런 약속이 오고간다. 여주가 남주와 잘될거라는 복선이, 여주가 남주에게 마음이 있다는 설명이 저 서술에 있는가? 코빼기도 없다. 하지만 [금발 트윈테일]이니까 설명안해도 된다. 독자는 이미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클리셰는 이렇게 종합적인 정보를 압축해서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이 압축이 가능한건 독자가 [금발 트윈테일 = 츤데레]라는 사전정보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클리셰를 써서 얻는 장점은 스피디한 전개와 초간단한 상황설명효과다. 매력적인 캐릭터는 클리셰 사용중 우연히 떨어진 부산물에 불과하다. 클리셰는 독자가 지닌 사전정보를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지혜의 열쇠다. 다시 예제로 돌아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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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발을 트윈테일로 모아 묶은 그녀는 아래에 쓰러진 나를 노려보며 치마 아래를 급히 손으로 가렸다.

"어딜보는거야! 죽어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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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서술은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서술이 아니다. 십덕문화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이 서술에서 의도한 것을 읽어내는게 불가능하다. 그럼 보강설명을 해주는게 좋을까?


필요없다. 클리셰를 써놓고도 클리셰를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저 금발 트윈테일이 사실은 주인공에게 반했고 속마음은 다른 츤데레라고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럴거면 클리셰를 쓰는 의미가 없지 않은가. 오히려 클리셰를 잘 아는 주 독자층을 지루하게 만들 뿐이다. 


클리셰를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 그런건 필요없다. 당신이 쓴 클리셰를 모르는 사람은 당신이 의도한 독자가 아니다. 개연성 부족 지적? 클리셰로 서술자와 독자 사이에 개연성이 확보되었는데, 거기 대고 개연성 부족을 운운하는건 장르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것 뿐이다. 그런 의견은 무시하면 된다.




갭모에는 뭘까?

갭모에는 클리셰 파괴에서 온다. 클리셰가 파괴되면 긴장감이 생기며 그 장면에 집중하게 된다. 왜일까?


서술자가 약속을 깨트렸기 때문이다.

독자에게 약속한 캐릭터의 성격을 멋대로 바꿔버려 당혹스러운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금발 트윈테일이 진지하게 주인공을 죽이려 하는 사이코패스라면 작품이 로맨스에서 스릴러로 바뀌는거니 배신감을 유발하게 된다. 이 경우에도 마니아는 생길 수 있을거다. 신선하긴 하니까. 니시오 이신이 이렇게 마니아층을 확보한 작가다. 그러나 니시오 이신은 독자의 배신감을 넘어서는 재미를 주기에 살아남은거고, 웬만해선 극단적인 클리셰 파괴는 안하는게 안전한 선택이다.


 어쨌든 모에속성이 클리셰라는 것을 이해하고, 클리셰가 독자와의 약속이라는 것을 이해하는게,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드는데 도움이 될것이다.


 금발 트윈테일은 그녀가 츤데레이고, 남주를 좋아하게 될거라는 약속이기 때문에 인기있는거다. 매력적인건 금발 트윈테일이 아니라 사랑의 약속이다. 그 약속이 없으면 금발 트윈테일은 매력없는 이상한 헤어스타일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