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과 참회를 담아, 나의 영웅에게



 큼지막한 쇠고기가 올라간 쌀국수에 대하찜, 매운 돼지고기볶음과 함께 마시는 앙코르 맥주 세 병이 단돈 만 원.


 부산해대 재학시절, 그분께선 캄보디아의 항구도시, 깜뽕솸으로 순항 훈련을 나갔을 때, 학우들과 때운 첫 끼니를 이렇게 소개했었다.


 그 도시는 나름대로 캄보디아 내에서도 큰 도시에 끼는 편이라고 했었는데, 그런 도시의 초등학교도 한국 기준에선 헛간이나 다름없는 건물에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교사가 교편을 잡고 있었으며, 부산해대 제복을 입고 있는 자신을 귀빈 모시듯 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었다. 


 항상 대화할 때 가감이 없었던 그분께선 비록 인터넷 카페의 채팅방이었지만, 그 인터넷 채팅이 인생의 전부였던 내가 진심을 내비칠 때마다 한없이 진지하게 상대해 주셨다.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 지금의 직업을 가지게 된 이유, 당시 직업군인을 꿈꾸던 내게 해줄 수 있는 현실적인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다. 


 비참하기 그지없는 학창 시절과 거기에서 눈을 돌리기 위해 현실도피를 함으로써 파탄이 나버린 가정을 내팽개치고, 오직 인터넷만이 진짜 세상이기를 바랬던 내게 있어 그분의 존재는 이정표이자 등대였고, 또 태양이었다.


 가스통으로 집을 날려버리고 사망한 아버지 덕에, 동네 미용실에서 일을 하는 어머니와 함께 단칸방에서 근근히 살아가던 나의 영웅은 해사고 진학 이후 일찍이 해양대 진학을 목표로 했었다.


 나와 비슷하게 편모슬하에 제대로 된 밥 한 끼 챙겨 먹기 힘든 환경에서 커온 그분의 학창 시절은 나만큼이나 순탄치가 않았다.


 어린 학생들 특유의 약자 멸시는 옛날이라고 다를 게 없었고, 그것이 지방의 실업계 고등학교라면 더 설명할 필요도 없는 수준이었겠지.


 그 당시 진학반에 있었던 지역 유지의 아들은 그런 그분을 비웃었고 학업을 방해하였으며,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는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


 과외 한번 못 받고 오로지 독학만으로 해양대 진학을 준비하던 나의 영웅은 당당히 부산해대 진학에 성공했고, 그 지역 유지의 아들은 지잡대나 겨우 갈 수준의 성적을 얻었다.


 그리고 졸업을 앞두고 이어진 천안함 폭침 사건. 


 누구는 어디 해운에 몇급 항해사로 취직해서 연봉 얼마를 받느니, 누구는 상선근무로 군복무를 떼우느니 할 때, 그분께선 해군 장교의 길을 걷기 시작하셨다.


 당연히 주변에선 말렸고, 대한민국에서 애국심 하나만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어떤 대우를 받는지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분이었지만, 그 결심이 바뀌는 일은 없었다.


 그러니 당시 성장배경도 비슷하고 앞뒤 없이 직업군인 노래를 부르던 나를 가만둘 수 없으셨던것 같았다.


 막연하게 직업군인을 목표로 했던 내게, 밀리터리 오타쿠라면 많은 화기들을 접할 수 있는 해군 병기특기 부사관에 지원해 볼 것과, 대학진학보단 고등학생 레벨에서 취득할 수 있는 폭발물 관련 자격증과 체계적인 체력단련법을 가르쳐 주셨었다.


 나도 거기에 매진해 중고등학교 시절을 그쪽에 초점을 두고 있었고, 자격증 필기시험 합격 및 당시 부사관 체력측정 기준 1급에 들 정도로 몸을 만들어 나갔었다.


 그땐 그게 세상의 전부였고, 내가 꿈을 향해 올바른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고 믿고 싶었으니까. 


 그 끝이 또 다른 현실도피이자 지난 5년간의 유대와 노력을 짓밟는 자폭인 줄 알았다면 애초에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리다는 핑계를 대고 싶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분은 내 나이때 새벽같이 일어나 신문 돌리는 아르바이트를 했고 샤프연필로 허벅지를 찔러가며 자신의 꿈을 향해 매진하여 끝끝내 그 목표를 이루어 내셨었다.


 그런 그분을 앞에 두고, 나는 인터넷 글 몇 개와 내가 듣고 싶은 말만 해주는 댓글에 넘어가 지난 노력과 앞으로의 포부를 쓰레기 취급하며 환승하듯 장래희망을 갈아탔다.


 그분의 발치에 닿을 수조차 없는 근성으로 그분을 기만하고, 시간을 빼앗았고 사익만을 추구했다.


 그러니 이젠 다시는 말도 섞지 못할 줄 알았다.


 하지만.


 "몸 건강히 잘 다녀오세요."


 "휴가 나오면 같이 놀게 진해로 내려오세요."


 "병사는 몸 건강이 우선이니까 항상 조심하시고요."


.

.

.


 "전역 축하드려요. 지금도 장래가 고민이시라면, 해군의 길은 아직 열려있답니다."


 그분께선 군 생활 내내 나를 격려해주시고, 또 관심을 가져주셨다.


 오히려 내가 현실 도피할 또 다른 피난처를 열어줬던 그 사람이 먼저 귀찮다며 나를 손절 했었으니, 뒤늦게나마 진짜로 나를 생각해줬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그런 사람에게 내가 어떤 패악질을 부렸었는지를 뼈저리게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한 번 엇나간 톱니바퀴가 다시 맞물리는 일이 없는 것처럼 그분과 나는 저마다의 길을 걸어 나갔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내가 충동적으로 지원한 대학과 장래 희망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 나의 영웅은 이번에도 내게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다.


 인생은 고속도로와도 같다고. 


 한 번 정하고 달리기 시작했으면 그 끝을 봐야 하고, 도중에 경로를 바꾸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돈과 시간을 필요 이상으로 들이게 될 거라고.


 도중에 휴게소에서 쉬고 기름도 채워갈 수 있겠지만, 너나 나나 그럴 여유는 거의 없을 테니 열심히 달려 나가라고.


 그래서 더욱 노력했다. 


 그때 내 자리에서 내가 이룰 수 있는 최대한의 성과를 내려 했고, 그것을 이루는 데에도 성공했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내가 처음으로 일구어낸 인생의 열매들을 자랑하려 할 때, 그분께선 이미, 너무나도 일찍 먼 곳을 향하는 항해를 시작하신지 오래였다.


 사출산의 한가운데 서서 절을 올리는 마음으로 다시 한번 그분을 만날 수 있노라면, 꼭 전하고자 하는 말이 있다.


 저는 원하고자 하는 바를 이루어, 잘살고 있습니다.


 비록 방향은 달라도, 당신의 가르침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