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티끌조차 존재하지 않는 순백의 공간에서 한 남자가 깨어났다. 그 남자는 거칠게 숨을 몰아 내쉬고, 고개를 돌려 주변을 바라보았다.

   

 남자가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우고, 엉덩이를 털고, 한 걸음을 내딛을 때 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마침내 남자가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존재를 자각했을 때, 한 사실도 함께 깨닫게 되었다.

   

 이곳이 저세상이란 것을.

   

   

 아무런 이정표도, 길도, 심지어 방향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 조차 의문인 이 공간에서, 남자는 어디를 향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왼쪽? 오른쪽? 앞 아니면 뒤? 아니, 광할하다는 표현도 부족할 이 공간에서 이런 사소한 것이 중요하기나 할까?

   

 남자가 걷기 시작했다. 왼쪽, 오른쪽, 앞과 뒤. 그 스스로 자신이 어디를 향해 걷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언제나 수동적이었고 방황뿐이었던 그의 삶과는 달리, 죽음 이후의 그는 방황하지 않았다. 어차피 죽은 마당에 어디로 가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가 걸어가는 길에는 그의 신발 자국이 묻어났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공간에, 그의 흔적이 들어섰다.

   

   

“안녕?”

   

 남자가 걷기 시작한 지 이승의 날짜로 대략 일주일쯤이 되었을 때, 그의 앞에 키 작은 어린이 하나가 나타났다.

   

 그 아이의 얼굴에는 남자의 모습도, 여자의 모습도, 아기의 모습도, 늙은이의 모습도 모두 담겨 있었다.

   

 남자는 눈치가 빨랐다. 따라서 단박에 그 아이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신?”

 “히힛, 맞아. 내가 조금 늦었지? 이제부터는 같이 걸을까?”

   

 신이라는 아이는 헤실거리면서 남자의 옆으로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남자는 이따금씩 신을 내려다보면서 계속해서 걸어왔던 길을 이어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길을 걷는 사람은 둘로 늘어났지만, 여전히 길 위에는 남자의 발자국만이 남았다.

   

   

 남자와 신이 같이 걷기 시작한 지 어연 한 달이 가까워졌다. 두 사람은 자지도, 쉬지도, 먹지도 않고 계속해서 걷기만을 반복했다.

   

 뒤를 돌아보아도 더 이상 시작점은 보이지 않았다. 남자의 마음에는 막막하고도 무서운 감정이 피어올랐다.

   

 “근데... 언제까지 걸어야 합니까? 설마, 평생?”

 “에이, 지옥이면 몰라도 여긴 아니야. 그냥... 내가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 될 때 까지?”

 “충분하다고 생각 될 때 까지 얼마나 남았습니까?”

 “글쎄다~ 아직 한참 남은 것 같은데?”

   

 남자는 이유 없이 항상 킬킬대며 웃는 신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다지 내색은 하지 않았다. 저 꼬맹이가 신이라는데 뭐 어쩌겠는가. 

 그 둘은 계속 걸었다. 그냥, 계속 걸었다. 그 무한한 흰 공간을, 무한하게 걸어 나가면서 제멋대로 자취를 남기고 있었다.

   

 신은 걷고 있는 남자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찡그린 표정과, 계속해서 움켜쥐는 목. 분명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것 같았다.

   

 “왜 자꾸 그래. 어디 힘들어?”

   

 신의 물음에 남자는 여태껏 멈추지 않았던 걸음을 멈추고 숨을 몰아쉬었다. 

   

 “자꾸… 목이 좀 마르고 숨 쉬기가 불편하네요….”

 “그럴 수 있지. 한 번도 안 쉬고 이렇게 멀리까지 걸어왔으니까. 내가 물은 줄 수 없지만… 좀 쉬었다 갈까?”

   

 신은 남자를 부축해 바닥에 천천히 앉혔다. 그는 이마에 송골송골 맺히는 땀방울을 옷에 적시며 쇠한 기력을 달래고 있었다.

 그의 너머, 남자가 걸어온 곳을 바라보니 그의 발자국이 너저분하게 묻어 있었다. 도저히 보이지 않는 출발점으로부터 쭉 이어진 그 자국들은, 마땅히 하나의 선으로 볼만한 것들이었다. 신은 그러한 길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너는… 좀 특이해.”

 “예?”

   

 남자는 여전히 헐떡이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이곳에서 나를 만나는 사람들은 말이야… 나에게 계속 무언가를 했어. 질문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나를 보자마자 눈물 흘리며 회개하는 사람들도, 또 나에게 화를 내는 사람들도 있었지. 근데 넌 나를 봤을 때부터 그다지 뭘 묻지도 않고 계속 걷고 있잖아.”

   

 신의 물음에 남자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꽤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신에게는 나름 따분할만한 긴 시간이었다.

   

 “사실, 제가 죽은 건지 잘 모르겠어요. 저는 그냥 침대에서 자고 있었는데… 급성 심근경색인가? 아무튼 죽은 순간조차도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감흥 없는 삶이었어요. 자극도, 쾌락도 없는. 그래서 당신에게 답을 찾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그냥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생각 뿐 이었습니다.”

   

 “뭐? 죽은 순간이 기억이 안나? 정말?”

 “네...”

 “아이 이거 좀 심각해졌는데… 빨리 출발 해야겠다. 이야기는 가면서 하자고!”

   

 신은 급하게 남자의 손을 붙잡고 남자를 일으켜, 걸음을 재촉했다. 갑자기 급변한 신의 태도에 남자는 궁금함을 품었지만, 딱히 물어보지는 않았다. 오히려 신의 말처럼 빨리 이곳을 나가는 것을 바랐으니까.

   

   

 신과 남자의 걸음은 이전보다 미묘하게 빨라졌다. 남자의 발자국의 보폭은 이전보다 한 뼘 더 넓어졌고, 그럴수록 남자의 숨소리는 점점 더 차올랐다.

   

 “원래 절차 상 만나자마자 했어야 했는데 괜히 여유 부려서… 너에게 물을 것이 있어. 너의 삶의 의미란 무엇이었지?”

 “네?”

 “뭐, 아무거나 상관없어. 사랑이여도 좋고, 행복이라는 고리타분한 말도 좋지. 너무 부담 가지지는 마. 일종의 후기나 피드백 같은 거야. 너희들의 이야기를 듣고, 다음에 태어날 삶의 방향을 조금 조정하는 작업이거든.”

   

 신은 그 작은 품속에서 어디서 났는지 모를, 작은 노트와 펜 하나를 꺼냈다. 똘망똘망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신의 눈빛에, 남자는 괜한 부담감을 느꼈다.

   

 자신의 삶의 의미란 무엇이었을까?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새 학기마다 나눠준 인쇄물에 ‘자신이 가장 행복하다고 느꼈던 순간을 쓰시오.’라는 질문도 제대로 채우지 못했는데, 돌아보는 삶에 과연 이렇다 할 의미가 있었을까?

 초등학교 때는 그저 다른 아이들이 하는 것을 따라하고, 중학교 때는 선생님들의 눈치를 보며 공부를 하고, 고등학교 때는 부모님이 미리 정해주신 길을 밟아 진로를 정하는, 그런 이정표가 가리키는 삶을 그는 묵묵히 살아왔다.

 그렇게 적당히 남들을 따라 살아온 그에게, 처음으로 내던져진 사회란 너무나 지독했다. ‘네가 알아서 해.’ 사회로 던져진 남자는, 더 이상 친구나, 선생님, 부모님, 동기들에게 어디로 가야할지 묻을 수 없었다. 

 내내 좁은 일방통행 길만 달려온 그가 처음 마주한 넓은 공터 같은 세상에서, 그는 길을 잃었다. 어디로 가든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가지 못할 것 같은 막막함과 두려움에, 그는 쓰러졌다.

   

 “그냥 남들 따라 공부하고, 남들 따라 대학가고, 남들 따라 군대가고… 그러다가 남들 따라….”

 “허, 네 인생의 의미가 남들 따라야? 너 스스로 한 거 없어?”

 “뭐, 옷 살 때나… 아니면 점심 메뉴 고르는 거?”

 “장난 하냐?”

   

 남자는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신으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내심 그의 삶이 부끄러웠던 것이다. 

   

 “그냥, 남들 따라 가다보면… 언젠가 저도 남들처럼 멋진 사람이 되어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었죠.”

   

 신은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며 어색하게 뒷목을 쓰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계속 걸어 나갈 뿐이었다. 해와 달이 없지만 하루가 수십 번 바뀌고, 별들이 우주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제자리로 올 때 까지. 무수한 세월 동안 그 둘은 아무 말 없이 걸었다.

 그때 동안 남자의 목은 더 마르고, 숨은 차올랐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몇 번 자리에 주저 앉을 정도로. 하지만 신은 그런 남자를 부축하지도, 도와주지도, 동정하지도 않았다. 그저 냉정하게, ‘빨리 일어서.’라고 하고는 저 멀리 앞서 갈 뿐이었다.

   

 “의미는 가치다. 의미없는 삶은 삶으로서의 가치가 없다. 이게 내가 세상을 만들 때 스스로 세운 규칙이야.”

   

 둘이 함께 걸은 지 이승의 날짜로 대충 3년 쯤이 지났을 때, 오랜 침묵을 깨고 신이 남자에게 말을 건넸다.

   

 “그럼에도 난 너희들에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어. 뭐, 너희들은 생명의 탄생이 아주 숭고하고 거룩한 과정이라고들 하지만, 의미를 부여받지 않은 생명의 탄생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숨을 제대로 쉬지 조차 못한 탓에, 남자는 한치 앞도 제대로 보기 힘들 정도로 어지럼증을 느꼈지만, 그 속에서도 신의 목소리는 뚜렷하게 들렸다.

 남자는 신의 어깨를 붙잡고, 힘겹게 걸었다.

   

 “누군가가 이곳에서 말했지. 의미가 곧 가치면, 왜 우리들에게 의미를 내려주지 않았냐고. 내 창조물이지만 참 우스운 질문이었어. 남들이 멋대로 부여한 의미는, 심지어 신인 내가 너희들에게 부여하는 의미조차도 아무런 가치를 가지지 않는데.”

   

 남자는 어느새 훌쩍 커버린 신의 모습을 느꼈다. 비록 앞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신의 등은 자신과도 비슷하게 넓었으며, 더 이상 어깨에 팔을 기대는 것이 불편하지 않았다. 공간에 울리는 신의 목소리도 이전과는 다르게 굵었다.

   

 “의미는 스스로 부여할 때 고유한 가치를 가지지. 어떤 사람이 너를 나쁘다고 의미를 부여한다고 해도, 네가 진짜 나쁜 사람이 되는 게 아니잖아? 스스로의 의미를 찾을 때, 비로소 삶은 주체성을 가진다. 하지만 너는 그러지 못했어.”

   

 남자는 말라오는 목을 붙잡고, 고통스러운 듯 신음을 내쉬었다.

   

 “네 삶은 의미가 없으므로 가치가 없다. 네가 지금 느끼는 고통은, 삶이 의미를 부르짖는 소리야.”

 “끄윽… 억…”

   

 남자는 더 이상 신의 어깨를 붙잡지 못했다. 두 발로 걷는 대신, 바닥에 엎어져 천천히 신을 따라 기어가고 있었다.

 신은 뒤를 돌아 그런 남자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혀를 차면서 그에게로 다가갔다.

   

 신은 남자의 얼굴에 손을 올렸다.

   

 “자, 도착했다. 이제 눈을 뜨시게.”

   

 신이 말을 끝마치는 순간, 남자는 그 모든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었다. 불을 집어 삼킨 듯한 갈증도, 물속에서 숨을 쉬는 듯한 고통도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그의 앞에 바다가 있었다. 생명도, 소리도, 그 무엇도 없었던 공간에 분명 파랑이 치고 있었다.

   

 “대충 한 5년 쯤 걸은 것 같군. 아니다, 너에게는 50년처럼 느껴졌을려나?”

   

 어느새 신은 은빛을 뽐내는 백발의 노인이 되어 있었다.

   

 “이제 떠날 시간이야. 저기 파도가 치는 삶의 바다로 몸을 던져. 고통은 없을 거고, 의미 없는 새로운 삶이 탄생할 것이다. 그전에…”

   

 신은 남자의 어깨를 붙잡고, 지팡이로 한 곳을 가리켰다.

   

 “네가 걸어온 길을 봐라.”

   

 신이 가리킨 곳에는 무수한 걸음들이 있었다. 무한하게 펼쳐진 흰 공간을 아득히 메우는, 선으로 보일 정도로 올곧고 정직한 길이 하나 있었다. 물론 그것은 남자의 발자국이었다.

   

 “이정표도, 나침반도 없는 곳을 너는 두 발로 걸어 이곳에 도착했다. 방향도 시간도 존재하지 않는 이 험난한 곳을, 너는 고작 너의 두 발로 완주했다는 소리야.”

   

 남자는 어느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스스로 왜 우는지 알지 못했지만, 분명 어떠한 감정이 깊은 곳에서 북받쳐 눈물을 퍼나르고 있었다. 남자가 차오르는 눈물을 닦는 순간, 신은 다시 아이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천진난만하고 헤실거리는 웃음을 띄던, 그런 소년으로.

   

 “이 무한한 공간에, 너라는 의미가 들어섰다.”

   

 그 순간 신은 사라졌다. 신과 함께, 저 너머로 이 공간이 사라지고 있었다.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곧바로 달리기 시작했다. 끼룩거리는 갈매기가 있는 곳으로. 새파란 파랑이 치고, 파도 소리가 고동치는 삶의 바다로.

 풍덩- 하는 마지막 소리가 울려 퍼지고 나서야, 그 공간은 남자의 발자국만을 남겨 두고 서는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헉!… 헉…헉…!”

   

 그는 의미도, 가치도 없는 삶으로 다시 돌아왔다. 동시에 이전에 느꼈던 타는 것 같은 갈증에 목이 몸부림 쳤다.

   

 쿠당탕!

   

 부엌의 냄비와 식기들이 바닥으로 강하게 떨어졌다. 남자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하고 목을 움켜쥐고는, 급하게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는 냉장고에 있는 1.2L짜리 생수병을 단숨에 들이키고 나서야 달아오르는 숨을 겨우 내쉴 수 있었다.

 

 그는 흥건하게 젖은 채 찝찝한 냄새를 풍기는 티셔츠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손을 들어 이마에 맺혀있는 땀방울을 닦기 시작했다. 그리곤 깨달았다. 자신의 목에 밧줄이 휘감겨 있었다는 것을. 태어나서 담배 한 개비 펴본 적이 없었지만, 목에 매달려 있는 밧줄 끝에, 그리고 천장에 매달려 있는 밧줄 끝에, 불로 태워진 듯 그을린 자국이 남아 있었다는 것을.


 그는 다시 돌아온 것이다. 의미도, 가치도 없는 고통의 연속인 삶 속으로. 올바른 이정표도 없고, 오히려 잘못된 방향만이 안내하는 길 속으로. 하지만 그의 마음에는 막막함이나 두려움 따위는 없었다. 

 그는 옷을 벗고, 몸을 씻었다. 목을 비벼 밧줄에 눌린 자국을 없애고, 떡 진 머리를 손질했다. 옷을 갈아입고, 신발을 고쳐 신었다. 그리곤 길을 나섰다. 무한하게 뻗어진 공간을 향해 첫 걸음을 내딛었다. 이정표도, 방향도 없는 무한한 공간에, 그라는 의미가 들어서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