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 눈동자가, 깜빡인다.  무어라 무어라 말 하는 병사들. 그의 눈 앞에 떨어진 묵빛의 마검.


 흙먼지 잔뜩 묻은 얼굴. 표정이 짧은 순간 다채롭게 바뀐다. 당혹스런 표정부터 시작해서, 아랫입술을 깨물고 고민하는 표정, 결심하고 팔을 내 뻗으며 분노한 표정까지. 몇 초조 안될 짧은 시간에 바뀐 표정의 결과는 눈 앞에 떨어진 칼을 손을 뻗어 말아 쥐는 것.


 칼에 손이 닿자, 엄청난 스파크가 튀겼다.  그것과 함께, 그의 주변에 쓰러져 있던 수천구의 시체가 녹아내려 액화했다. 녹아버린 시신은 피보다는 조금 묽은 액체가 되어 칼을 쥔 그에게 빠르게 스며들었다. 



  힘이 샘솓는다. 팔 끝에서 머리와 말 끝까지 실핏줄이 솓아 오르는 느낌. 폭포수처럼 핏줄을 통해 들어오는 강대한 마력에 손 뻗을 힘 정도만 남았던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다.  


  피부를 타고 느껴지는 바람. 뒤돌아 선 적들의 함성소리인듯 싶었다. 이전 같았으면 납짝 엎드리고 빌었을 판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손에 쥐었던 칼을 전방을 향해 내지른다.  좌에서 우로, 길게 베어 넘긴 칼날 끝으로 긴 파동이 생기어 날아간다. 하복부와 상복부

사이를 길게 긋고 지나가는 파동. 전방을 향해 내달리던 병사들은 그 자리에 두 조각으로 찢어졌다. 


.......


 두려움을 모르고 달려 나오던 병사들은 주춤했다. 그를 향한 뜀걸음을 멈추고, 제 자리에 섰다. 개 중 몇은 무기를 내팽게치고  뒤돌아

왔던 길 만큼을 되돌아 가려 했으나, 뒤에 서 있던 말을 탄 백색의 기사들에 의해 자리에 쓰러졌다. 백색의 기사들은 본인 몸을 통쨰로

가릴 수 있을만큼 큰 방패를 등뒤에 지고 있었다.   


 말을 탄 기사들은 일렬로 퍼져 칼을 높이 들고 목에있는 핏대를 세우며 입을 벌렸다.  그와 함께 좀더 뒤에 서 있던 나팔수가 크게 나팔을 불었다. 잠시 제 자리에 서 있던  병사들은 그 나팔 소리를 듣고 하나 둘 이를 꽉 깨물고, 그를 향해 다시금 달려나왔다. 


 넘쳐흐르는 검의 힘에 도취된 그는 그것을 보고 한쪽 입꼬리만 올려 웃었다. 이번에는 칼을 두손으로 쥔 그는 몰려오는 병사들을 향

해 다시한번 자세를 취했다. 


 아까보다 몇배는 더 길고 진한 파동. 병사들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쓰러졌다. 허나, 한 열의 병사가 쓰러지면 다음 열의 병사가 한 보

전진하고, 다음 열의 병사가 또 쓰러지면,  또 다음 열의 병사가 전진했다. 그렇게 병사들이 전진하는 사이에,  갑옷을 갖춰 입은 

기사들은 뒤를 찔러 들어와 어느세 눈 앞에 와 있었다. 


 그것이 제국의 방식. 압도적인 숫자의 보병이 모루로 견디어내면, 갑옷과 마력으로 무장한 정예 기사가 뒤를 돌아 망치로 가격한다.

오랜 시간동안 그들을 상대하며 알게 된 사실이었고, 이미 자신의 바닥에 쓰러져버린 수천의 병사들에 의해 직접 체감한 전술이었다.


 도착한 기사들의 칼 끝에서, 파동이 뿜어져 나왔다. 한 열을 다 밀어 버릴정도로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한명의 사람이 절대 피할 수 

없을 정도로 오밀조밀하게 뭉쳐낸 파동이었다. 그는 쏘아오는 파동을 피하지 않고 그 자리서 그대로 칼을 들어 아래로 휙, 휘둘렀다. 


  그러자 위에서 아래로, 직선으로 이어지는 더 큰 파동이 생기어 나가며 날아오던 파동을 밀어내었다.  깔끔한 방어. 하지만 그것 또한 어느정도 예상했던 것인지 기사들은 그의 짧은 방어 동작 사이에  그의 전방으로 말을 내던지고 그의 지척까지 다달았다. 


 가속이 붙은 말들을 베어 내고 나니 지척에 다다른 기사들은 원형으로 그를 둘러 싸고 등 뒤에 매고 있는 방패를 내려 전진하고 있는 상황. 거친 파동을 날려 보지만 파동은 견고한 방패에 속절없이 막힌다.  원형으로 둘러 싼 기사들의 방패가 그의 공간을 조여오고 있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그의 공간을 죄여오는 기사들.  그들이 좁혀오는 포위망을 피해보고자 마력을 폭발시키고 파동을 제차 날려보지만, 기사들의 진격은 막을 수 없는 것이었다.  삽시간에  칼을 휘두를 수도 없는 수준으로 자신의 공간을 빼았긴 그는 칼을 휘두를 수

도 없는 거대한 방패의 벽에 갖혀버린다. 


 그가 옴짝달싹 못하게 되자 그제서야 다시금 칼을 뽑는 기사들. 방패의 벽 사이, 앏은 틈 새로 칼을 내질렀다. 


 엄청난 굉음.  전방을 향해 날려왔던 파동이, 방패와 방패 사이에 튀기며 사방팔방 튀었다. 그는 그 안에서 칼날에 담긴 예기와, 칼날이 뿜어 낸 파동을 온 몸으로 맞았다. 갈기 갈기 찢어진 넝마조각처럼 피떡이 되어 있는 그. 온 몸 여기저기 찌른 이들의 칼날이 박혀있었다. 

 

 고요해 진 평야. 그는 완전히 숨이 멎은 듯 싶었다. 그래, 이쯤 되면 죽었겠지 싶었던 기사들은 그의 몸을 향해 찌른 칼날을 하나 둘 

뽑아내려 했지만,


 뽑히지 않는다.  아무리 깊숙히 때려박았다 할 지라도 뽑혀야 하는데, 뽑히지 않았다. 무언가 불길함을 느낀 기사 하나가, 방패의 벽

사이로 쓰러진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는데......


 왼쪽 입고리만 씨익 올라간채로, 그는 웃고있었다. 


 칼을 잡은 기사들의 칼날 끝으로, 하얀 기운이 뽑혀 나왔다. 그것은 세례 라고 불리우는 기사의 힘. 파동의 원천이자 초인적인 그 힘이

그의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힘의 원천이 빨려 들어가자, 하나 둘 자리에 쓰러지는 기사들. 


 피골이 상접한, 산 미라의 모습으로 그를 감싸던 모든 기사들이 쓰러지자, 그는 단숨에 방패의 벽을 뛰쳐나왔다. 


  검은색과 하얀색. 마검의 마력과 기사들의 세례가 뒤섞이지 못해 겹색을 내며 그의 주변에 음영을 그리며 맴돌고 있었다.  


 하얗게 질린 병사들.  못 볼 것이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그의 반대편을 향해 무기도 버리고 뛰쳐 나갔다. 허나 그는 그들의 도주를 

용납하지 않았다. 


 보다 강대해진 힘으로 하나 둘, 도주하는 적들의 곁으로 가 목숨을 빼앗는 그.  뼈를 부수고, 내장을 뽑아내며 잔혹하게 하나씩 병사

들을 치워나갔다. 쓰러진 병사들은 모두 액화되어 그의 발 끝을 타고 칼 등으로 스며들었다. 


 끝끝내 마지막 병사마저 그의 손에 몸이 꿰뚫리자 지평선을 보일 정도로 긴 평야는  적막했다. 묵빛이었던

칼은 마치 생명체인것마냥 검신의 중앙에 달린 눈을 향해 잔뜩 핏줄이 돋아 나 있었다. 


 검신의 중앙에 떠진 눈과, 그의 녹색 눈동자가 마주쳤다.  눈으로 무언가 말 하는듯한 칼의 모습. 피 가 잔뜩 묻은 그의 입가에 미소

가 띄였다. 왼쪽과 오른쪽의 입꼬리가 함께 올라간, 진짜 웃음.

 

 그 웃음과 함께 그 또한 쓰러지며 서서히 녹아내려 마검에 빨려들어갔다. 녹색 눈동자가, 깜빡인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은, 파란색의

눈동자. 어깨춤까지 오는 길고 긴 금색 머리카락. 그는 손을 뻗었다. 보드라운 흰색 살결이 손 끝으로 느껴지는듯 싶었다. 그의 양 

볼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다 녹아 없어진 평야 위에는 칼 한자루만이 땅에 꽂혀 있었다. 비가 내릴듯 말 듯, 먹 구름이 잔뜩 낀 지평선에는 스산한 바람소리만이 가득했다.