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나홀(娛裸惚)의 아호(雅號)는 색수(索水)라. 이름자 오나홀로 말하거늘 성인 오는 즐기다의 뜻이며, 나홀의 뜻을 풀자 하면 벌거벗음과 황홀함을 뜻한다. 그는 스스로의 아호를 물을 찾는다는 뜻의 색수로 정했으니, 자연으로 돌아가 물을 찾는 자연과 하나됨을 중시했고, 또 그렇게 끝을 맺은 자이다.

  그의 시조는 두 가문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며, 그 두 가문은 두부(竇膚)와 나무(娜撫)가문이니, 두부가는 구멍과 살갗을 뜻으로 삼아 삶에 구멍하나 없는 자 있겠느냐며 지방에서 벼슬을 하며 융통성있는 정책을 펼친 가문이며, 나무가는 아리따움과 어루만짐을 뜻으로 삼아 대대로 비단옷을 만드는 장인 집안이었다. 두부가와 나무가가 통혼을 통해 하나로 합쳐져 나홀의 집안인 오가가 되었으나, 이전에는 중앙으로 진출한 이는 없었다.

  그는 추측컨대 색목인(色目人)이라. 오가의 중앙 진출에 대한 첫 기록은 고대 애급(埃及)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애급에서는 태양황(太陽皇) 파라오를 제하면 오가의 물건을 사용할 이 없었으나, 오가의 물건은 지하 시장에서 성황리에 판매되었다 한다. 그러나 지하 시장이 적발되며 오가는 사분오열되었고 그 중 한 일파가 타향만리 한(漢)나라까지 오게 되는데, 이 자가 나홀의 성을 하사받아 오가를 창건한 시조이다.

  그의 직계 조상인 오루가즘(娛耬可怎)이 한(漢) 대에 중원에 도달하나 조정에 신비한 이가 나타났다는 장계를 보내어 이내 황제 앞으로 오게 되는데, 이에 황제가 명해 환관이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허나 환관은 어디에도 쓸모가 없다는 평을 내리나 황제는 이에 다른 이의 의견도 들어봐야 한다 하니 명을 받들어 호위대장이 살펴보았다. 호위대장 왈, 무릇 남자들의 사랑을 받을 자며 특히나 미혼인 자를 다스리는데 큰 효과가 있을 것이라 하였다. 이에 황제가 크게 기뻐하며 이름을 음차하며 오씨를 내림에, 농경 사회에 맞추어 어찌, 가능하다, 씨뿌리는 기구, 즐거움의 뜻을 담은 글자를 내려주심에 오루가즘 옹은 성은에 감복하였다.

  나홀은 대다수 남자가 그를 보고 훌륭한 외모를 지녔다고 말하며, 뽀얀 피부를 갖고, 무엇이든 담아낼 수 있으나 함부로 내뱉지 아니하며, 문관임에도 무관처럼 몸의 신축성이 있었고, 겉은 매끈하나 속이 복잡하게 생기어 외강내유의 인물이었다. 수많은 음해를 당하더라도 모든 관리를 기쁘게 만들 줄 알아 조정에 적이 거의 없었으며, 기혼 관리조차 그와 노는 것을 좋아하는 이가 많았다.

  허나 한 왕조가 망하고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의 때가 들어서니, 그의 단점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한 왕조에만 충(忠)을 다하지 않으며, 이 왕조 저 왕조를 옮겨다니며 단지 친하게 지내는 것만 하며 한(漢)대에 보여주었던 충심과 국은에 보답하는 태도는 보이지 않았다. 많은 이가 모이는 연회자리에는 나타나지 않으며 높은 관리와 독대만을 하였다. 임금, 재상과 독대하며 간언(諫言)을 하지 않고 간언(間言)만을 일삼고 허울뿐인 듣기 좋은 말과 보기 좋은 행동만을 하니, 그와 독대한 관리는 황홀한 기분만을 느끼며 나랏일을 등지게 되었다. 이를 세간에서 말하기를 직함만 관리이지 하루하루 일하는 몸 쓰는 천한 일과 다름없다고 하였다.

  이후 수(隋)와 당(唐) 시기에는 다시 두루 많은 관리들과 친하며, 황제가 나홀에게 자보색색(姿保色索)의 관직을 주어 맵시를 유지하고 옷의 색깔을 찾도록 하여 궁 내의 의복을 담당하게 하였다. 이에 세간 사람들의 평가는 뒤집혀 사람들이 말하길,

  "오나홀의 쓰다듬음 한 번이 예쁜 사람을 만나는 것 보다 더 행복하다."

라 했다.

  그러나 마을의 상투를 채 틀지도 않은 어린 아이들이 그와 친해지기 시작했다. 또 조정의 관리들이 그와 개인적으로 친해지며 나랏일은 뒷전으로 되었다. 이에 많은 간관(諫官)들이 상소를 올리길,

  "색수(索水) 공(公)은 분명히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뭇 사랑하지 않는 남자가 없으니 이에 훌륭한 사람이라고 세간에 알려져있습니다. 허나 그에게 홀린 상투도 틀지 않은 어린 아이들이 글공부를 하지 않고, 충효(忠孝)를 다하지 않고 비혼(非婚)을 주장하며 홀로 살겠다 말하니 문제가 심각합니다. 다른 관리들도 색수 공과 만난 뒤 황홀함을 잊지 못하여 나랏일을 뒷전으로 두고 계속해서 독대 만남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나라의 충효가 흔들리며 나랏일이 사적이고 은밀한 만남보다 뒷일이 되어버리니 일의 순서가 맞지 않고 원칙이 바로 서지 않습니다."

라 했다.

  그러나 황제께서는 환관의 음해로 관리들이 허황된 망상을 한다 생각하여 자보색색(姿保色索)의 관직을 빼앗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계속되는 상소에도 황제는 나홀을 계속해서 신임하며 또 나홀과 개인적으로 친했으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이들이 많아졌다 생각한 나홀은 관직을 사임하며 왈,

  "내 조상은 상공(商工)을 주로 했으나 한(漢)대에 중원(中原)으로 건너와 천한 상공(商工)을 그만하고 사(士)의 길로 들어섰다. 이에 나는 두루 사람들과 친하며 만나고 은밀히 독대하더라도 모든 사람을 동일히 대했다. 또한 백성들과도 모두 노소(老少) 관계없이 두루 친하고 기쁨을 나누고자 노력했다. 그리하여 나라 전체에 홀애비마저도 부족함 없이 살 수 있도록 노력했으나 이 부단한 노력이 음해받아 이 노력을 계속하지 못하니 이것이 억울하고 분할 따름이라 생각했다. 허나 옛 말에 질번착정임신교배색수(叱煩捉正恁臣交輩索秀)라 하였으니, 꾸짖고 괴로워하더라도 바름을 잡을 생각을 하는 신하가 사귀는 무리야 말로 빼어남을 찾을지어니, 반박시니가마즘(反拍視怩訶魔怎)이라, 내가 떠나며 반대 쪽에 손뼉을 치며 바로 보고 부끄러워하니 어찌 마귀마냥 꾸짖겠는가. 내가 잘못 판단하여 저지른 일을 갚을 방법은 그들이 옳음을 받아들이고 사직하고 장성하며 절제가 되는 장정과만 사귀며 은거하는 것이 유일할 것이다."

라 하며 관직에서 물러나 다리 사이의 우뚝 솟은 돌에 앉아 도를 닦기 위해 은거했다.

  이후 오대십국(五代十國)을 거쳐 송(宋)대에 이르러 밤에 불야성을 이루는 개봉의 모습을 보며 실록 기록을 살펴보던 이조 판서가 필요성을 느끼고 다시 그를 천거하여 쓰려 은거지를 찾아갔으나 그가 앉아있었다 전해지는 돌에서 우유와 같은 흰 물이 계속해서 솟아오르는 것 말고는 그를 다신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후손으로 관직에 올라 유명해진 자는 몇몇을 댈 수 있다. 그의 성을 이은 직계로는 오랄색수(娛剌塞手)가 있다. 그의 이름자 랄색수는 발랄함을 말하는 랄과 손을 막는다는 의미가 있어 손을 쓰지 않고 입으로 말하며 행동하는 관리였으리라 짐작하는 이가 많다. 랄색수에 대한 사료는 부족하나 그의 일화로 전해지는 것을 적자면, 그는 손을 대지 않고 입만 놀렸음에도 수만의 장정이 그를 믿고 움직였다고 하며, 수만의 적군이 있는 곳으로 혈혈단신으로 들어가 손으로 무력을 하나 쓰지도 않고 입만으로 수만의 적군을 퇴각시키는 등 뛰어난 문장가라는 일화가 전해진다.

  방계로 성을 잇지 않았으나, 그의 후손으로는 탱가(撑佳)와 라부돌(羅婦突)이 있다.

  탱가는 수많은 침공을 버텨왔다 하여 '탱(塞)'의 성을 하사받은 무인 가문의 자손이었으나, 탱가는 문과나 무과 모두 나가지 않고 풍류를 즐기며 살았다. 가의 얼굴은 상인처럼 붉었으나, 자(字)의 뜻처럼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기로 유명했으며, 제아무리 가짜인 그림이라 하더라도 그의 이야기와 함께 있으면 마치 진짜를 보는 듯한 황홀함과 흥분을 느낄 수 있었다 한다.

  라부돌은 어부의 자손으로, 성은 그물의 라(羅)를 썼으나, 이는 어부의 자손이여서 羅를 쓰는지, 아니면 자신의 발명품으로 인해 그 글자를 쓰는지는 알 수 없다. 또한 실제로 있던 인물인지도 불분명하며, 다음에 소개할 일화에 맞추어 만들어낸 이름일 것이거나 본명이 아닌 별명이라고 보는 이 또한 많다. 라부돌은 아내와 사사건건 부딪히는 인물이라 아내와 부딪힌다며 부돌이라 불렸으나, 그물 모양의 옷을 발명하였으니, 밤에 사사건건 시비가 걸리지 않고 아내와 부딪힐 수 있었다 한다.

  허나 이 세 인물이 활동한 송(宋)대 이후 명(明)대와 청(淸)대를 거치며 점차 중원(中原)과 동방의 국가에서는 그와 그의 후손의 언급을 금기시하여 업적을 칭송하는 것은 물론이요, 기록하여 언급하거나 그들을 본딴 상을 만드는 것조차 금하게 되며, 다시 고대 애급(埃及)의 오()가와 같이 지하 시장에서 비밀리에 장사를 하는 집안으로 돌아오니, 침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에 사신(史臣)은 말한다.

  황제의 신임을 얻고 옷을 잘 입으며 남이 무엇을 흘리든 주워 담아주는 인(仁)의 표본이라 볼 수 있는 자이다. 허나 그 정도가 지나치고 다른 사람과 같이 있는 것을 경계해 홀로 으슥한 곳에서 독대만 하니 이는 타인의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으랴. 또 친함의 정도가 지나쳐 충효(忠孝)를 다하지 아니하며 오직 자신과 함께 있는 것만을 행복하게 여기는 가히 폐인이라 부를만한 사람으로 바꾸어놓았으니, 이 또한 벗의 도리가 아니라 할 것이다. 더욱이 모든 사람과 친하지 않고 내관들을 내치니, 모든 이를 담지 못하는 그릇이 아쉽다.

  허나 나홀의 사람을 기분좋게 하며 모든 이가 자신을 사랑하게 하는 재주는 필히 부러워할만한 재주요, 이는 후세 사람들이 경계해야하나 본받을 필요가 있는 수많은 재주 중에 하나일지다. 그러나 많은 이가 그의 재주를 부끄러이 여기며 동방의 국가는 그의 자손들의 업적까지 내치니, 통탄스러운 일이 아니라 할 수 없다.




백일장 이걸로 바꿔 내겠음 글 마음에 든다

저번꺼 글 수정함

한문 제대로 안해서 한문 뜻이랑 음보고 끼워넣음

반박시 네가 맞음

가전체 고전산문 갑자기 생각나서 씀

수정: 제목 및 부자연스러운 부분 수정 및 더 고전틱하게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