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없었다. 프랑크푸르트역에서 매표소로 달려가 열차표를 끊고 바로 기차로 올라탔다. 기분탓인지 기차가 평소보다 느리게 느껴졌다. 각 역마다 제시간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만큼 나는 몹시 초조했다. 급행으로 지나가는 역, 휘어져서 속도가 감속되는 커브길, 별로 길지 않아 어두워지자마자 밝아지는 터널. 신경이 곤두세워지자 이런 것들에 예민하게 반응되었다.


"타테냐, 언제 도착해?"

"그니까 29분 뒤에 도착한다고 제가 1분 전에도 말씀드렸잖아요."

"아, 그래, 고마워. 그래서 몇 분 남은 ㄱ... 아앍앍"


타테냐가 계속되는 아이폰 시리 취급에 질려갈 때 쯤 드디어 열차가 도착했다. 열차 문에서 뛰어내려 바로 대충 아무 택시나 집어타고 영지로 갔다. 영지에 도착하자마자 '대충 이 정도면 되겠지'하고 택시기사에게 돈뭉치를 꺼내주며 바로 문을 열었다. 거스름돈 안 줘도 된다는 말에 싱글벙글한 택시기사를 뒤로 하고 나는 급하게 달려갔다.


옷가게. 이 사건의 연결고리이자 어쩌면 시작점. <돈많어요 옷>이라는 간판을 보자마자 나는 그곳 카운터를 탁 치고 말했다.


"여기 사장 나오라그래!"


그러나 사장은 나오지 않았다. 왜소한 체격의 젊은 여자만 나올 뿐이었다. 빨간머리였다.

"도,도,도,도대체 무슨 일이시길래..."

"니네 사장 나오라그래!"

"아니, 그, 저, 사장님은..."


이곳 알바로 보이는 여자가 이런 고압적인 신개념 진상짓에 당황하며 말을 얼버무렸다. 돈 뜯으려고 작정한 사람인 줄 알고 무서워하는 듯 해보였다.


나도 흥분을 가라앉히고 다시 말하기로 했다. 마음을 다시 고쳐먹고 좀 더 유하게 접근했다.

"그니까, 여기 사장님 어딨어요?"

"아, 사장님은 지금 여기 없으세요."


사장님이 없다? 이렇게 절묘한 시기에? 하필 이 시간에 가게를 비운다니 정말 수상했다.


"언제부터요?"

"어제부터요."

"어디 갔는데요? 어디 갔는 지 알아요?"

"오일장 가셨어요. 뭐 여러 개 팔러 가셨어요."


오일장? 내가 아는 정보를 종합하면 이건 거짓말이었다. 하필 이 시간 이 타이밍에 자리를 비운다는 건 분명 우리 가문에 대해 밑작업을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 알았어. 그럼 누구랑 같이 갔는데?"

"저 말고 며칠 전부터 일 도와준 사람 한 명 있어요. 젊은 남잔데, 저희 가게에 발품팔러 온 원단 만드는 대기업 영업사원이에요. 오성그룹의 오성모직이었을 걸요 아마."


알바녀의 입에서 정보가 줄줄이 나와서 다행이었다. 근데 같이간 남자는 대기업 영업사원? 심지어 기업도 한국식 이름이다. 수상한 냄새가 났다. 이런 구석진 가게에 굳이 저 이역만리 떨어진 모직회사가 발품을 팔러 온다? 이건 분명 원더라의 가짜신분이었다.


대충 퍼즐이 맞춰졌다. 지금쯤 옷가게 주인은 오일장이 아닌 다른 곳에서 사기를 치고 있을 것이었다. 근데 그럼 어디서? 어떻게?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만나요!"

"아, 네."


알바녀는 이 이상한 상황을 어떻게든 잘 해냈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다시 업무에 몰두했다.


그럼 이제 성으로...


"근데 이상한 거 못 느꼈어요?"

"뭐?"

"아까 그 알바생 옷 안에 피 묻어있던데요."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옷 소매 안쪽이나 이런 곳에 피 남아있던데요. 한 번 빨아서 흔적이 많이 없어졌긴 하지만."

"그럼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잘 생각해보았다. 빨간머리의 여자. 번뜩 생각이 났다. 증거영상의 그 여자?

지금 생각해보니 맞는 것 같았다  장발의 빨간머리. CCTV의 그 여자와 일치했다.


"그리고 아까 몰래 가게 안을 봤는데, 그 로브가 있었어요. 거기도 잘 안 보이는 곳에 피 묻어있었고요. 아마 여기 직원복같은데."


소름이 돋았다. 그럼 저 알바생도 한 패? 지금까지 알고 있던 모든 세계가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옷가게가 전부 다 한패라는 뜻이었다. 술집 주인을 죽인 건 어쩌면 저 알바생이었다.


육두문자가 튀어나왔다. 배신감이 어마무시했다. 증오와 분노에 찬 채 성 문을 열어젖이고 성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여기 무슨 일 없었지?"

"아, 지금 도련님의 누님 관련으로 사람이..."

"어디? 바로 안내해!"

"넷!"


시답잖은 뒷말은 끊고 바로 걸음을 재촉했다. 그 사이에 또 뭔가가 일어나고 있었다. 어쩌면 그 옷가게 주인이 이상한 일을 벌이고 있었던 걸까?


"그보다 오일장 언제부터 열린데?"

"예? 오일장은 어제 끝난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래? 하아..."


오일장도 거짓. 그렇다면 거기에 갔다는 말도 거짓. 그렇다면 옷가게 주인의 위치는...


벌컥.


"찾았다!"


방 문을 세게 열어젖히자 안에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소스라쳤다. 안에 있던 사람 중 한 명은 카밀로, 내 동생이었다. 그리고 그 맞은 편에 있는 나머지 한 명도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네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옷가게 사장!"


옷가게 주인이 여기 있었다. 바로 손이 자동반응해 멱살을 잡았다. 멱살을 잡는 과정에서 전깃줄에 발이 걸려 주변 집기들이랑 전자제품들이 와장창 깨졌다. 카밀로는 돈다발이 가득 찬 봉투에서 돈을 꺼내려다 만 채 이 갑작스러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멍하니 앉아있었다.


"워워, 하인리히님. 진정하시고."

"진정하게 생겼어?"


그 후로 내 입에서 쌍욕이 쏟아졌다. 카밀로는 평소 내 성깔이 폭발하고 있다며 쓰러진 집기들 사이로 줄행랑을 쳤다.


한참을 욕하고 나도 속이 별로 후련해지지가 않았다. 그래서 대충 한 대 패서 제압한 후 전깃줄로 꽁꽁 묶어 제압해놨다.


그리고 여기서 의문점. 카밀로는 대체 왜 여기에?


바로 카밀로를 뒤쫓아갔다. 얼마 가지 않아 막다른 길에서 혼자 헥헥거리며 숨을 고르고 있는 카밀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너 쟤랑 무슨 사이야? 그 돈다발은 뭐고?"


카밀로가 돈다발을 등 뒤로 숨기며 말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캐물었다. 한 손에 포스기를 들었다.


"너 설마 쟤랑 한 패야? 나를 영주직에서 몰아내고 네가 차기 영주를 차지하려고? 그래도 이건 아니지! 사람이 죽었다고!"

"아니, 그게 무슨..."

"너 때문에 애꿎은 술집 주인이 죽었어! 그 원더라랑 무슨 사이야? 내 누나한테 살인 누명 씌우고 그러니까 속이 시원해?"


그렇게 대충 속사포로 말을 꺼냈다. 카밀라는 계속 아니라고 잡아뗐다.


"글쎄 난 모른다고! 내가 형한테 뒤집어 씌우는 게 아니라 형이 나한테 씌우는 거겠지! 니네들이 한 범죄를 나한테 뒤집어 씌우겠다며? 뭐 경쟁자 제거작업이랬나? 그니까..."


열받아서 한 대 팼다. 전생에서는 열받아도 뒤에서 잘근잘근 조졌는데 여기서 이런 정신나간 일들을 겪으니까 주먹이 먼저 나가게 되었다.


"됐고 묻는 말에나 답해."

포스기를 꺼내들어 카밀로의 눈앞에 가져다대었다. 카밀로가 이건 또 뭔가 하고 눈이 휘둥그래졌다.

"이건 또 뭐야, 너 편의점도 턴 거야?"

"됐고 답이나 해. 너 대체 왜 그랬어?"


카밀로가 침을 삼켰다. 잘못하면 ㅈ된다는 심정인 듯 했다.


"나 진짜 형 말이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고! 헬렌 누나니 술집이니 원더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고! 아아아앙아앍ㄱㄹㄱ"

"[삐빅. 진실.]"

"그래, 그럴 줄 알ㅇ... 아 잠깐 뭐? 진실?"

"아니 진실이니 뭐니 그게 뭐야. 뭐 거짓말 탐지기 그런 거야?"

카밀로가 솟아날 구멍이 생겼다는 듯 화색이 돌았다.

"아, 그런 거면 말을 하지. 계속 쏴봐. 답해줄게."


"그니까 진짜 네가 한 게 아니라고?"

"응... 아아알앍ㄹㄱ"

"[삐빅. 진실.]"


뭐지? 그럼 옷가게 주인은 대체 왜 카밀로랑 있던 거지?


"어... 답변 고마워. 근데 네가 말한 건 뭐냐?"

"그니까 내가 한 게 아니라 형이 한 거였냐고."

"아, 그거? 아니지."

그리고 나한테 포스기를 셀프로 가져다댔다. 당연히 결과는 진실.


"어... 됐고 간다."


이제 퍼즐이 맞춰졌다. 카밀로도 나처럼 사기를 당하는 중이었다. 옷가게 주인이 이렇게 대범한 ㅅㄲ일 줄은 몰랐다.


당장 방 안으로 들어가 전깃줄에 묶인 옷가게 주인을 발로 한 번 차고 시작했다.


"일어나서 해명부터 하시죠."


옷가게 주인이 말없이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말했다.


"그렇게 저희들한ㅌ..."

"영상은 잘 보셨을 거라 믿었는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시는군요."

감히 내 말을 끊고 치고나왔다.

"사기꾼 ㅅㄲ가... 그래서 그 토막토막 끊어진 영상으로 뭘 어찌할 생각입니까?"

"제가 이럴 줄 알고 다른 사진도 가져왔습니다. 사실 그것 말고도 다른 각도에서 찍은 것도 있거든요."

"일단 들어나 보죠."


대충 바닥에서 주운 모니터로 영상이 송출되었다. 진짜 다른 각도에서 찍은 더 선명한 영상이었다. 이번에는 끊어짐이나 화질 문제가 없었다. 다만 체격과 옷만 나올 뿐 얼굴은 나오지 않는다는 게 흠이었다.


다시 말해, 잘 설계된 영상이었다.


"이제야 믿으시겠습니까?"

"얼굴이 안 나오지 않았습니까. 이걸로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럼 우리 마을에 이런 빨간 장발이 더 있습니까?"

곰곰히 생각해보지 않아도 떠오르는 여자가 한 명 있었다.

"그쪽 알바생도 빨간 장발이던데."

"그럼 저희 알바생이 죽였다는 소린가요?!"

옷가게 주인의 목소리가 험악해졌다. 분노에 가득찬 목소리여서 보통 사람들이라면 바로 사과하고 엎드렸겠지만 나, 사기꾼의 귀로 들은 그 목소리는 전형적인 사기꾼의 인위적인 연기였다.


"저희 알바생은 키가 이 정도로 높진 않습니다. 봐요, 영상의 얘는 키가 이렇잖아요? 우리 알바생 키는 150cm대 언저리입니다. 작다는 뜻이요. 이 키로는 우리 알바생은 택도 없습니다!"

"제 말은 빨간 장발이 생각보다 흔하다는 거죠."

"그건 변명이고, 어떻게 제 알바생을 모욕할 수가 있는 거죠? 그것도 생사람을!"

딱히 무례도 아닌 상대의 작은 실수를 과장해 꼬투리를 잡고 그것만 가지고 쭉 늘어져 내가 무슨 일을 당했든 간에 내 잘못으로 만드는 화법. 내가 소싯적에 자주 써먹다 버렸던 화법이었다.


근데 그 말에 일리가 있었다. 만약 키를 인위적으로 깔창같은 거로 늘렸으면 비율이 이상했을 텐데 알바생의 키로 설명되지 않았다. 그럼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제가 포스기 좀 쓸게요."

타테냐의 말에 무언의 감사인사를 한 후 말을 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보다 제 알바생을 모욕한 것에 대해 사과부터 하시죠. 전 옷가게의 주인으로서 용납할 수... 아앍앍"

[삐빅. 거짓.]

?

포스기가 작동했다. 근데 뭔가 익숙한 소리가 났다.

"야, 씨, 전깃줄로 묶어서 전기 통하잖아! 이거 풀러!"

다행히 전기로 착각하는 듯 했다. 전깃줄로 묶기 잘했다.

"그니까 나는 옷가게의 주인으로서... 아앍"

"[삐빅. 거짓.]"


?


뭐지?


옷가게 주인이 아니야?


그럼 옷가게 주인은 어딨어?


그보다도 순간적으로 나온 옷가게 주인의 목소리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익숙했다. 그건 뭐였을까.

생각났다. 항상 들었던 목소리. 언제나 나와 함께 있는, 지금도 내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 이건...


"평행세계의 나잖아?"


퍼즐이 맞춰졌다. 옷가게 주인도 알바생도 범인이 아니었다.


범인, 즉 평행세계의 나는 옷가게에 접근한 후 알바생의 옷을 훔쳐 알바생으로 위장해 술집 주인을 죽였다. 그리고 그 영상을 알렉스한테 넘겨 하인리히를 협박하게 했다.

옷가게 주인이 소문을 알았던 이유는 아마 평행세계의 내가 정보를 흘렸기 때문이었고, 알바생의 옷에 피가 있는 이유는 유사시 알바생에게 덮어씌우기 위함이었다.


만약 하인리히에 대한 사기가 성공한다면 헬렌 누나랑 하인리히만 ㅈ되는 거였다.

만약 하인리히에 대한 사기가 실패한다면 옷가게에 전부 뒤집어씌우면 되는 거였다.

그게 아니더라도 자신의 정체를 모르는 카밀로나 알렉스를 이용해 꼬리를 자르면 그만이었다.


생각해보니 내 체구는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어쩌면 이 평행세계에서 내가 멸치라면 충분이 여자로 변장하는 것도 가능했다.


다시말해 평행세계의 내가 만든 이중 삼중으로 잘 쳐진 견고한 함정 그 자체였다.


이제 싸움은 사기꾼 vs 사기꾼. 세계관 최강자들의 전쟁이었다.



그때 타테냐가 조용히 다가와 무언가 퀘스트를 건넸다.


"퀘스트 새로 나왔어요."

"뭔데?"

"2개에요."

"두 개나?"

"사기꾼의 살인을 처벌하라. 보수 4백만원. 옷가게 주인을 구출하라. 보수 6백만원."

...

뭐?

사기 피해 구제보다 보수가 더 높아?

난이도가 대체 얼마나 괴랄하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